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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비평] 종말의 징후들
[문화비평] 종말의 징후들
  • 교수신문
  • 승인 2008.03.10 11: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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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정부가 출범한지 겨우 열흘 남짓 지났는데 벌써 오랜 세월이 흘러 이제 정권 말기쯤에 와 있는 것 같은 환각이 엄습하기도 한다. 긴박감 떨어지는 대선과정과, 대선 전후의 흉흉한 사건들, 특히 정치권의
낯 뜨거운 실태를 번번이 목격해온 덕분이리라.

새 정부 각료 여러 분들의 감탄스러운 치부 능력과 기상천외한 변명들, 또 그들을 ‘베스트 오브 베스트’라고 추켜 주며 능력있으면 모두 용서된다는 식으로 밀어붙일 줄 아는 여권의 무서운 추진력을 보면 눈앞에서 종말론적 아우라마저 아른거린다.
종말이라는 표현에는 일말의 과장이 섞여 있다. 하지만 종말은 그 시작 단계에서 이미 선명한 징후들을 드러내기도 한다. 그런 징후 두세 가지는 쉽게 짚어볼 수 있을 듯하다. 우선 도덕감각의 진행성마비 현상을 들 수 있다. 물론 갈등사회 속의 도덕원론은 결코 단순할 수 없다.

누구를 위한 누구의 도덕인지를 놓고 끝없는 논쟁을 벌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 우리사회를 괴롭히는 도덕문제는 아주 간단명료하면서도 강력하다.
대통령, 국무총리, 장관, 재벌총수 등 최고 권력층의 다채로운 편법, 비리, 부도덕을 생생히 확인한 국민들에게, 특히 어린 학생들에게, 공존공생을 위한 도덕의 가치를 납득시킬 수 없고, 그래서 능력껏 해먹으면 된다는 오기가 범사회적으로 확산되고 고착돼갈 위험이 그것이다. 공감과 납득에 앞서 법과 권력으로 질서를 만들려 하면 국민들은 냉소와 분노로 맞설 것이다. 그 최종 이미지를 미리 보고 싶다면, 사회적 맥락은 전혀 다르지만, 분노바이러스로 인해 인간이 인간을 물어뜯기에 이른 「28주후」의 끔찍한 상황을 떠올려도 좋을 것이다.

부도덕을 부도덕이라고 곧이곧대로 불러대는 풍토에서는 부도덕하게 쌓아온 부와 권력을 느긋이 누리기 어렵다. 그래서 부도덕한 권력이 부도덕을 미덕으로 둔갑시키려 거짓말을 애용하는 것은 흔하고 자연스러운 반응이다. 그러한 거짓말이 지속적으로 먹혀들어가 범사회적으로 이성적 판단력이 혼미해지는 현상은 종말로 향하는 징후로 손색없어 보인다. 물론 이성이라는 것 자체의 야만성을 돌아보고 그 이성이 누구의 이성인지 깊이 따져 들어가는 것은 인문학의 고전적인 과제이기도 하다. 허나 지금의 혼미상태는 비교적 빤한 방식으로 양산된다.

물가 잡겠다며 물가상승 부추기고, 경제 살린다며 복지 후퇴시키고, 환경보호 내세우며 운하는 누가 반대해도 파겠다 하고, 사교육비 줄이겠다며 자사고확대와 영어몰입교육에 몰입하고, 그리하여 말로는 ‘서민! 서민!’ 하며 부의 세습과 양극화를 당연시하는 보수정치권과 이들의 말을 믿기 좋게 편집해 배포해대는 보수언론 사이에서 서민들의 이성적 판단력이 정신없이 협공당하고 있는 것이다.

‘평화! 평화!’ 외치며 가차 없이 살인광선을 난사하는 「화성침공」의 화성인들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화성침공」은 종말론적이지 않다. 미국식 과학기술과 군사력 절대주의가 무참히 깨진 후, 엉뚱하게도 달콤한 음악이 흉칙한 화성인들을 몰살시키는 최고의 무기로 등장하며, 자연과 함께 하는 행복한 공존문화의 싹이 곳곳에서 피어나는 것으로 마무리된다.

현실에서 그런 꿈같은 음악을 기대하는 이는 별로 없을 것이다. 개개인의 인권을 위한, 생태계의 공존을 위한, 범인류적 가치의 좀 더 풍부한 공유를 위한 멀고도 험한 행로들을 통해 우리사회는 종말에서 조금 멀어질 수 있을 뿐이다. 그런데 이 행로의 길동무들끼리 서로 가슴에 대못을 박다 환멸과 무기력증에 휘말려 손 놓고 넋 놓고 앉아 있게 되면, 이런 모습이야말로 종말로 가는 가장 착실한 징후일 것 같다. 이명박 시대 이제 겨우 시작이며, 종말을 논하기에는 아직 현실이 너무 복잡다단하다. 종말에 대한 과민반응은 대개 종말을 피하려는 소망의 산물이기도 하다. 그래도 우리사회가 어디까지 갈 것인지, 또 갈 데까지 갔을 때 불의에 분노할 줄 알고 시시비비 가리는 일을 즐길 줄 아는 사회적 능력이 얼마나 남게 될지 은근히 기대된다.

 

홍승용 / 대구대·독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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