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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동도 서술할 수 있나
감동도 서술할 수 있나
  • 조은정 / 목포대·미술사
  • 승인 2008.01.30 1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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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현대조각사연구』 최태만 지음 | 아트북스 | 2007 | 752쪽 | 3만5천원

미술사학에 대해 흔히 갖기 쉬운 오해 가운데 하나는 이 학문이 역사적으로 종결된 과거의 미술에 대한 객관적 기술이라는 믿음이다. 실제로 미술사학은 미술가와 미술작품, 그리고 미술에 대한 사건과 흐름에 대한 저술 행위를 전제로 하고 있으며, 이처럼 저자의 관점에 따라서 행해지는 미술사 저술에 있어서는 학문의 대상과 주체 사이에 절대적인 거리란 있을 수 없다는 점을 염두에 둘 필요가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역사학자들로부터 사실에 대한 공정하고 신뢰할 수 있는 정보와, 이를 통해서 현재와 미래의 문제에 대한 해답을 얻기를 기대하는 것도 사실이다. 최태만의 근저 『한국현대조각사 연구』에 대한 서평에 앞서 역사 개념에 대해 되짚어 보는 이유는 이 저서가 지닌 장점이자 한계가 바로 역사 서술 행위의 제 문제와 관련을 맺고 있기 때문이다.

최태만의 본 저서는 저자가 12년 전에 쓴 『한국 조각의 오늘』(1995)의 연장선상에 위치한다. 이 책은 한국인으로서 최초로 동경미술학교에서 서구의 조각기법을 배우고 돌아왔던 김복진을 근대 한국조각의 시발점으로 보고 해방 이후 90년대까지 약 반세기에 걸친 현대조각의 전개 과정을 추상과 모더니즘, 구상과 사회비판, 다원주의 등 주제 별로 정리한 획기적인 시도였다.

한국 근·현대미술사에 대한 저술이 특정 작가나 주제, 담론에 국한돼 있던 이전까지의 관행에서 벗어나서 동시대 미술을 역사적으로 체계화하고자 하는 이러한 노력은 1990년대 후반 들어서 활발하게 일어나기 시작했으며 그 성과는 서성록과 오광수, 이경성, 최열 등의 저서로 나타난 바 있다. 특히 한국 미술의 근대와 현대를 어느 시점으로 볼 것인가 하는 문제 제기는 한국의 문화 정체성 및 역사의식에 대한 진지한 고찰이 이뤄지는 계기가 됐다. 무엇보다도 『한국 조각의 오늘』은 상대적으로 소홀하게 다뤄졌던 조각 분야에 집중했다는 점에서 큰 의미를 지니는 것으로서, 현재까지도 한국 현대 조각을 공부하는 이들에게 귀중한 입문서 역할을 하고 있다.

이번에 모란미술관 총서로 나온 『한국현대조각사 연구』는 『한국 조각의 오늘』을 10여년에 걸쳐서 보완한 결과물로서, 저자가 지난 이십여 년 동안 미술 비평과 전시 기획 분야에서 쌓아온 현장 지식이 집대성돼 있다는 점이 가장 큰 장점이다. 작가 개인과 작품, 전시, 사건 등에 있어 일반적인 미술사 개론서에서 찾아보기 힘든 구체적인 설명들이 자주 등장하는 이유도 그 때문이다. 특히 1980년대 이후 활동 중인 작가들에 대한 최태만의 서술은 개인적인 체험과 어우러져서 생생한 인상을 독자들에게 전달한다. 미술계 현장에 대한 저자의 관심은 1997년 포스코센터 앞 조형물 철거 사건과 관련해서 소위 ‘1퍼센트 법’의 문제점을 지적한 부록 ‘환경조형물의 현황과 문제’에서 구체적으로 드러나고 있다.

과거 『한국 조각의 오늘』 서문에서 최태만은 자신의 작업에 대한 두 가지 고민을 토로한 바 있다. 첫 번째는 미술비평가로 한국 현대미술사를 저술함에 있어 역사를 재구성하는 토대로서의 史觀을 뚜렷하게 독자들에게 제시할 수 있느냐 하는 문제이고, 두 번째는 미술 작품에서 경험하는 생생한 감동과 구체적인 지식을 개론적인 역사서를 통해서 전달할 수 있는가하는 문제였다. 이러한 고민은 이번 『한국현대조각사 연구』에서도 그대로 이어지고 있다.

조각의 본질과 한국 미술의 근·현대성에 대한 논의를 다룬 1장과 2장을 비롯해서 권진규, 최종태 등 개별 작가나 개별 미술 사조에 대한 분석 사례들에서는 동, 서양의 고대로부터 현대에 이르는 다양한 미학적 논의와 조형 이론들을 끌어들여 동시대 한국 조각을 역사적 맥락 속에서 조망하려는 시도가 엿보인다. 그러나 일제시대 이후 한국 조각의 흐름을 ‘앵포르멜과 추상조각’, ‘개념과 물질’, ‘인간과 형상’ 등 몇 가지 주제와 사조로 나누는 저자의 방식에 있어서 역사 구조의 체계화보다는 개별 작가와 작품들에 대한 경험적 분류의 성격이 강하다는 사실을 지적해야 할 것이다.

여기서 현대 미술의 다양성과 전통에 대한 반발, 표현의 자유에 대한 극단적인 추구로 인해 과거와 현재를 통틀어서 하나의 일관된 체계를 세우려는 미술사학자들의 전통적인 시도들이 무력해진 지금의 상황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현대의 미술사학자들은 과거 흘러간 시대의 미술에 집중하거나, 아니면 미술사학의 전통적인 임무였던 역사적 구조 분석과 체계화를 포기하고 문화 비평, 혹은 철학적 해석의 영역으로 옮겨가는 경향마저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역사 서술은 과거에 국한된 문제가 아니라 지금, 여기, 우리들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지식과 용례를 밝히는 행위이다. 최태만의 『한국현대조각사 연구』가 현 시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 이유도 그 때문이다.

  조은정 / 목포대·미술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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