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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적 빈곤’에 빠진 학생 구해내기
‘정신적 빈곤’에 빠진 학생 구해내기
  • 조벽/ 동국대 석좌교수
  • 승인 2008.02.25 13: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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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학기 새로운 만남, 강의]새학기의 단상

새 학기가 곧 시작됩니다. 늦추위 때문에 봄꽃은 일주일이나 늦어졌지만 학생들은 약속된 날에 캠퍼스를 찾아올 것입니다. 그러니 정원 미달이란 말이 흔히 들리는 요즘 세상에 얼마나 다행입니까. 이 고마운 이들을 위해 우리 교수들이 해줘야 할 일이 무엇인가 생각하게 되는 때입니다.

새 과목의 강의록을 준비하고 전에 사용했던 강의록은 다시 다듬어 봅니다. 하지만 학생들이 우리로부터 바라는 게 강의 내용일 것 같지 않습니다. 강의 내용이야 교과서에서 대충 다 볼 수 있을 테니까요. 학생들은 교수님이 대학교나 대학원 다닐 때 배웠던 내용을 수업시간에 학생들에게 조금씩 떼어주는 ‘지식중간도매상’이길 원하지 않을 것 입니다. 특히 요즘엔 우리가 알고 있는 정보와 지식보다 훨씬 더 유용하고 상세한 최신 정보를 학생들 맘껏 스스로 접할 수 있는 세상이 아니던가요. 그럼 우리가 학생들에게 무엇을 줄 수 있을까요.

신입생들은 혹시 우리들로부터 신선함을 찾고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고3때까지의 공부는 어렵고, 재미없고, 지겹기 짝이 없던 것이었습니다. 공부라고하면 목에 신물이 올라와 저만치 도망치고 싶었던 그들은 공부와는 평생 담을 쌓은 듯 보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래도 이제 대학에 왔으니 뭔가 색다를 거란 기대가 학생들의 맘 한구석에 조금 남아 있을 것입니다. 이 가물가물한 기대의 불씨가 새 학기 첫 날 꺼져버리지 않도록 첫 강의는 꿈틀거리는 낙지회처럼 신선해야 하겠습니다. 교수님의 첫 강의에 학생들이 “바로 이게 공부라는 거구나!”하며 교육에 대한 한낱 희망을 느낄 수 있도록 해줘야 하겠습니다.

사실 우리 학생들은 초중고 12년 내내 기껏해야 30cm 앞 책만 보고 한 주 앞 시험만을 내다보고 살아온 학생들입니다. 이들이 이대로 대학을 졸업하면 거시적인 안목과 장기적 시각을 지닌 글로벌인재가 되지 못할 것입니다. 평생교육시대의 인재는 스스로 배움을 추구하는 사람입니다. 평생교육은 공부를 억지로 해서 되는 것이 아니라, 공부가 즐거웠던 기억을 지닌 사람이 추구할 수 있는 것입니다. 따분하고 하기 싫은 공부를 고3때까지는 억지로 할 수 있어도 평생 동안 할 수는 없습니다. 공부가 즐거웠던 경험이 있어야 평생 학습할 수 있는 저력이 생깁니다. 그래서 정보홍수시대의 최고의 교수법은 공부에 희열을 느끼는 기회를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한 시간 강의가 어느새 다 끝났는지 모를 몰입의 경지를 맛보게 해 주어야 합니다. 수업이 끝나고 강의실을 나가면서 서로 “오늘 이 수업 엄청 재밌다!”라는 감탄사가 학생들 입에서 저절로 새어나도록 말입니다. 새 학기에는 수업 준비에 사용하는 시간의 절반 정도는 학생들의 학습동기를 유발하는 데 투자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보다 더 시급한 것이 하나 있습니다. 우리는 학생들에게 영양제 주사를 놓아주어야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제 눈에 비친 한국대학생들 상당수는 영양실조에 걸려 있어 보이기 때문입니다. 애초에 맘에 안 드는 대학에 입학하고, 자신의 적성이나 자질과 상관없는 학과에 들어와서 대학 4년을 어영부영 보내는 듯합니다. 자신의 꿈을 이루기 위해 지옥의 문전까지 갈 기세로 학업에 매달리는 대학생들이 별로 보이지 않습니다. 따분해하고 시큰둥하고 자신 없어하는 모습이 여기저기 보입니다. 정신적 영양실조가 심각한 수준입니다.

우수한 학생들일수록 그런 것 같습니다. 한국의 우수한 학생들이 죄다 공무원이나 의사되고 싶어 한다지요. 그러나 ‘청소년’들이 ‘공무원’이란 꿈을 스스로 꾸지 않았고 분명 주변의 어른이 그리 유도했을 것입니다. 따라서 저는 한국 교육의 가장 큰 문제는 주입식 교육이 아니고 청소년의 꿈마저도 주입되고 있다는 점을 꼽습니다. 하고 싶은 것을 추구하다가는 자칫 잘 못하면 굶어죽던 물질적 빈곤 시대를 보낸 어른들이 자녀의 젊은 패기와 용기와 도전의식이 피어나기도 전에 안정적 밥벌이나 강요하고 있지나 않은지요. 하지만 요즘은 하고 싶은 일을 하지 못하면 죽는 정신적 빈곤 시대이지 않습니까. 누군가 학생들을 정신적 영양실조로부터 구해주어야 하겠습니다.

신입생들은 잡다하게 많이 알되 진정 자신에 대해서는 무지한 것 같습니다. 자신들이 무엇을 좋아하고 무엇을 잘하고 무엇이 되고 싶은지 모르고 있습니다. 그들은 판타지는 있되 꿈은 없어 보입니다. 판타지는 머리 안에 그려보는 환상이라면 꿈은 마음으로 그려내는 자신의 미래 모습입니다. 꿈을 지닌다는 것은 결국 자신의 삶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입니다. 의미 없는 삶은 가치가 없는 삶입니다. 자신의 삶에 의미가 있을 때 생기가 돌 것이며, 자신이 선택한 길이 아무리 어렵고 힘들고 평탄하지 않아도 행복감을 느낄 것입니다. 대학 생활이 자신의 꿈과 연결될 때 학생들은 비로소 성숙한 대학생이 되는 것입니다.

한국에서 따지는 내신, 수능, 논술 점수는 결국 학생들이 초중고 다니면서 학교와 학원에서 얼마나 영향을 잘 받았나를 따지는 것이라면 세계 명문대에서는 그 반대입니다. 지망생이 중고등학교를 다니면서 학교와 주변에 어떤 유익하고 선한 영향을 미쳤는가를 따집니다. 대학에 입학하면 우리 대학에 어떤 영향을 얼마나 미칠 것인가를 고려해봅니다. 그리해서 지망생이 우리 대학을 졸업하면 사회와 인류에 어떤 영향을 얼만큼 미칠 것인가를 예측해봅니다. 즉, 한국에서는 교육 받고, 지도 받고, 레슨 받고, 꿈마저 주입 받은 학생들을 선발한다고 치면 세계적 명문대는 기여하는 사람, 베푸는 사람, 리더십을 지닌 사람, 꿈이 있는 사람을 선발하는 것입니다. 점수를 따지는 것이 과거지향적인 반면 꿈을 따지는 것은 미래지향적입니다. 우리는 신입생 선발부터 단추를 잘 못 끼우고 있는 셈입니다.  

그러면 우리 교수들이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다양한 경험의 장을 마련해주어 학생들이 꿈과 접촉할 기회를 만들어 주면 좋겠습니다. 일주일에 단 한번씩 만이라도 학생들이 배움의 기쁨을 만끽할 수 있게끔 해주면 좋겠습니다. 일주일에 단 한명씩 만이라도 정신적 빈곤에서 해방시켜 줄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조벽/ 동국대 석좌교수


 

필자는 노스웨스턴 대학에서 박사 학위를 마치고 1988년부터 미시간 공대 기계공학과 교수로 재직했다. 미국 공학교육학회 교육자상과 미시간 공대 최우수 교수상 등을 수상한 바 있으며 현재는 국내에서 교수법 강의와 자문활동을 펼치면서 왕성한 활동을 하고 있다. 주요 저서로는 『조벽 교수의 명강의 노하우 & 노와이』, 『새시대 교수법』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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