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PDATED. 2024-03-28 18:50 (목)
[반론] 문성원 교수의 서평(교수신문, 214호)에 대해
[반론] 문성원 교수의 서평(교수신문, 214호)에 대해
  • 김연숙 전주교대
  • 승인 2001.12.13 00:0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2001-12-13 10:33:58

김연숙 / 전주교대 강사·윤리학

철학은 비판으로 생명을 얻는다 했던가. 문성원 교수는 뜻밖의 중요하고도 재미있는 문제제기를 했다. ‘타자윤리학’이라는 명칭에 관한 것이다. 이 말은 사실 내가 만든 말은 아니다. 레비나스 2차 문헌에서 ‘타자윤리학’이란 말을 접했다. 레비나스의 특징을 드러내는 다른 명칭을 생각해 본다면, ‘평화의 윤리학’(‘전체성과 무한’), ‘감성의 윤리학’(‘존재와는 다르게 또는 본질을 넘어서’), ‘제일철학으로서의 윤리학’ 등이 적절하지 않을까 한다. 사실 ‘윤리’라는 말속에는 이미 주체와 타자라는 개념이 함축돼 있다고 볼 수 있기에, 타자라는 말은 의미적으로 중복되고 있다. 나로서는 윤리학에서 주체의 개념은 널리 인식돼 있다고 보았기에 그 동안 망각됐던 타자의 개념을 강조해 본 것이다. 이 기회에 밝혀둘 것은 단일성과 유일성을 가진 고유한 주체의 개념은 타자 못지 않게 중요하다는 것이다. 그 이유는 이 같은 주체야말로 역사 앞에서 그리고 타자 앞에서 사죄할 수 있으며 책임질 수 있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레비나스를 읽으면서 느낀 것은 독특한 글쓰기의 스타일을 보여준다는 점이다. 그의 글을 읽는 동안 끊임없이 나 자신을 되돌아보게 만들었고, 나의 존재가 빚어내는 의무의 태만을 질책했고 실천을 촉구했다. 이 같은 독특한 글쓰기의 효과가 예사롭게 보이지 않는 이유가 있다. 감성으로부터 이론과 실천을 끌어내겠다는 레비나스의 각오가 수행됨과 동시에 관념으로부터 실천으로 향한 새로운 윤리학의 지평을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또 다른 특징은 내가 알고 있는 것을 비워낼수록 그에게 수월하게 다가갈 수 있었다는 점이다. 그가 사용하는 개념들은 지속적으로 다른 차원의 개념으로 확대되고 심화되면서 드러난다. 특히 중요한 개념인 자아와 타자의 경우에 더욱 그렇다. 레비나스는 세계 안의 존재로서 자아가 몸을 가지고 있다는 것에 주목한다. 몸은 주변세계로부터 분리된 생명체로서 존재유지의 근원적 욕구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영양을 취함으로써 배고픔의 결핍감은 포만의 기쁨으로 전환될 수 있다. 이것으로부터 자아의 이기성과 향유의 양면성이 드러난다. 이것이 극대화돼 확장된 형태가 동일성, 일원론, 전체성, 전쟁, 제국주의 등으로 바로 레비나스가 서구철학의 문제점으로 지적한 것이다.

이 같은 제국주의적 이기주의에 제동을 거는 것이 있다. 바로 타자의 얼굴이다. 나를 향해 바라보고 있는 타자는 나에게 윤리적일 것을 호소하고 명령하고 있다. 그로부터 고개를 돌려버린다고 해결될 문제가 아니다. 그가 바로 나를 보면서 나를 지명하고 있기에. 그리고 나의 몸과 감성이 그에 맞닿아 있기에. 타자에게 사로잡힌다는 것은 귀찮고 부담스런 일이다. 하지만 향유의 기쁨을 뿌리치고 타자를 받아들이면서 나를 수축시켜갈수록 타자의 고통에 함께 아파하면 할수록 타자의 윤리적 호소에 귀 기울이면 기울일수록 나는 더욱 더 윤리적 주체로 돼간다.

타자를 통해서라는 것이 중요하다. 우리가 신을 만나는 것도, 그리고 신이 우리에게 다가오는 것도 타자를 통해서고, 우리가 윤리적으로 될 수 있는 것도 타자를 통해서고, 유한한 시간을 넘어 무한한 시간으로 갈 수 있는 것도 타자를 통해서다. 요컨대 나의 한계와 테두리를 깨뜨리면서 다가오는 자는 타자이며, 나로 하여금 무한에 맞닿게 하는 자도 타자이다.

문성원 교수는 적절하고도 새로운 과제를 주었다. 그것은 정의의 문제를 본격적으로 다루어 보도록 촉구한 것이다. 사실상 나의 저서 전체는 레비나스가 새로이 말하려는 정의의 문제를 함축하고 있다. ‘타자를 환대하는 정의’란 근본적으로 ‘타자의 고통에 대한 도덕적 책임’으로 나를 비우면서 타자를 위해 내 집의 문을 개방하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를 정면으로 다루는 것이 부담스런 점도 있다. 레비나스를 동양철학과 접목하는 용기를 낼 수 있었던 것은 동양철학에 이방인인 글쓴이를 환영하고 안내해 준 동양철학자들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마찬가지로 정의의 문제를 다루려면 자유주의적 정의론이나 공동체주의적 정의론과의 대화와 도움이 있을 때, 보다 구체적이고 생동하는 논의가 될 수 있을 것이라 생각된다.

모든 주제화와 축약은 항상 배제의 위험이 뒤따르기에, 나는 레비나스에 대한 보다 성숙한 이해를 통해서 드러날 수 있는 나의 이해의 좁음과 한계를 받아들일 준비가 돼 있다. 준엄한 타자로 졸저를 읽고 서평해주신 문성원 교수에게 진심으로 감사드린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