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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읽기 수월함 더할 것인가, 즐거움 해칠 것인가
고전읽기 수월함 더할 것인가, 즐거움 해칠 것인가
  • 김혜진 기자
  • 승인 2008.02.25 14:1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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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단_ ‘지만지 고전 천줄’ 시리즈 출간으로 촉발된 고전 발췌번역 논란

고전 발췌번역을 둘러싼 논란이 출판계와 연구자들 사이에 뜨겁다. 발췌와 해제라는 형식이 독자들을 고전으로 유인하기에 좋은 기회가 된다는 견해와 함께, 고전 본연의 가치를 훼손하고 고전읽기 문화를 저해할 수 있다는 반박이 대립각을 세우고 있다.

논란의 불쏘시개는 지만지출판사(대표 박영률)가 기획한 ‘지만지 고전 천줄’ 시리즈다. 짧게는 50년, 길게는 1천년이상 읽혀온 고전 3천 600종을 발췌 번역해 출판하는 메가톤급 기획이다. 지난달 1차분 30권의 출간을 마친 지만지출판사는 올해 600권, 이후 매년 1천권씩 2011년까지 완간을 계획하고 있다. 목록과 역자가 확정된 책은 1천700여종이다.

세계적인 기초지식을 전달하는 의미를 갖는 이 실험이 우려를 자아내는 것은 완역이 아니라 발췌 번역을 시도했기 때문이다. 시리즈의 이름대로 각 권은 고전의 핵심 부분을 1천줄 정도로 요약해 발췌했다. 원전의 부분 부분을 그대로 옮기는 형식으로, 해설을 위주로 요약하는 다이제스트판과 차별적인 형식이다. 원전이 짧은 경우는 완역을 했으며, 역자주석이나 해설을 덧붙였다.

발췌 번역, 고전읽기의 상승효과 낼까
발췌 형식으로 기획을 잡은 것은 “보다 ‘현실적’으로 고전을 만나게 하기 위해서”였다. 박영률 대표는 “생업이 별도로 있고, 언어적 장벽을 갖고 있는 일반인들이 하루 종일 앉아서 책을 읽을 수는 없다”고 기본적인 문제의식을 밝혔다. 720명에 달하는 연구자들이 이 기획에 참여한 것도 먼지 속에 쌓여가는 고전을 대중에게 다가가게 한다는 취지에 공감해서다.

1차분의 역자로 참여한 이현숙 고려대 강사(러시아문학)는 “『페테르부르크』는 문학작품으로서 충분히 중요한 가치가 있음에도 너무나 난해해서 독자들에게 큰 호응을 얻지 못했다. 발췌한다는 것이 예술품으로서 원전의 가치를 일정 정도 훼손하는 측면이 있긴하지만 보다 현실적으로 작품의 가치를 소개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라는 입장이다. 그동안 외면 받아온 학문분야의 조명을 기대하는 눈치다.

연구자들은 발췌라는 약점에도 불구하고 이번 기획이 갖는 기대효과가 적지 않다는 데 적잖이 공감하고 있다. 고전이 대중들에게 홀대받고 전공자들의 서고에만 쌓여가는 현실을 조금이나마 개선할 수 있으리란 기대다. 플라톤 전집을 번역하고 있는 정암학당 이정호 학당장(서양고대철학)은 “한국에서 원전에 대한 성실함은 현재로서 기대하기 어렵다. 독자들이 고전을 접하고 기본적인 착상이 생기면 그것에 따라 원본 텍스트에 뛰어들 수 있는 기회가 될 수 있다”고 말한다. 이현우 서울대 강사(러시아문학)는 “국내에 완전히 번역되는데 100년이 걸릴지도 모르는 책들이 있다. 철학서나 인문서에 한해 내용을 압축해서 소개할 수 있다”고 기획의 의미를 매겼다.

그러나 이번 기획이 본격적인 고전읽기의 전단계적 의미에 그쳐야 한다는 신중론을 펴는 연구자들도 있다. 고전읽기의 핵심은 중요한 부분을 뽑아 정보를 얻는 것이 아니라, 전체의 흐름과 논리의 결을 이해하는 것에 있기 때문이다. 황현산 고려대 교수(불문과)는 “발췌는 전체번역본이 있다는 것을 전제로 보조독서 재료로 이해해야 한다”고 지적한다. 이를 전제로 황 교수는 발췌 번역이 일정한 교양을 쌓은 사람들을 대상독자로 한다는 점에 주목한다. “햄릿에 대해 상당히 많은 이야기를 하면서도 실제로 읽지 않은 경우들이 있다. 특정한 경로를 통해 내용을 파악한 사람들을 대상으로 문학 작품의 중요한 부분들을 원문 그대로 읽게 해주는 것은 좋은 일이다”라는 것이 그의 진단이다.

또 루소의 『인간 불평등 기원론』 해제를 맡은 김석수 경북대 교수(철학)는 “바쁜 생활에 둘러싸인 일반인들에게 고전의 핵심 내용을 전달하는 것이 필요할 수는 있다. 그러나 고전은 흐름과 맥락을 이해하는 것에 궁극적인 의미가 있으며 가벼운 고전읽기의 일반화는 도리어 인문학 쇠퇴에 영향을 줄 수 있다”며 우려를 표한다. 고전에 접근할 수 있는‘폭의 확대’가 깊이와 성숙으로까지 확장돼야 한다는 당부다.

발췌본이 고전에 이르는 중간자적 역할을 수행할 수 있는가에 대한 회의적인 시각도 만만치 않다. 도정일 경희대 명예교수(영문학)는 발췌본과 같은 형태가 고전의 가치를 훼손할 뿐만 아니라, 오히려 고전읽기의 즐거움을 앗아갈 수 있다는 단호한 태도를 보인다. 그의 시각은 이렇다. “원래의 텍스트에서 일부를 그대로 발췌하는 것이든, 핵심 내용을 요약해서 쓰는 것이든 축약의 형태는 독자들에게 고전의 맛을 보았다는 만족감으로 그칠 수 있다. 아무리 축약을 잘해도 고전의 원래 가치는 훼손되게 마련이다. 고전읽기로의 진입을 가로막을 수 있다는 점에서 환영할 만한 일이 아니며, 소개되지 않은 고전들이 있을 때는 하나라도 원본 그대로 번역하는 것이 문화적으로 기여하는 것이다.”

“문학작품은 발췌의 대상 될 수 없어”
도 교수는 특히나 소설을 축약하는 것이 가능한 일이기나 하냐며 반감을 나타냈다. 이번 기획에 참여하고 발췌의 취지에 공감하는 연구자들조차도 소설, 희곡 등 문학작품의 발췌에 대해서는 회의적이다. 문학작품의 경우 전체 구조의 유기적 연결성이 상대적으로 더욱 중요하다는 측면에서 원전의 의미가 심각하게 훼손될 수 있다는 진단이다.

이득재 대구가톨릭대 교수(러시아문학)는 “대문호 발자크의 『그랑데』, 브레히트의 『서푼짜리 오페라』와 같은 작품들은 스토리와 구성이 주요한 의미를 갖는데, 발췌한다는 것은 원전의 취지를 충분히 왜곡할 수 있다”고 경계한다. 이현우 서울대 강사 역시 “시의 경우는 짧은 분량이기 때문에 천 줄로 완역이 가능하지만, 소설의 경우 발췌로 내용을 이해하는 것은 의미가 별로 없다”고 짚었다. 난해하고 두텁다고 하더라도 작품의 언어와 논리를 접하지 않고 알맹이만 보는 것은 의미를 가질 수 없다는 견해다.

원전번역과 다른 창작물로 볼 수 있나
이번 기획물을 둘러싼 또 다른 쟁점은 과연 발췌 번역본을 원전번역본과 판이한 창작물로 볼 수 있느냐 하는 문제다. 이는 원전을 이미 번역해 출간한 출판사의 권리와 긴밀히 연관된다는 점에서 출판계의 강한 불만을 사고 있다.
이는 퍼블릭 도메인을 갖는 저작과 여전히 저작권을 가지고 있는 그것과 구별되는데, 더욱 문제시 되는 것은 전자의 경우다. 후자의 경우는 저작권이라는 법률적 권리를 획득해야만 출판이 가능하지만, 전자의 경우는 그렇지 않기 때문이다.

법률적으로 출판에 관한 권리는 원저작의 권리인 저작권과 편집을 진행한 출판사의 출판권이 있다. 출판권의 경우 저작권위원회에 ‘출판권 설정 계약서’ 등록제도가 있지만 유명무실하다는 것이 출판사들의 목소리다. 출판권은 출판계에서 5년간 상호 인정해 주는 것이 관례다. 이미 저자 혹은 역자와 서면 계약이 이뤄진 상황에서, 굳이 저자 혹은 역자의 인감도장과 등록세 3만원을 요구하는 절차를 밟을 필요를 느끼지 않았던 것이다.

문제는 이것이 관행으로만 존재할 뿐 법률적 효력이 없다는 데 있다. 법률적 분쟁으로 번질 경우 해당 출판사는 이중계약 혹은 유사출판물과 관련해 번역자와 싸움을 이어갈 수밖에 없다. 그러나 인세나 판매에 관한 충분한 보상이 이뤄질 수 없는 한국의 학술 출판 현실에서 저자나 역자와 척을 진다는 것은 자충수에 불과할 뿐이다. 사정이 이렇다보니 관련 출판사들은 뾰족한 대응책을 찾지 못하고 있다. 지만지측의 이번 거대 출판기획에 도의적 책임만을 따질 수밖에 없는 출판현실에 이들의 곤혹감이 비쳐진다.

1차분에 들어간 저작의 원전을 펴낸 한 출판사의 편집인은 “제목도 같고 저자도 같다보니 판매량 등에서 불리한 위치에 서게 된다. 그동안 책의 가치와 존재를 알리기 위해 신문사나 방송국에 보도 자료 보내고, 언론 인터뷰를 성사시키고, 비용을 들여 광고도 내보내며 할 도리를 다했는데 싼 가격의 책이 나온다고 하면 독자들 입장에서 그것을 선택하지 않겠냐”고 토로한다.

한기호 출판마케팅연구소 소장은 ‘발췌번역출판 우려스럽다’라는 제목의 한 일간지 칼럼에서  지만지측의 이번 기획이 ‘출판권 침해’이자, ‘무임승차’ 행위라고 강하게 비판하기도 했다. 저작권이 소멸됐다고는 하지만 이미 원전의 가치를 알리는 홍보를 진행하고 기본적인 골격을 다져 놓은 상황에서 같은 제목, 같은 역자의 책을 출간한다는 것은 기존 출판사의 권리를 침해한다는 주장이다. 익명을 요구한 한 출판 관계자 역시 “이미 번역된 원전을 발췌한다는 것은 떼다 쓰기에 불과할 뿐”이라며, “번역을 위해 기존의 역자와 출판사가 들인 노력을 힘들이지 않고 거저 가져다 쓰는 행위”라고 질타했다.

지만지측이 대규모상륙작전처럼 펼친 이번 기획은 원전 번역 발췌의 정당성 시비와 함께 고전-대중의 만남이라는 효율성의 측면에서 적잖은 논쟁을 예상케 한다. 고전 발췌 편역이 과연 새로운 지적 시도로 평가될 지, 고전-대중의 만남이라는 슬로건 자체를 상품화한 마케팅으로 그칠 지 더 지켜봐야 하겠지만, 이 모든 논란의 핵심에 더 이상 고전을  가까이 하지 않는, 책 읽지 않는 한국사회의 얄팍함이 놓여 있다는 사실만큼은  변명할 수 없을 듯하다.

  김혜진 기자 khj@kyosu.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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