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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마음의 묏부리로 솟아 계시는 그 분
내 마음의 묏부리로 솟아 계시는 그 분
  • 교수신문
  • 승인 2008.02.25 13: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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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학기 새로운 만남, 강의]잊을 수 없는 강의

학자로서 교수들에게 강의는, 혹은 그런 강의와 함께 오래 기억에 남는 ‘스승’의 흔적은, 강렬하기 마련이다. 정년을 하고 여러 곳에서 후학을 양성하고 있는 김열규 전 인제대 명예교수(민속학)와 원숙한 활동을 펼치고 있는 김영한 서강대 교수(사학), 그리고 소장과 중진의 가운데에 서 있는 양승렬 고려대 교수(물리학)에게 잊을 수 없는 강의’와 관련된 이야기를 들어보았다. 엄격한 스승, 학문의 진로를 결정하게끔 이끈 벼락같은 강의,석학들의 지적 훈련, 이 모든 것의 공통 키워드는‘열정’이 아닐까.

 내 마음의 묏부리로 솟아 계시는 그 분

“이것 어젯밤에 내가 쓴 원고라고! 보라우!”
우리에게 대학노트가 던져졌다. 교수님은 교단에서 앞으로 나오셔서 학생들과 나란히 앉으셨다. 기다랗고 좁아터진 널빤지 의자에 허리 내리시고는 책상이라고는 말뿐인 뒤편의 판자대기에 등을 기대시고는 잠시 밭은 숨을 가라앉히시는 것이었다.

강의실이래야 천막으로 지붕을 얹은, 된바람 불면 날아갈 것 같은 판잣집이었다. 저 처참한 민족의 비극, 6·25전쟁 탓에 부산으로 쫓겨 온, ‘피난 대학’에서 心岳 이숭녕 선생께서는 가을 학기의 첫 시간을 이렇게 시작하셨다. 서울대 문리과대학 국어국문학과의 전공과목인 음운론 강의였다.
한참 만에 숨을 고르시고는 흑판 앞으로 가셨다. 교단이 있을 턱이 없었다. 흙바닥에 놓인 교탁에 노트를 펴시면서 던지시던 그 말씀.
“자, 시작하자우!”

그때 일학년이던 우리는 기가 죽었다. ‘연만하신데도 지난밤에 저만큼 원고를 쓰셨는데 우린 뭘 했지?’ 모두 해야 다섯이던 우리들은 말은 아니 해도 마음으로는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우리는 부끄러웠다. 선생님을 바로 쳐다보지 못했다. ‘우리는 어젯밤 뭘 했지?’  
그러면서 나는 많은 생각에 사로잡혔다. 피난살이라 남의 집 셋방살이를 하고 계실 텐데! 천리를 넘게 전쟁을 피해 오시는 길이라 책도 못 가지고 오셨을 건데! 그런데도 밤 잠 덜 주무시고는 논문 쓰셨다니! 선생님 학문에는 전쟁도 없었다. ‘학문은 그래야 한다는 것을 친히 일러주시는구나!’ 문득 이 생각이 들자 나는 가까스로 고개를 들었다. 

師道라는 것, 스승이라는 것! 그게 얼마나 嚴酷한가를 몸소 보여주고 계신 분! 더불어서 학문한다는 것이, 배움의 길이란 것이 얼마나 무서운가를 친히 일러주고 계신분! 심악 선생께서는 호가 의미하는 그대로 우리들 마음의 묏부리로 자리하고 계셨다. 그러면서 명강의는 일차적으로 강의를 대하는 자세에서 비롯한다는 것을 뼈저리게 일깨워주셨다.

강의 내용도 그랬다. 1950년 지금부터 58년 전에 이미 선생께서는 소쉬르의 언어학에, 그리고 러시아의 소장 문법학파의 이론에 우리를 인도해주셨다. 이건 그 당시 국내 학계의 일반적인 동향으로는 난감한 일이었다. 초시대적인 先驅였다. 영어와 불어, 독일어의 원전들을 인용하시면서 20세기 초와 중엽 서구의 선진이론을 자상하게 소개해주셨다. 그리하여 20세기 후반기의 인문학의 꽃이 된, 구조주의와 기호학을 향한 길목에 우리로 하여금 들어서게 하는 길라잡이 구실을 맡아내셨다. 지금도 그것은 나의 학문을 위한 도표요, 이정표다.

그래서 선생님의 강의는 크게는 학문이, 작게는 전공과목이 장차 나아가야 할 지표를 미리 짚어서 보여주신다는 뜻으로 명강의였다. 능변이나 말 잘하는 것이 명강의는 아닐 테니 말이다. 
전쟁이 끝나고 대학이 서울로 돌아간 다음에는 이따금씩 우리를 댁으로 부르셨다. 그 당시 내 둘레에는 모두가 어학 전공이었고, 문학 전공은 나와 동기생 하나 해서 단 둘뿐이었다. 그게 애처로우셨는지 비교적 자주 나를 부르셨다. 그리곤 나의 기를 돋우시는 결에 읽다가 두신 책을 던져 주셨다. “이건 가져다 읽지” 칼 포슬러의 『문명 속의 언어의 정신』이란 영어 번역본이었다. 그걸로 나는 필로로지와 문체론에 생전 처음으로 비로소 이론적으로 입문할 수 있었다.

이렇게 친히 부르시고 격려하시면서 당신 전공과는 비교적 거리가 멀면서 나와는 밀접해야 할 문헌을 주신 것! 그것은 손수 나의 손을 이끌어서 인도하신 것이나 다를 것 없었다. 학생을 대하시는 태도며 마음 씀씀이가 또 다른 명강의였다. 선생님 서재도 나의 또 다른 강의실이었다. 뿐만 아니다. 선생님만 곁에 모시고 있으면 어디나 무슨 공간이나 다 강의실이었다.   
그것은 오늘날에도 나를 포함한 모든 교수들의 지침이라야 할 것이라고 믿고 있다. 학생으로 하여금 제가 도맡아야 할 과업 앞에 바로 서게 하는 것, 그 과업을 교수와 학생 사이에서 인간 대 인간의 촉감으로 일깨우는 것, 그것을 명강의의 절대 조건이라고 다함께 다짐 두고 싶다.    

필자는 서울대에서 학위를 마친 후 서강대와 인제대에서 오랜 기간 강의했다. 정년이 지나 현재는 서강대 명예교수로 있으며, 『기호로 읽는 한국 문화』를 집필 중이다.


학문의 진로를 뒤바꾼 ‘르네상스 특강’

1962년 필자가 서울대 사학과에 입학했을 때, 전임교수는 다섯 분이었다. 서양사 전공자는 민석홍 교수 한 분뿐이었다. 1963년 하버드대 옌칭연구소의 초청으로 민 교수님마저 출국하는 바람에 서양사강의는 모두 외래강사가 맡았다. 민 교수를 대신해 출강한 분이 서강대의 차하순 교수이다. 그가 맡은 강의명은 ‘르네상스 특강’이었다.

나는 한국사나 동양사보다 서양사에 더 관심을 가졌다. 따라서 개설된 서양사 과목은 거의 다 수강신청을 했으므로 ‘르네상스 특강’도 예외가 아니었다. 무심코 신청한 이 과목이 나의 진로를 결정하는 중요한 계기가 될 줄은 나 자신도 몰랐다.

르네상스는 근대의 시작인가, 중세의 연장인가, 중세도 근대도 아닌 과도기인가 하는 시대구분 논쟁은 역사공부를 시작하려는 초보자들에게 지적 자극이 됐고 ‘예술품으로서의 국가’,  ‘인간과 세계의 발견’, ‘개인의 발전’ 같은 부르크하르트의 테제는 젊은 학도들에게 신선한 충격을 줬다. 해스킨즈의 ‘12세기 르네상스’, 호이징하의 ‘중세의 가을’, 바론의 ‘시민적 휴머니즘’같은 대가들의 독창적 학설들은 지적 호기심을 자아내기에 족했다. 따라서 나는 르네상스 시대만 연구하면 역사의 모든 문제가 다 풀릴 것 같은 생각을 했고 그 당시 학계의 논란이 됐던 근대화 문제와 시대구분론의 해답도 르네상스 속에 들어 있다고 믿었다.

차하순 교수의 강의를 통해 르네상스 시대에 매료된 나는 일찍이 이 시대를 공부하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학부 졸업논문으로 ‘르네상스 휴머니즘 연구’를 썼고 석사학위 논문으로는 ‘페트라르카의 지적 이원성’을 제출했다. 공식적인 지도교수는 민석홍 교수였지만 실질적으로는 차하순 교수의 개인적 지도를 많이 받았다.
필자는 1975년에 전임교수가 됐는데 이 해에 구제박사제도가 폐지되고 신제박사제도가 도입됐다. 차하순 교수 밑에서 본격적으로 공부를 하겠다는 마음에서 서강대 대학원 박사과정에 입학했다. 통념상 인문학 연구는 스스로 알아서 하는 것으로 돼 있다. 그러나 미국에서 학위를 받은 차 교수는 학위논문에 관한 한 이 통념에 반대했다. 그에 의하면 학위논문은 학생과 지도교수의 합작품이라는 것이다. 그는 논문지도학생에게 반드시 일정한 서식에 의한 논문계획서를 제출케 한다. 계획서에는 논문제목, 주요논점, 연구개황, 내용목차, 결론, 참고문헌, 집필예상분량 등이 기록돼야 한다. 작성된 계획서를 토대로 학생과 지도교수가 수시로 만나 계획을 검토 수정한 후 마침내 완성됐다고 인정되면 비로소 논문 집필을 허락한다. 이 과정을 거치는 동안 논문의 내용과 구성이 바뀌어 공동작품이 될 수밖에 없다.

차 교수가 논문지도에서 중시하는 또 하나는 연구의 창의성이다. 가장 바람직한 것은 새로운 자료발굴에 의한 독창적 연구와 해석이다. 그러나 한국 실정에서 그것은 거의 불가능하므로 차선으로 중요한 것이 새로운 문제의식과 참신한 아이디어의 창출이다. 참신한 아이디어를 구하기 위해서는 최근의 연구동향에 밝아야 한다. 그래야 자기가 선정한 주제가 이미 연구된 것인지 아닌지, 또는 시의에 적절한 것인지를 판단할 수 있다. 필자의 박사학위 논문인 ‘르네상스의 유토피아 사상’은 1980년대 초에 출판됐는데 서양의 대표적인 유토피아 연구서들도 이때를 전후로 간행됐음을 고려한다면 연구주제의 시의성은 인정받은 셈이다. 용장 밑에 약졸 없다는 말이 있듯이 엄격한 스승 밑에서 우수한 제자들이 배출되게 마련이다. 오늘날 한국서양사학계에서 지성사와 문화사 분야에서 활약하는 중견학자들 중 상당수가 그의 제자라는 사실이 이를 잘 뒷받침해주고 있다.

강의는 지식의 전달로 그 사명을 다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학생들의 문제의식을 고취하고 끊임없는 동기유발을 제공해야 한다. 강의는 글쓰기와 다르다. 강의는 혼자의 노력으로 되는 것이 아니다. 수강자의 동참이 있어야 만족을 얻는다. 그것은 사람과 사람, 인격과 인격이 서로 만나 대화하고 토론하는 자리이다. 효과적인 강의법은 하나가 아니라 다양하다. 따라서 새로운 방법을 계속 개발해야 하지만 그렇다고 전통적 방법이라 하여 무조건 고루하고 나쁜 것은 아니다. 오히려 인문학 강의에는 전통적 방법이 장점이 될 수 있다.
이상적 강의는 학문성과 인간성을 조화시키는 것이다. 그러나 실용과 효용만을 중시하고 교육의 중심이 공급자에서 수요자로 전환돼 학생을 고객으로 모시게 되면서부터 강의의 학문적 엄격성이 느슨해지는 느낌이다. 고객에게 친절히 봉사하고 인간적으로 대해 준다는 명분 아래 만에 하나 고객의 눈치를 보는 일이 있다면 그것은 결코 바람직한 강의라고 할 수 없을 것이다.

필자는 서강대에서 ‘르네상스의 유토피아사상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저서로는 『르네상스의 유토피아 사상』, 『과학시대의 인문학』 등 다수가 있다.


 

‘석학’이 보여준 두 가지 지적유희 게임

대학원 교육은 형식적인 강의보다는 주로 학생과 교수의 만남으로 이루어진다. 어떻게 하면 학생들에게 정확한 사고력과 풍부한 창의성을 계발해줄 수 있을까. 이는 아마도 많은 교수들의 공통된 고민일지도 모른다. 노벨물리학상을 받은 파인만은 우수한 과학자들의 사고방법이 일반인의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고 말했다. 그는 일반인과 과학자 모두 상상력을 발휘하지만 가장 큰 차이점은 그 강도와 기간에 있다고 했다. 바디 빌더의 근육은 극한상황까지 부하를 받아야 더 자란다고 한다. 그래서 바디빌더는 남들이 탄복할 만한 복근을 만들기 위해 장기간 집중적으로 운동을 한다. 물론 일반인도 일상생활에서 복근을 사용하기는 하지만 바디빌더처럼 이를 혹사시키지는 않는다. 그렇다면 인간의 사고능력도 이렇게 극한 상황까지 스트레스를 줘야 발달되는 것일까.

우리는 일반인이 한 가지에 미친 듯이 몰두하면 그를 괴짜라고 부른다. 하지만 위대한 과학자에게 있어서 이런 집착은 필수적인 것이라 할 수 있다. 과학자는 한 주제에 몇 년 또는 몇 십 년 동안 몰두해 연구하는 경우가 많다. 그렇다면 학생의 사고능력을 향상시키기 위한, 이런 비정상적인 몰두와 끈기 그리고 집착을 계발할 수 있는 방법에는 어떤 것들이 있을까. 내가 만나본 이론물리학 석학들은 극한적인 학생지도 방법, 또는 지적 유희 게임을 자주 이용하는데, 이 방법들은 크게 두 부류로 나눠진다.

석학 A는 학생에게 일주일에 최소한 70시간은 공부해야 한다고 자주 강조한다. 매주 한 번씩 정해진 시간에 학생을 만나 지난 일주일간 진척된 학생의 연구내용을 보고 받는다. 학생은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고 자신의 사고력과 상상력을 발휘하여 교수가 비판할 수 있는 모든 점들을 미리 예측하고 반론을 준비해야 된다. 교수는 혼신의 힘을 다해 학생이 발표한 내용에서 수정 또는 보완돼야 할 점들을 찾는다. 만약 교수가 이기면 학생은 창피를 당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 더욱 무서운 것은 교수의 노여움을 산다는 사실이다. 반면 학생이 완벽하게 발표한다 해도 학생에게 내려지는 상이라곤 단지 노여움을 피했다는 안도감뿐이다. 그러면 노여움이 어느 정도면 학생이 극한상황에 몰리게 되는 것일까. 아마 노여움의 소리가 옆방 사람이 들을 수 있을 정도가 아닐까. 이를 수년간 실행하면 교수의 노여움이 분출되는 횟수는 현저하게 줄어든다. 이런 지적유희 게임들이 성공하려면 교수에게는 분노의 수위를 조절할 수 있는 자제력이 있어야 하며, 이런 능력이 있어도 수년 동안 홧병을 이겨낼 수 있는 건강이 없다면 이 방법은 소용이 없을 것이다.

석학 B는 학생에게 이슈가 되는 문제를 설명하고 스스로 해결방법을 찾게 한다. 이는 어린아이를 물에 빠트려 수영하는 방법을 터득하게 하는 것과 유사하다. 학생은 몇 달에 한번 정도 교수를 만나 진행상황을 보고하고 약간의 격려의 말을 듣고 다시 혼자 연구를 진행해야 한다. 때론 자신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학회에서 만난 다른 학자들에게 애처롭게 도움을 요청하기도 한다. 시간이 지나도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 교수와 만나는 횟수는 점점 줄어들게 되고, 이를 극복하지 못한 학생은 연구실을 떠나기도 한다. 반면 학생이 이 혹독한 시기를 잘 극복해 훌륭한 연구업적을 낸다면 학생 단독으로 논문을 쓰는 경우가 많다. 결국 능력이 되는 학생은 살아남지만 그렇지 못한 학생은 도태되고 마는 것이다. 무사히 졸업한 학생도 졸업 후에 교수가 꿈에 나타나는 심한 악몽에 시달린다. 이런 방법이 성공하려면 교수는 각 학생의 능력에 맞게 연구주제를 잘 선택해 줄 수 있어야하며, 더욱 중요한 것은 학문적으로나 도덕적으로도 높고 엄격한 잣대를 지니고 있어야 한다는 점이다.

탈권위주의적 가치관에 익숙한 현대 학생들에게는 이런 교수들이 결코 매력적 일 수 없다. 따라서 이런 방법보다는 자유로운 분위기에서 학생의 자발적인 참여를 유도하는 교수가 인기 만점일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학생에게 친절한 이론물리학 석학교수를 찾기는 매우 어려운 일이다. 학생이 가지고 있는 능력을 뛰어넘게 하는 방법은 이런 고전적인 게임 외에 또 없을까. 개인적인 경험으로는 역시 이런 고전적인 게임 외에 다른 뾰족한 방법은 없는 것 같다. 그래서 이런 지적유희가 점점 사라져가는 학문풍토가 아쉽다.

필자는 미국 UCSD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아시아태평양이론물리센터(APCTP) 응집물리 프로그램 디렉터를 역임한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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