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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박한 논의 전개 그러나 단편에 그친 결론과 전망
해박한 논의 전개 그러나 단편에 그친 결론과 전망
  • 교수신문
  • 승인 2008.03.17 1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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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깊이읽기 _ 『정보해석학의 전망』 윤병렬 지음 | 철학과현실사 | 2008

『정보해석학의 전망』은 지식정보사회에 대한 철학적 이해를 도모하는 몇 안 되는 국내연구서 가운데 하나로 손꼽을 수 있을 것이다. ‘구텐베르크-은하계’의 종말이라고까지 말해지듯이 사회구조와 매체문화 및 주체에 대한 인식이 지식정보사회의 도래와 함께 급격한 변화를 겪고 있는 가운데, 저자는 해석학이 이와 같은 변화와 흐름을 이해하는 중요한 틀이 될 수 있음을 역설한다. 해석학 개념의 시원인 고대 그리스어 ‘hermeneutike’가 “신의 뜻을 인간의 언어로 풀어내는 기술”이었다면, 오늘날에는 기호와 정보 및 매체에 대한 해석과 커뮤니케이션이 관건이기에 ‘정보해석학’으로 거듭나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인쇄 및 텍스트를 기준으로 하는 기존의 해석학에서 다양한 매체와 정보 및 하이퍼텍스트 등을 중심으로 하는 ‘정보해석학’으로의 지평 확대는 우리 시대의 학문적이고 사회적인 요청”임을 천명한다. 다시 말해, 포스트모더니즘으로 상징되듯 ‘의미 상실’과 ‘의미 파괴’, ‘의미 함열’ 및 ‘의미 죽음’의 시대를 맞아 오히려 상호주관성에 기초한 의미구성에 관여하는 고전적인 해석학적 방법론의 가치가 새롭게 되살아나며, 이를 통해 “정보사회와 인류의 미래가 유의미하다는 것을 밝히는 것이 이 책의 주된 목적”이라는 것이다. 여기서 저자의 주요 관심은 주체의 복권과 의미의 창조적 생산을 긍정하는 일이다.

저자는 미래 사회에 대한 토플러와 나이스비트 및 마이클 하임의 전망을 받아들이면서도, 과학주의의 맹점을 벗어나기 위해 호르크하이머와 아도르노, 하버마스로 이어지는 비판이론의 시각을 일별하며, 기술시대에 대한 현상학적 통찰과 경고를 재음미한다. 하이데거의 말처럼 과학기술문명은 ‘형이상학의 완성’이자 ‘존재망각’이란 ‘최고의 위험’이며 또한 그 속에 싹트는 ‘구원의 힘’이라는 것이다. 하이데거의 존재 사유가 ‘관계’ 및 ‘사귐’을 간과하고 있음을 지적하면서 이타주의의 관점에서 서구 이성철학을 비판한 레비나스의 논의를 만만치 않게 소개하면서도, 저자는 생활세계 속에서 현존재의 실존성을 비추고자 하는 후설의 논의를 새로운 지평으로 삼는다. 말하자면 “생활세계는 과학뿐 아니라 모든 학문들의 목적이고 귀착점”이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다.

저자는 하이데거 및 후설과 대치했던 레비나스를 여과하면서, 다른 한편으로 가다머와 데리다의 충돌 속에서 지적 광기를 완화시키려 한다. ‘차이’와 ‘다름’을 강조하면서 이성과 음성중심주의적인 ‘현전의 형이상학’을 비판하는 것이, 데리다처럼 ‘해체’를 ‘파괴’의 낭떠러지로 끌고 가서는 안 된다고 지적한다. ‘주체의 소멸’(푸코)과 ‘주체의 장례’(라캉)를 언급하는 것은 주체에 대한 또 다른 폭력이며 가학증세일 수 있다는 것이다. ‘가다머-데리다 논쟁’은 ‘지평융합’이 ‘동일화’인가 아닌가에 초점이 놓여있었지만, ‘이해’에 대한 다른 해석에도 불구하고 최소한의 소통적 가능성을 부인할 수는 없는 일이다. 아펠이 ‘담론윤리’를 말하고 칼빈 슈라그가 자아의 ‘담론적’, ‘행동적’, ‘공동체적’, ‘초월적’ 수준을 구별한 이유도 여기에 있었을 것이다. 비록 보드리야르가 ‘시뮬라크르 이론’과 ‘가상실재 이론’을 통해 ‘의미의 상실’과 ‘파괴’ 징후를 허무주의적으로 폭로하지만, 오히려 저자는 이런 논의들의 끝에 “주체의미의 복권과 의미구성(의미생산)”을 긍정하고자 한다.
슈라그의 지적처럼 근대의 호모 사피엔스적인 주체가 포스트모더니즘에 의해 ‘호모 시그니피컨트(기호적 인간)’로 대체 됐다면, 이제 ‘호모 나랜스(담론하는 인간)’가 나타나고 있다는 것이다. 창발적이고 신체적인 호모 나랜스는 행동과 체험으로 이어지는 의사소통을 통해 공동체적 주체가 되며 이를 통해 타자를 향한 ‘내재적인 초월’을 이룬다.

그런데 현대철학의 주요 쟁점들에 대한 이런 복잡한 가로 읽기와 환원의 끝에서 저자는 다소 엉뚱하게 목적론적인 “유용성” 개념을 통해 ‘의미 함열’을 극복하고자 한다. 아리스토텔레스의 ‘가능성(dynamis)’을 들면서, 정보와 주체의 만남에 의해 진술되고 해석되는 의미의 탄생을 ‘후설 현상학의 모델’을 좇아 이렇게 말한다. “미리 결론을 내리지만, 인터넷을 비롯한 의사소통의 공동체와 매체문화를 위해 후설의 상호주관적인 ‘모나드 공동체는 하나의 이정표가 되고 또한 이상적인 모델이 될 수 있다고 여겨진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책임 있는 주체들에 의한 이상적인 공동체를 표명하기 때문이고, 나아가 인격적인 교류를 위한 의미생산과 인격성숙을 지향하기 때문이다.”

도구적 이성에 대한 비판을 통해 마르크스와 루만을 넘어서고자 했던 하버마스의 논의를 굳이 들지 않는다 하더라도, 푸코가 니체의 계보학적 방법으로 미시 권력이론에 접근하고 들뢰즈가 스피노자나 홉스를 통해 욕망이론으로 나아갔던 이유도 ‘유용성’이나 ‘모나드’적인 단편적 세계관을 극복하기 위해서였다. 연쇄 고리를 이루는 다양한 기원들을 하나로 뭉뚱그려 재단하는 위험에 대한 지적이 온당하고 이것이 지식정보사회가 표출하는 천개의 고원들을 고루 둘러보기를 권하는 태도라면, 어쩐지 저자의 결론은 해박한 논의에도 불구하고 주체와 세계에 대한 구식 결혼식이 아닌가 하는 결여감을 느끼게 된다.

저자는 상호주관성과 의미구성의 측면에서는 후설과 하이데거의 현상학을 재해석하고 다르게 위치지우면서, 의미 상실 및 실재와 시뮬라크르의 문제를 천착한 보드리야르의 논의, 또한 정보사회와 매체문화를 연관 지워 분석한 마이클 하임과 아펠의 담론이론, 탈근대 이후 서사에서 주체 회복에 심혈을 기울인 칼빈 슈라그의 논의 등을 종합해 정보해석학의 지평으로 삼지만, 정작 지식정보사회는 아직 단편적으로 일각의 모습만이 진술되고 해석되고 있는 듯한 느낌이 아쉬움으로 남는다.

 

이상훈 / 대진대·철학

필자는 서울대에서 ‘역사에서 사회구조와 실천 문제’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사이버 생활양식에서 공공성 문제』 등의 저서와 『옥중수고1』, 『옥중수고2』 등의 역서가 있으며, 대동철학회 회장을 역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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