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PDATED. 2021-12-01 18:34 (수)
일제, 동화정책 일환으로 박물관 건립 적극 활용
일제, 동화정책 일환으로 박물관 건립 적극 활용
  • 강연희 기자
  • 승인 2001.12.13 00:0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2001-12-13 10:26:51
식민지 시대와 탈식민지 시대를 구분하는 기준은 무엇인가. 그 기준이 설득력 있을 정도로 식민지 경험에 대한 객관적인 평가가 이루어지고 있는가 반문해보면 각양각색의 답들이 나올 것이다. 이런 엇갈린 평가속에서 한국의 근현대 성격을 논한다는 것은 편협된 시각을 낳을 수 밖에 없다. 식민지 연구의 중요성은 한국 근현대사 성격 규정뿐만 아니라 앞으로 일본과의 관계를 능동적 방향으로 만들어가는데 있다.

위안부 문제, 징용군문제, 역사교과서문제 등 식민지 유산이 아직도 지속되고 있는 현실에서 식민연구에 대한 정당한 평가를 위해서는 동시대 우리의 경험과 비슷한 다른 나라의 사례를 통해 비교, 검토하는 작업이 진행돼야한다.

11월 30일 한림대학교 외국어교육원 소강당에는 한림대학교 아시아문화연구소의 학술연구발표가 있었다. 이날의 주제는 ‘일본의 동아시아 식민지지배’

국가간 식민지 경험의 다양화 비교

제국주의가 보편적 사회 현상이었던 19세기에서 20세기 동아시아의 여러 나라들은 일본으로부터 식민지지배를 경험하게 된다. 이 식민지들은 서로 다른 공간 속에 놓여 있지만 동일한 대상에 의해 피지배의 역사를 경험했다. 그렇다면 일본의 동아시아 식민지 지배의 성격을 同異로 묶어볼 수 있지 않을까.

이옥순 숭실대 강사(사학)는 ‘식민주의의 두 얼굴’이라는 발표문에서 영국과 일본의 식민국 정책과 통치방식을 두가지 측면에서 연구를 시도한다. 하나는 식민정책과 통치형태를 다룬 위로부터의 연구이고 다른 하나는 식민지인의 반응을 다룬 아래로부터의 연구이다.

영국과 일본의 식민주의 성격은 뚜렷한 대조를 보인다. 이옥순 강사는 “영국이 인도를 침략한 근본적 원인은 무역과 상업적 이익의 확대에 있다. 이에 비해 일본의 한국 침략은 동아시아에서 일본의 위상에 대한 전략적 고려가 주요 원인”이라고 지적했다. 영국은 경제적 동기로 출발했지만 일본은 정치적, 군사적 동기가 강해 영국보다 훨씬 억압적인 통치를 전개했다.

또 식민지를 획득한 과정을 살펴보면 인도에서 영국의 세력 확대는 점진적이고 한국에서 일본의 침투는 단기간에 진행됐다. 영국은 인도에서 이익이 축소되자 관심을 떼지만 일본은 만주사변 이후 한국을 전쟁 수행을 위한 인적, 물적 자원의 공급처로 성격을 규정한다. 그 결과 한국은 정치적으로 내선일체, 경제적으로 대동아 공영권이라는 미명하에 식민화가 심화된다.

한편 영국과 일본의 식민화는 지역적 거리라는 요인도 한 몫을 한다. “지리적으로 가까운 나라를 병합한 일본은 인종적 동일성과 문화적 유사성을 내세워 식민지와 식민국의 공동운명체를 강요하고 영국은 물리적 거리와 문화적 차이에 심리적 부담감을 가지게 되어 인도에 자치를 허용하는 다소 느슨한 방식을 취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일본의 통치가 억압적이고 가혹하다고 느끼는 반응도 같은 맥락에서 찾아볼 수 있다.

그렇다면 동아시아권내에 있는 대만의 경우는 어떠한가. 손준식 중앙대 교수(사학)는 우리보다 오랫동안 식민지 지배를 받았던 대만이 일본에 반감을 보이지 않고 오히려 일제시대에 향수를 갖는 점에 의문을 던지며 일본의 통치정책을 중심으로 논지를 펴나갔다.

손교수는 ‘일본의 대만식민지 지배’에서 일본의 대만 지배 정책을 세 단계로 구분한다. 무력 점령과 무방침주의 정책, 민족자결 사조와 내지연장주의 정책, 전시체제 하의 황민화 정책.
일본은 청일전쟁의 승리로 대만을 할양받지만 대만의 저항에 부딪혀 무방침주의를 표방한 식민통치 전략을 편다. 그러다 1차 세계대전 말부터 동화주의로 식민지 통치 방침을 바꾸고 내지연장주의를 시행한다. 그래서 대만인의 제한적 정치 참여와 관료 임용, 학제의 확립과 교육기회의 확충 등이 이루어졌다. 마지막으로 만주사변 이후 대만을 전쟁수행의 도구로 삼기 위해 각종 회유정책을 실시하나 일본인과의 차별은 끝내 없어지지 않았다.

손교수는 “청일전쟁의 희생양인 대만인의 대다수가 일본의 식민통치를 통해 서서히 중국인 의식을 상실했다. 그러나 끝내 이등일본인의 신분에서 벗어나지 못했고 조국인 중국으로부터도 환영받지 못한 신세가 됐다”며 해방 후 국민당 치하에서 대만인이 느낀 정체성 혼란의 원인을 설명했다.

식민주의와 정체성의 거리

박물관 건립을 통해 식민지 문화의 역사적 배경을 면밀히 짚어본 최석영 민속박물관 연구원의 ‘박물관 건립과 식민지문화의 표상’은 역시 흥미로운 논문이었다.

최석영 연구원은 부여사적현창회와 부여분관을 중심으로 식민지시기에 박물관이 어떤 역할을 수행했는지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박물관이라는 공간은 유물의 보존에 그치지 않고 전시내용의 고정성과 반복성으로 인해 臣民敎化의 기능을 한다. 일례로 1939년 말 당시 조선총독부 박물관장 사세 오야마는 학교교육에서 박물관 이용을 제시했는데 그 목적은 박물관이 일본의 聖戰에 기여하기 때문이었다”.

1930년대에 들어서서 부여는 내선일체의 영지로 주목을 받게된다. 이에 따라 부여에 부여신궁의 조영과 부여분관의 건립 움직임이 일어났다. 이 과정에 부여사적현창회의 기부행위가 있었다. 현창회 기부행위의 목적은 바로 백제시대의 내선일체를 선전하는 것. 이처럼 부여박물관의 문화정책은 철저한 일본의 동화정책의 일환으로 일관됐다.

최장희 아시아문화연구소장(한림대, 사학)는 “그동안 사학계의 연구는 독립운동을 위주로 한 연구가 많았다. 그러나 일본의 식민지 정책에 대해서는 연구가 적었다. 일본이 식민지에 대해 각기 다른 정책을 취했기 때문에 다각적인 측면에서 비교해볼 필요성이 제기됐다”며 이날 학술대회의 배경을 설명했다.강연희 기자 allesk@kyosu.net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