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移植 실패했지만 프랑스 서정비극 확립에 기여
移植 실패했지만 프랑스 서정비극 확립에 기여
  • 교수신문
  • 승인 2008.03.24 14: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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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남재의 ‘오페라로 읽는 서양 근대의 편린’ ?파리로 간 이태리 오페라

베네치아의 아카데미아 델리 인코니티가 건립한 노비시모 극장을 설계한 것은 젊은 건축가 지아코모 토렐리(1608~1678)였다. 그는 또한 전체 무대 배경을 일거에 바꿀 수 있는 기계 장치를 고안해 낸 무대 기술자이기도 했다. 그의 정교하고도 새로운 장치는 이 극장 개관 공연이었던 사크라티의 오페라 「미친 척 하는 여자」에 시험적으로 사용되기도 했는데, 이런 장치에 힘입은 신속한 무대 전환으로 가능케 된 원활한 극적 진행은 향후 17세기 후반 오페라의 구성에 지속적인 영향을 끼치게 된다. 이런 성과로 ‘무대의 마술사’라는 애칭을 얻은 토렐리가 1645년 파리로 발길을 옮기게 된 것은 마자랭 추기경의 초청에 의한 것이었다. 1643년 루이 13세 사후 섭정을 펼친 황태후 오스트리아의 안느에 의해 재상으로 임명된 마자랭은 1643년에는 작곡가 마라촐리, 1644년에는 가수 레오노라 바로니와 아토 멜라니를 초빙하는 등 이태리 오페라를 프랑스에 들어오려는 노력을 기울이고 있었으며, 토렐리의 초청 또한 이러한 노력의 일환이었던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지적하듯 마자랭 추기경이 이태리 오페라를 들여오려 했던 이면에는 은밀히 첩자를 들여보낼 수 있는 가능성과 함께 정치적인 책략을 호도할 수 있다는 속셈이 깔려 있었지만, 그렇다고 순수 예술적 목적이 전혀 없다고도 할 수 없다. 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마자랭의 생애를 돌아볼 필요가 있다. 1602년 교황령에서 쥴리오 마차리니로 태어나 로마에서 예수회 학교를 마치고 스페인 마드리드 대학에서 수학한 그는 로마로 돌아온 후 교황청 군대의 대장을 거쳐 1628년에는 밀라노 주재 교황 특사 사케티의 비서로 임명된다. 만토바 작위 계승전쟁 중이었던 1630년 사케티의 후임 안토니오 바르베리니 추기경에 의해 프랑스에 파견돼 리슐리외 추기경과 협상을 벌였던 마차리니는, 리슐리외에게 깊은 인상을 받아 그에게 전적으로 헌신하기로 결심했다고 스스로 고백한 바 있다. 다시 로마에 돌아와 바르베리니 가의 미술가와 음악가들 모임의 일원으로 1632년 「산 알레시오」의 초연에도 참여했던 마차리니는, 1634년부터 36년까지 이번에는 교황 대사로서 재차 파리에 파견된다. 1639년에는 루이 13세로부터 프랑스 국적 취득 문서를 하사받아 쥘 마자랭이 된 그는 1641년 우르바누스 8세에 의해 추기경으로 임명됐다. 1643년 교황 우르바누스 8세의 서거 후 교황이 된 팜필리 가문 출신 인노켄티우스 10세와의 불화로 로마를 떠나야 했던 안토니오 바르베리니 추기경이 파리로 향했던 데는 이런 마자랭과의 오랜 인연이 큰 요인이 됐던 것이다.

토렐리를 초청한 후 가장 큰 성공을 거뒀던 공연은 「오르페오」였다. 1646년 안토니오 추기경의 비서로 파리에 온 시인 프란체스코 부티가 대본을 썼고, 역시 같은 해 파리에 온 바르베리니 가문과 친숙했던 루이지 롯시가 곡을 붙인 이 오페라는, 1647년 3월 2일 초연된 후에도 8회에 걸쳐 공연될 정도로 인기가 높았다. 그러나 이런 성공은 양날을 품고 있어, 프랑스의 경제적 곤궁을 이태리 태생 추기경이 후원하는 이태리 오페라의 경비 때문으로 돌리는 ‘마자리나드’라는 팜플렛과 노래가 등장하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이처럼 외국 출신 왕비와 총리에 대한 파리 사람들의 불만은 급기야 1648년 소위 ‘프롱드’의 난으로 표출된다. 르네상스의 본고장 이태리에 대한 시기심에 뿌리를 박고 있는 프랑스의 이태리에 대한 문화적 반감은 오페라를 쉽게 받아들이지 않는 대신 자신들의 전통인 궁정 발레를 선호하는 현상에서 두드러진다.

프랑스 발레의 시초는 발루아 왕조의 마지막 왕 앙리 3세 치하였던 1581년 프티 부르봉 궁전에서 펼쳐졌던 「시르세, 또는 왕비의 발레 코미크」로 간주된다. 밤 열시부터 다음날 새벽 세시까지 계속됐다는 이 발레는 왕의 어머니 카트린느 드 메디치의 명에 따라 역시 이태리 출신의 보주아외에 의해 수행됐는데, 프랑스에서 시와 무용, 그리고 음악과 무대 장치가 일관된 줄거리에 따라 펼쳐진 최초의 공연으로 평가되고 있다. 보주아외는 1582년 출판된 이 발레에 대한 매우 상세한 기록물의 서문에서 발레를 “여러 무용수들의 기하학적 뒤섞임”이라고 정의했는데, 이는 그가 자신의 작업을 아카데미 안에서의 인문주의적 맥락 안에서 파악하고 있음을 드러낸다. 발레 코미크는 단순한 여흥이 아니라 롱사르를 포함한 일곱 시인들을 뜻하는 플레야드의 귀족적 정신 및 바이프의 시와 음악 아카데미의 정신과 깊이 관련돼 있었던 것이다.

프랑스가 궁정 발레 선호한 문화적 맥락
   그러나 이렇듯 일관된 줄거리를 가진 발레 코미크의 전통이 중단 없이 이어지지는 못했다. 특히 「시르세」이후 거의 30년 간은 일관된 줄거리가 있는 발레를 찾아볼 수 없었다가 앙리 4세가 암살당한 해인 1610년 이후 약 십년 동안 다시 이러한 전통을 잇는 발레가 일시적으로 성행했다. 프루니에르가 “발레 멜로드라마티크”라고 부른 이러한 발레는 일관된 줄거리와 더불어 합창과 거창한 극적 피날레가 곁들여진 거의 오페라에 가까운 형태의 것이었다. 그러나 1621년 루이 13세의 치하에서 발레를 관장하던 드 뤼네가 죽고 난 후 발레 드라마티크는 다시 발레 아 앙트레로 전환된다. 이는 그 이름이 드러내듯 화려한 춤사위들이 줄줄이 이어지는 것으로서, 발레 코미크와 발레 드라마티크에 담겨 있던 일관된 줄거리들은 자취를 찾아볼 길이 없었다.

어쩌면 이렇듯 일관된 줄거리가 없는 것이 오히려 발레 본연의 모습일는지도 모른다. 극장이란 오직 ‘즐거움과 기분전환’만을 위한 것이라거나 ‘비극과 희극은 교훈적인 목적으로, 그리고 발레는 즐거움과 기분전환을 위해 창작된 것’이라는 말들이 보여주듯, 데카르트적 합리주의의 냉철함과 리슐리외에 의해 설립된 아카데미 프랑세즈의 엄격한 규제 하에서는 궁정 발레가 ‘운동’ 또는 왕의 ‘놀이’ 정도로 간주돼 진지한 연극적 요소가 배제되는 것이 당연한 것으로 여겨졌을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르네상스 인문주의에 뿌리박은 피렌체 카메라타의 변함없이 일관된 목표 따위는 발붙일 곳이 없었으리라.

프롱드의 난으로 마자랭은 궁정을 떠났고, 프랑스에 남아 있던 이태리 사람들은 투옥의 위협에 직면하게 됐으며, 특히 토렐리는 실제로 투옥되는 등 어려움마저 겪어야만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653년 2월 권력을 되찾자마자 마자랭은 다음 오페라 「펠레오와 테티의 결혼」 준비를 명해 1654년 4월 파리에서 무대에 올린다. 그러나 이렇듯 줄기찬 마자랭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이태리 오페라는 파리에 정착하지 못했으며, 한 오페라가 공연된 후에는 단원들이 모두 뿔뿔이 흩어져 이태리로 돌아가야만 했는데, 이는 무척이나 번거롭고 비용이 많이 드는 일이었다.

마자랭은 자신의 마지막 오페라를 위해 베네치아의 성공적인 오페라 작곡가 카발리를 파리로 초청한다. 이 오페라는 베스트팔렌 조약 후에도 십년 넘어 계속됐던 스페인과의 전쟁을 마무지 짓기 위한 1659년의 피레네 조약의 일부였던 루이 14세와 스페인의 공주 마리아 테레자와의 결혼 축하 공연으로 계획된 것이었다. 그러나 결혼 축하 공연을 위해 계획된 ‘기계 극장’과 오페라 작곡이 늦어지자 우선 카발리의 기존 오페라 「세르세」가 대신 무대에 올려졌으며, 원래 계획됐던 「사랑에 빠진 헤라클레스」는 마자랭이 죽은 다음 해인 1662년 2월에 가서야 비로소 처음 무대에 올려졌다.

결국 마자랭이 프랑스에 이태리 오페라의 뿌리를 내리도록 하려고 기울였던 모든 수고와 투자는 밑 빠진 독에 물 붓는 격이 되고 말았다. 그러나 루이 14세 치하에서 륄리에 의해 이룩된 프랑스 서정 비극의 확립은 마자랭의 시도라는 밑거름이 없었더라면 결코 이루어질 수 없는 일이었다. 이런 상황은 얼마 전 상연됐던 영화 「왕의 춤」에도 잘 드러나 있다.  17세기의 프랑스 궁정의 실상을 직접 경험할 길이 없는 우리의 눈에는 이 영화의 초두에 나오는 이태리 출신에 대한 프랑스 사람들의 증오감의 공공연한 표출도 흥미롭지만, 1653년 「밤의 발레」에서 태양왕으로 분장한 루이 14세 및 이를 지켜보는 황태후와 마자랭 추기경의 모습 또한 매우 인상적이다. 뒤이은 장면에서는 마자랭의 사후 재상 없는 친정을 선포하는 젊은 루이 14세의 모습이 이어지는데, 그 후 이어질 서정 비극의 확립 과정에 대해서는 다음 글에서 다루기로 하자. 그 전에 먼저 오페라가 전파된 또 하나의 주요 도시 비엔나에서 공연된 체스티의 「황금 사과」를 둘러싼 주변 상황들을 살펴보도록 하겠다.                                       

 / 한국교원대· 음악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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