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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년이 마치 20년 같아 … 오스틴에서 평온한 휴식을”
“2년이 마치 20년 같아 … 오스틴에서 평온한 휴식을”
  • 박상주 기자
  • 승인 2008.03.17 10:4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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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故한경선 강의전담교수, 비극적 결말의 여정

지난달 27일 저녁, 미국 오스틴 데이인(Day Inn) 모텔. 16살 여자아이가 프론트 데스크로 황급히 전화를 걸었다. 아이는 떨리는 목소리로 ‘엄마가 죽어간다, 한국에 전화해 달라’고 말했다. 아이 방을 찾은 모텔직원은 침대에 쓰러져있는 한 여성을 발견해 911에 신고했다.

그녀는 인근 성 데이비스 병원으로 옮겨져 3시간 동안 치료를 받았다. 인공호흡과 고농도 약물 투여가 번갈아 이뤄졌다. 소생에 필요한 조치가 취해지자 그녀는 잠시 몇 분간 소생했다. 오전 10시 30분을 넘어서자 상황이 급격히 악화됐다. 다시 심폐소생술이 시작됐다. 그러나 11시, 그녀는 결국 숨을 거두고 말았다.

오스틴 경찰은 아이의 말을 통역해 줄 사람을 찾았다. 한국교포 간호사 최영미씨가 나섰다. 경찰은 아이와 최 씨를 데리고 엄마와 함께 묵었던 방을 찾았다. 일행은 테이블에서 서류 3장을 발견했다. 유서였다. 워드프로세서로 작성된 유서는 ‘25일, 한경선’이라는 자필서명으로 끝맺고 있었다. 26일 오스틴에 도착하기 전, 한 씨는 이미 유서를 지니고 있었다.

 

□ 지난 27일 미국 오스틴에서 사망한 故 한경선씨가 작성한 것으로 추정되는 유서.

한경선 씨(44세)는 1988년 ㅅ교대를 졸업, 서울 ㅁ초등학교에서 교편을 잡았다. 교편생활 중 시간을 내 대학원에 진학, 1996년 ㅅ대 영어교육과에서 석사학위를 받았다. 1998년 한 씨는 교편생활을 정리하고 미국 유학길을 떠났다. 텍사스 오스틴대 영어교육과 박사과정에 입학했다.
유학시절 한 씨는 주중에 한글학교 교사로 일해 생활비를 벌었다. 주말에는 장로교회에 나가 예배를 봤다. 한 씨는 교회 등록 카드에 자신을 ‘한국에서 온 교사 유학생’이라고 기록했다. 나머지 시간은 대학 도서관에 틀어박혀 학업에만 전념, 주변 한인들이나 유학생들과도 자주 만나지 않았다.

유학 중 남편과 이혼했다. 한 씨 전남편과 사건 직후 통화한 최 간호사는 “통화하는 가운데 전 남편 분이 ‘빚이 많다’는 느낌을 받았다. 경제적으로 가정을 책임질만한 가장은 아닌 것 같았다”고 조심스럽게 밝혔다. 외동딸은 초등학교를 다니는 동안 내내 유학 중인 한 씨와 떨어져 지냈다.
한 씨는 2001년 허드슨 재단 교육장학금과 텍사스 동문회 100주년 장학금을 받았다. 2002년 캘리포니아에서 개최된 CALICO(Computer assisted Language Instruction Consortium)에 나가 논문을 발표했다. 한 씨는 2003년 5월 테솔(TESOL)과정인 FLE(Foreign Language Education Program)로 박사학위를 땄다.

2004년 한 씨는 유학생활을 정리하고 한국으로 돌아왔다. 이듬해 자신의 모교인 ㅅ교대에 교원임용 원서를 냈다. 한 씨는 그 해 3월말 1차 심사에 대한 연락을 통보받았다. 그러나 임용일정은 계속 늦어지고 5월말 대학은 1차 심사와 다른 결과를 통보했다. 한 씨는 이를 “기이한 경험”이라고 생각했다.
한 씨는 강의를 찾아 다녔다. 강의전담교수 공고가 나 찾아보니 처우가 말이 아니었다. 교수도 아니고, 강사도 아니었다. 월급은 전임교수의 3분의 1수준이지만 외부 출강도 나가지 못하게 했다. 1년 단위 갱신, 3년까지 재계약할 수 있었다. 한 씨는 3년 안에는 다른 대학에 임용되리라 봤다. 한 씨는 ㄱ대학 지방분교 강의전담교수가 됐다.

2006년 2학기에 ㅈ대와 ㅇ대에 각각 교원임용 원서를 냈다. 그러나 한 씨는 두 대학으로부터 1차 서류전형 탈락 통보를 받았다. 한 씨는 연구나 강의 경력을 볼 때 납득하기 어려운 처사라고 생각했다. 한 씨는 서류전형 탈락이 ㄱ대, ㅎ대, ㅅ대 일부 교수들이 주도한 방해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한국 대학 임용이 힘들겠다는 생각이 든 한 씨는 미국으로 눈을 돌렸다. 그러나 주당 24시간을 강의하는 처지에 논문을 쓸 시간이 부족했다. 미국대학은 최근 연구실적을 요구했다. 미국에 가서 원서를 내고 한국으로 돌아와 강의하길 수차례. 그러나 연구실적 미비를 이유로 번번이 임용에 실패했다.

학과장이 재계약을 하자고 했다. 한 씨는 이전과 달라진 계약서를 받았다. 책임시수를 ‘주당 12시간에서 주당 12학점’으로 변경한 것이다. 한 씨가 담당하는 강의는 ‘실용영어’로 1학점 2시간 강의다. 계약서에 서명하면 1년간 강의는 할 수 있지만, 같은 강의시수를 채우고도 초과강의료는 받을 수 없게 된다.
지난해 파면당한 동료교수가 떠올랐다. 외부에 출강했다는 이유다. 한 달 월급을 받고 나면 다음 월급까지 빠듯한 생활이 이어진다. 한 씨도 외부 출강을 생각해 보지 않은 것은 아니다. 생활비와 파면규정이 양날의 칼처럼 한 씨를 조여 왔다. 그러나 자신도 파면을 당하면 당장 일가족의 기초적인 생활이 위협받는 상황이었다.

일흔셋 아버지는 동사무소 청소 일을 하며 생활보호대상자로 지낸다. 옥탑방에 지내는 어머니는 당뇨, 중풍, 골반뼈 골절을 겪고 있다. 옥상에서 내려오지 못한다. 엄마가 유학하느라 유년을 홀로 보낸 중학생 딸이 떠올랐다. 한 씨는 계약서에 서명했다. 1년만 더 견디자. 손바닥만한 학계다. 계약서 따지고 들면 전임이 될 기회마저 사라진다.

“강의전담교수를 하던 만 2년이 마치 20년같이 느껴졌다.” 한 씨가 남긴 말이다. “대학에서 행하는 모순과 불공정한 처사는 같이 일하던 동료교수의 파면을 통해 보다 분명하게 나타났다. 그의 파면을 정당화하기 위해 내세운 학교 측 주장들은 진실과는 거리가 멀어 보이고, 행정적, 법적절차를 위해 그들이 내세운 서류들과 주장들을 보고 전해 들으면서, 이 기관이 도대체 무엇을 하는 곳인가 하는 의문이 들었다. 그동안 겪은 이러한 부조리와 모순은 열심히 연구와 강의를 하리란 초기의 순수한 열정에서 이 사회에 대한 환멸과 더불어 애초의 희망과 비전을 접게 만들었다.”

한 씨는 2월 말 딸을 데리고 미국여행을 떠났다. 뉴욕을 돌아보고 오스틴으로 자리를 옮겼다. 한 씨는 “오스틴에서 공부할 때가 생각나. 오스틴은 인생에서 ‘고향’으로 느낄 정도로 그리워하던 곳”이라고 말했다. 27일 떠난다고 들은 딸은 “오늘이 미국에서 마지막 날이야?”라고 물었다. 한 씨는 딸을 보며 “우리는 오스틴에 쉬러왔어. 오늘이 마지막이니까 잘 지내자”고 말했다.
한 씨는 모텔 방에서 나와 후불인 모텔과 렌터카 비용을 모두 계산했다. 한 씨 일행의 비행기 티켓은 26일 LA발 비행기였다. 그러나 한 씨는 25일 밤 11시 오스틴에 도착했다. 이미 서울로 돌아가는 비행기에 몸을 싣지 않을 생각을 굳힌 것이다. 한 씨는 딸을 데리고 나가 새 옷과 가방, 운동화를 사줬다. 그리고 딸과 함께 텍사스 오스틴 대학을 둘러봤다.

사망 후, 최영미 간호사는 기자회견을 열었다. 최 씨는 기자들에게 유서를 읽어 내려갔다. “이 글을 받으실 때, 저는 이곳 오스틴에서 그토록 바라던 평온한 휴식을 비로소 얻게 되었으리라 생각됩니다. … 제가 삶을 마감하면서 이 글을 쓰는 것은, 더 이상은 이와 같은 비극이 일어나길 원하지 않기 때문이며, 또한 그럴듯한 구호나 정책만으로는 해결될 수 없는, 진정한 반성과 성찰 없이는 결코 극복할 수 없는 사항이라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 귀국 초에는 열심히 강의하고 논문 쓰면 학교에 자리를 잡을 수 있으리란 마음으로 하루를 쪼개어 고시원과 독서실을 전전하며 토요일이든 일요일이든 열심히 논문을 쓰며 보냈습니다. 하지만, 이곳에선 이러한 연구업적과 강의경력과는 다른 무언가가 이에 결정적 영향을 미치고 있음을 깨닫기 위해서 얼마간의 시간이 필요했습니다. 그것은 뜻 맞는(이해가 맞는) 몇몇 학교들끼리 연합해서 압력을 가하기 위해 한 특정인의 학교 임용을 가로막아, 그의 학문적 업적이나 발전을 저해함으로써 경쟁에서 도태돼 결국엔 그의 삶을 파탄에 이르게 하는 것입니다. 이는 부양가족을 지닌 경제적 뒷받침이 없는 상태에서 다년간 시간강사로 버티기는 불가능하고, 강의교수로 지내면서 임용에 필요한 정도의 논문을 쓰기는 사실상 거의 가능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시장의 규모가 비교적 적은 이곳에서 기업체의 불공정 담합처럼 몇몇 학교들의 이해 담합이 더욱 용이하게 이루어질 수 있었던 것이며, 이는 공정한 경쟁에 기초한 상생발전의 원리를 거스르는 것으로, 개인과 학교 그리고 나아가 국가와 학문의 발전을 저해할 수 있음이 분명할 것입니다. 2008년 2월 25일 텍사스 오스틴에서 한경선 드림.”

최 간호사는 한 씨의 딸을 한국에 있는 친척에게 보냈다. 비행기 표는 미국에 있는 한국 기업과 교회가, 병원비는 치료를 담당했던 병원에서 내줬다. 한 씨의 노부모는 화장한 유해만 한국으로 보내달라고 청했다. 가족들은 조용히 가족장으로 한 씨를 보내겠다고 밝혔다.      

     
 박상주 기자 sjpark@kyosu.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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