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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훈 역사소설이 다다른 곳
김훈 역사소설이 다다른 곳
  • 오창은 / 문학평론가
  • 승인 2008.01.29 12:06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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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훈은 한 칼럼에서 ‘말하기의 어려움’에 관해 이야기한 바 있다. 그는 “언어의 순결은 사실에 바탕한 진술과 의견에 바탕한 진술을 구별하고 사실을 묻는 질문과 의견을 묻는 질문을 구별하는데 있다”고 강조했다. 보도기사와 칼럼을 구분하는 듯한 이러한 진술은 정치적 언어를 공격하기 위한 것이었다. 사실이 아닌, 그렇다고 의견도 아닌 정치인의 언어는 욕망이나 이득에 바탕을 두고 있어 말을 오염시킨다. 그 오염에 저항해 김훈은 말의 허상만 있는 세상에서는 ‘허깨비의 공포’가 난무한다고 했다.

허구로 오염된 언어

사실과 의견이 구분될 수 있는가에 관해서는 커뮤니케이션학에서도 논란이 많다. 사실은 바라보는 각도에 따라 미묘한 차이를 발생시키고, 의견 또한 ‘권력의 힘’에 따라 해석의 방향이 바뀌기 때문이다. 때로는 말은 공허한 추상이 아닌, 물질적 힘을 지니기도 한다. 말 자체가 아니라, 말을 다루는 사람이 문제이고, 더 나아가 어떤 말을 작동시키는 사회 시스템이 문제이기도 하다.

김훈이 ‘말하기의 어려움’에 대해 썼던 때가 1998년이었다. 그 문제의식은 10여년이 지난 지금에도 여전히 유효한 듯하다. 김훈은 이제 저널리스트에서 『칼의 노래』(2001), 『현의 노래』(2004), 『남한산성』(2007)을 통해 장인으로 거듭났다. 그는 역사소설의 형상을 쪼아내면서도 여전히 ‘말하기의 어려움’을, 아니 말의 허깨비를 공격했다. 사실도 아니고, 의견도 아닌, 허구를 통해 말을 다루는 위치에 선 그는 ‘훼손된 언어의 창조자’다. 그는 저널리즘이 강조하는 ‘사실과 의견의 구분’을 훌쩍 뛰어넘어서 저널리즘의 금기인 가상현실을 다루는 작가가 된 것이다. 저널리스트로서는 용납하기 힘든 허구적 언어로 가공된 세계가 소설언어의 세계이다. 소설에서는 사실과 의견의 구분 자체가 무의미해진다. 그 두 영역이 뒤섞여 새로운 언어로 다시 가공돼야만 소설이 가능해진다. 사실과 의견을 넘어서서, 그 아득한 갈등을 융합시켜 새로운 진실을 창조하려는 것이 ‘문학 언어의 욕망’이리라. 

기자에서 작가로, 혹은 작가와 기자로의 이동은 한국문학사에서는 낯익은 풍경이었다. 일제 강점기에 수많은 작가들이 언론계에서 사실·의견의 언어와 허구의 언어를 반죽했다. 대표적인 문인으로 이인직, 이광수, 최서해, 홍명희, 이태준, 염상섭 등을 거론할 수 있다. 90년대 이후, 기자로 생활하다 작가로 활동한 이는 김소진·고종석·김훈 등을 꼽을 수 있다. 김훈의 경우는 1973년 한국일보에 입사 한 이후 30여년 간 언론계에 몸담은 베테랑 기자로 꼽힌다. 그런 그가 문단의 제도적 등단 절차에 구애받지 않고 1995년에 첫 장편 『빗살무늬의 추억』을 발표해 작가 명함을 한국문단에 새겨 넣었다. 그는 이미 『풍경과 상처』(1994) 같은 인상적인 에세이로 많은 독자층을 확보하고 있었지만, ‘독특한 문체로 칼럼을 쓰는 스타일리스트’라는 둥지에서 세상을 가늠했다. 그러던 그가 2000년대에 들어, 한국 문학의 대표작가로 떠오르고 있다. 늦깎이 작가의 어떤 문학적 감성이 독자들을 휘어잡고 있는 것일까.

 이 글은 김훈의 역사소설이 갖는 의미를 추적하고, 독자들이 그의 소설에 열광하는 이유를 해명하기 위한 목적을 갖고 있다. 더 나아가 김훈 소설이 갖고 있는 철학적 의미를 ‘언어와 이데올로기’를 통해 비판적으로 검토하는 데까지 가닿으려 한다.

 

보이지 않는 적은 누구인가

문학평론가 김현은 1969년에 발표한 한 글에서 ‘무협소설과 허무주의’의 관계를 고찰했다(‘무협소설은 왜 읽히는가 - 허무주의의 부정적 표출’, <세대> 1969년 10월호). 그는 이 글에서 ‘한국 무협소설 시장의 확대와 새롭게 부상하는 신 중산 계급의 의식구조’를 대비시켰다. 루시앙 골드만의 ‘문학사회학 방법론’을 원용한 김현은 ‘중산층의 불안·초조·회의’가 무협소설을 탐닉하게 한다고 보았다. 김현이 보기에 중산층은 무협소설을 통해 “이유 모를 불안감으로 휩싸여 있는 그들의 세계에서 도피해 동면의 시간을 즐긴다”는 것이다. 김현의 이러한 분석은 김훈 소설이 갈무리하고 있는 이데올로기의 핵심을 해명하는 열쇠가 될 수도 있다.

 
김현의 글이 흥미로운 또 하나의 이유는 일종의 落穗처럼 김광주(김훈의 부친)를 언급하고 있기 때문이다. 김광주가 누구인가. 그는 1933년 <신동아>에 ‘밤이 깊어 갈 때’를 발표해 등단한 작가였고, 한 때는 김구를 따라다니며 항일운동을 했다. 경향신문에서 기자생활을 했던 그는 『혼혈아』 등의 소설집과 『석방인』 등의 장편소설을 남겼다. 그는 중국무협소설인 웨이츠원의 『劍海孤鴻』을 『정협지(情俠誌)』로 번안해 1961년부터 1963년까지 경향신문에 연재하면서 대중적 관심의 대상이 됐다. 중문학자 전형준은 김광주의 『정협지』를 한국 무협소설의 기원으로 보고 있을 정도다.

창조적인 작가로 평가받는 대부분의 문인은 자신의 기원을 숨긴다. 기원을 숨김으로써 스스로 기원이 되려는 욕망은 의식적인 것일 수도 있고, 무의식적인 것일 수도 있다. 김훈의 경우도 예외는 아닌 듯하다. 그는 『정협지』, 『비호』 등 무협소설을 번안하고 창작한 아버지와 자신의 역사소설과의 영향관계를 드러내지 않는다. 대신 ‘병석에 누워 있는 아버지가 밥벌이 때문에 소설을 구술한 것을 받아쓰면서 문장수업을 받았다’고 회고하고 있을 뿐이다. 그는 부친 김광주의 글 받아쓰기를 통해 ‘밥벌이의 고단함’을 현장에서 겪었다. 아이러니하게도 김훈은 도시 중산층 중년 남성의 감성을 위무하는 ‘전쟁역사소설’을 창작해 밥벌이를 한다. 그 도시 중산층 중년 남성은 청소년 시절 김광주의 무협소설의 자장에서 자유롭지 못했던 세대이기도 하다.

김훈은 단호한 목소리로 “내 청춘의 소망은 작가가 아니었다. 밥이었다”라고 말한다. 글쓰기, 문학하기가 수단으로써 밥벌이가 된다는 것은 주류적 관념은 아니다. 그것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대중의 후원이 있어야 한다. 여기에 글쓰기, 문학하기의 딜레마가 있다. 왜 김훈은 끊임없이 역사소설로 귀환하는가. 『현의 노래』와 『남한산성』은 첫 작품인 『칼의 노래』의 아류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음에도, 그는 계속 역사소설로 귀환한다. 거기에 대중이 있기 때문이다.

김훈은 비교적 여러 장르의 소설을 창작했고, 어느 정도 문학적 평판도 수확해낼 수 있었다. 2004년 이상문학상을 거머쥔 ‘화장’이 대표적이다. 그러나 그를 대중적 작가로 호명해낸 것은 ‘전쟁을 문학적 소재로 한 역사소설’( 『칼의 노래』, 『현의 노래』, 『남한산성』)이었다. 

이순신은 예견된 두 방향의 위협(인조의 불안감과 왜군의 공격)에 맞서는 청년 고수의 현대적 변형이었다. 『칼의 노래』의 이순신은 근대적 주체처럼 내면적 갈등을 풍부하게 갈무리하고 있고, 그 내면성으로 인해 오히려 자신과의 지난한 투쟁을 감내해야 한다. 외부의 적과 내부의 적을 동시에 상대한다는 측면에서 소설 이순신은 그 어떤 무협소설 주인공보다 근대적 형상을 하고 있다. 한국인에게는 너무도 익숙한 ‘성웅 이순신’을 인간화한 것, 그래서 한국에서만 의미가 있을 법한 소설이 『칼의 노래』다. 이순신이 행하는 매순간의 결단을 단락단락 연결해 일종의 미스테리적 분위기를 가미한 것도 이 소설의 성공 열쇠였다. 『칼의 노래』는 『난중일기』에 기댄 채 단호한 개인의 목소리를 민족사적 의미로까지 증폭시키고 있다. 그 자신감 넘치는 필치가 ‘역사를 개인화’했음에도 강한 울림을 안겨주었다.

반면, 『현의 노래』는 『칼의 노래』의 번안이며, 아류다. 잔인한 장면 묘사와 고대의 비인간적인 관습을 통해 전쟁의 비참함을 극대화한다. 그러면서, 藝의 화신 우륵과 鐵의 신봉자 야로로 대변되는 시대의 표상을 전면화하고 있다. 한 몸에서 갈등하는 두 주체처럼 우륵과 야로는 ‘일상과 전쟁’이 한 몸임을 증언한다. 그들은 숱한 살육의 현장에서 자신의 역할을 수행함으로써 살아남고 죽는다. 전혀 상반된 성격의 두 주체는 실제로는 역사 속에서 생존을 위해 몸부림치는 샴 쌍둥이일 뿐이다.

『남한산성』은 『칼의 노래』에 비해서는 덜 내면적이고, 『현의 노래』에 비해서는 덜 잔인하다. 그런데도 상황의 프레임은 훨씬 더 비극적이고 전망마저도 찾아볼 수 없어 어둡기만 하다. 적과 아가 대치하는 전쟁 중인데도 전투는 거의 없고 숱한 말의 쟁쟁거림만이 무성하다. 이는 마치 무협소설 속에서 ‘보이지 않는 적’과 대응하는 주인공의 불안의식을 극대화한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런데도 『남한산성』이 성공할 수 있었던 비결은 너무도 익숙한 소재이면서, 그 누구도 그 실체를 알 수 없었던 47일간을 소설 언어로 피와 살이 돌게 했기 때문이다. 그곳에서 조정은 야유의 대상이 되고, 무능력의 파국이 적나라하게 드러나고, 말의 허망함과 인간의 질긴 생명력이 동시에 끓어 오른다. 갇힌 상황에서 극도로 불안해지면 대부분의 인간은 동물적 본능에 자신을 내맡기고 만다. 이 상황에서 오직 진실한 언어는 ‘나는 살고자 한다’는 본능의 언어일 뿐이다. 영웅이 불가능한 시대의 무협소설 형식이 『남한산성』이라고 할 수 있으리라. 

물론, 김훈의 전쟁 소재 역사소설이 무협소설과 동일한 것으로 간주될 수는 없다. 분명 역사소설과 무협소설은 다른 소설문법과 장르적 관습을 지닌다. 하지만, 김현의 지적처럼, 무협소설에 열광하는 독자와 전쟁 소재 역사소설에 열광하는 독자의 의식에는 유사한 측면이 존재한다. 더구나 그 독자층이 30~50대 도시 중산층 남자라고 했을 때, 전쟁소설이나 무협소설을 소비하는 맥락은 흡사하다. 근대 사회에서 중산층의 내면성으로 자리잡은 불안·초조·회의의 감정은 ‘보이지 않는 환영’처럼 소설의 내러티브를 구성하고, 독자를 옥죄어 온다. 오로지 살아남기 위해, 비굴함과 공포를 감내하는 것, 그것이 중산층 소시민의 ‘일상적 진리’이다. 김훈은 이러한 ‘순응적 감각’을 역사적 언어로 풀어냄으로써, 독자를 위안하고, 우발적인 전쟁을 정당화한다. 이렇듯, 무협소설과 전쟁 소재 역사소설의 유사성은 ‘대중성’이라는 이름으로 김훈에 의해 생산되고, 확대되고, 재생산되고 있는 것이다.

하이퍼리얼리즘과 역사소설

김훈의 장편 역사소설은 기존의 역사소설 문법과는 다르다. 이 부분을 간과한 채 김훈 역사소설의 대중성을 해명할 수는 없다. 도대체 무엇이 독자들에게 새로운 느낌을 안겨주는 것일까.
김훈 역사소설은 역사를 다루는 것이 아니라, 역사적 상황을 다룬다. 상황 중에서 특히 전쟁 상황을 집요하게 집중한다. 그 누가 거부할 지라도, 역사를 언어로 재현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역사에는 ‘시간’이 개입돼 있기에, 모든 복원된 역사는 ‘핵심이 누락된 재건축’일 뿐이다. 개념적으로 볼 때, 역사소설은 ‘작가가 역사적 시간을 재구성해 창조해낸 허구적 세계’이며, ‘현재의 세계에 영향을 미치고자 하는 이데올로기적 서사양식’일 수밖에 없다. 과거 시간에 대한 결락된 재구성을 만회하기 위해 김훈은 역사적 사건의 주변 이야기를 기자적 근성으로 취재하고, 장인적인 깐깐함으로 언어를 깎아낸다. 그가 다루는 언어는 옛스러운 의고체이면서, 종결어미가 ‘다’로 끝나 딱딱한 느낌을 자아낸다. 문체에서 권위주의적 향취를 풍기기도 하고, 단호한 절대자의 목소리를 意匠하기도 한다.

1909년의 남한산성 모습. 스산한 역사의 풍경을 볼 수 있다. 사진출처: 문화재청

이러한 느낌을 자아내게 하기 위해서는 작가의 작품 장악력이 강해야 한다. 거기에는 내용과 형식면에서 강렬한 힘이 느껴져야 한다. 그런데 김훈 역사소설은 내용(주제)에서는 허술하기 그지없고, 형식에서만 강한 흡입력을 발산한다. 김훈의 소설을 읽다보면, 그가 소설세계의 철학적 깊이를 담보하지 못하고 있다는 느낌을 떨쳐버릴 수 없다. 그는 끊임없이 유보적인 언술을 구사하고 사상을 속류화한다. 『칼의 노래』에서는 “나는 늘 알지 못했다”라고 의구심을 표하고, 『현의 노래』에서는 ‘소리와 쇠에는 주인이 없음’을 강조한다. 『남한산성』의 서사는 “지켜서는 살수가 없고, 살려면 허물어야 하는” 역설적 상황의 연속이다. 김훈 소설 속 상황은 주체 없는 과정의 은유적 표현이다. 그 주체 없음을 언어로, 문체로 매워나가고 있는 것이다.
스타일리스트로서 김훈은 하이퍼리얼리즘(極寫實主義)의 기법을 통해 현재와 과거의 간극을 좁힌다. 하이퍼리얼리즘은 극사실주의적 기법을 통해 독자에게 충격을 가하는 방식이다. 부분을 과장하고 확대해 작품 자체의 현실성을 극도로 높임으로써, 오히려 현실감을 비트는 방식이기도 하다. 김훈은 『칼의 노래』, 『남한산성』 등에서 역사적 상황의 부분적 사실을 전체로 확대해 독자를 텍스트 안에 가둬 버린다. 텍스트 밖을 상상하지 못하게 집요하게 밀어붙임으로써, 텍스트가 진실임을 상상하게 만든다. 그러다 보면 전체보다는 부분에, 인물보다는 인물을 둘러싼 상황에 시선이 고정된다. 하이퍼리얼리즘은 미국 팝 아트에서 발전한 것으로, 원래는 산업사회의 여러 풍경을 비판적으로 제시하기 위해 쓰였다. 이러한 근대적 기법을 역사소설 장르에 대입시킴으로써 김훈 소설은 ‘역사적 소재에 현대적 형식을 조합’하는 ‘기묘한 새로움’을 창조해냈다. 독자들은 익숙하다고 믿었던 임진왜란·병자호란이 전혀 낯선 형식으로 펼쳐지고 있는 것에 열광하고 있는 것이다.

전체를 보여주기보다는 부분을 확대하는 방식, 관계를 중시하기보다 내면을 과장하는 방식은 독자에게 ‘역사적 사건의 세부 풍경’을 직접 받아들이게 한다. 바로 여기서 이데올로기적 효과가 발생한다. 실제로 모든 역사소설은 이데올로기적이다. 굳이 이념형 역사소설이 아니라고 할 지라도, 역사소설은 창작자의 무의식이 개입한다는 측면만으로도 이데올로기적이다. 이데올로기는 ‘허위의식’이나, ‘현실에 대한 왜곡된 사상이나 지식’만을 지칭하지는 않는다. 그것은 삶을 영위하면서 얻은 경험의 총체이고, 개인이 자신의 존재조건과 맺는 상상적 관계이기도 하다.

비정, 불온, 위험

그렇다면, 김훈의 역사소설에 내장돼 있는 이데올로기는 무엇인가. 김훈이 소설에 다가서는 태도는 ‘근대의 직업 윤리’에 기반한 기자적 근성에 가깝다. 근대적 직업윤리는 바로 ‘자본주의의 정신’이기도 하다. 막스 베버는 자본주의 이후 “치열한 경쟁이 시작되자 목가적 분위기는 붕괴” 됐고, “상승하지 못하는 자는 몰락할 수밖에 없었다”고 했다(『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 베버가 강조한 것은 ‘자본주의 정신의 발달’이 근대자본주의의 추진력이었다는 사실이다. 현재, 자본주의의 정신은 한국사회의 시대정신이기도 하다. 자본주의 정신으로 무장한 시민은 기존의 윤리적 격률이나 종교적 사상에서 자유롭고, 가족·학교 등과 같은 이데올로기적 국가장치에 의해 ‘냉정한 인생의 학교’에서 경쟁에 익숙해진 채 훈육됐다. 그렇다보니, 자본주의 정신의 성숙은 ‘자본주의 밖은 없다’라는 인식을 보편화하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문제는 이러한 자본주의 정신이 전 역사의 과정으로 절대화됨으로써, 현재의 삶을 불가피한 것으로 숙명화하는 데 있다. 김훈의 역사소설이 이러한 이데올로기적 기능을 수행한다. 김훈은 전쟁이라는 특수 상황을 과장적으로 확대해 보여줌으로써, 악마적 약육강식이 인류역사의 필연적 진리였음을 강변한다. 그가 두려워하는 것은 “강한 자가 약한 자에게 못할 짓이 없고, 약한 자 또한 살아남기 위하여 못할 짓이 없다”는 냉혹한 사실이다. 전쟁을 다루는 김훈의 언어는 남성의 언어요, 적자생존의 논리이며, 승자독식을 진리화하는 절대자의 언어이다. 거기에는 여성의 언어가 틈입할 수 없고, 보살핌의 윤리가 오히려 하찮은 예외적 상황으로 도외시되고 만다. 생활인의 가장 기본적인 삶의 욕구를 옹호하는 듯하면서도 적자생존과 약육강식을 절대화하고 있기에, 비정한 자본주의의 정신만 가득할 뿐이다.

여기서 더 나아가 그는 자신이 살아온 삶의 과정이, 아니 한국사회의 50대 이상의 세대가 겪어낸 현대사의 실재적 경험을 역사소설 속에서 이데올로기화한다. 한국사회의 50대는 한국전쟁의 여파가 잦아들기 전에 태어나 모진 가난을 생존투쟁하듯 겪어냈다. 이들은 전쟁의 풍문 속에서 전쟁에 대한 공포와 싸워야 했다. 박정희 군사정권 시절에는 총력동원 체제에 협력하듯 일상을 헌납해 경제발전에 몰두했고, 그 와중에 베트남 전쟁에서 친구들을 잃어야 했다. 정당하게 존중받지 못한 세대라는 피해의식 속에서 이들은 자연적 노년화의 숙명을 맞이하고 있다. 이러한 사회적 분위기 속에서 김훈은 ‘경쟁의 냉혹함’을, ‘남성들에게 일상의 삶이 바로 전투임’을 보여줌으로써 세대적 정체성을 정당화하고 있는 것이다.

이즈음에 이르면, 김훈의 소설언어는 사실도 의견도 아닌 이데올로기의 언어로 화하고 만다. 인간을 개별화시킴으로써 경제적 가치, 자본주의적 가치, 약육강식의 가치를 숙명화하고 있는 김훈 소설의 이데올로기는 불편하다. 김훈 소설이 비록 현실 속에서 고투하며 일상의 전투를 치루고 있는 생활인의 분열된 윤리의식을 위무하고 있더라도 마찬가지다. 현실을 낭만적으로 채색해 ‘아름답고 윤리적인 삶’만을 강변하는 이데올로기가 불온한 그만큼, 과거에서부터 현재까지 폭력과 악의 세상이었다고 주장하는 하이퍼리얼리즘 역사소설 또한 위험하다.

오창은 / 문학평론가


 

필자는 중앙대에서 ‘한국 도시소설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경향신문> 신춘문예 평론으로 문단에  데뷔했고, 『실천문학』 편집위원, 지행네트워크에서 활동중이다. 『비평의 모험』 등의 저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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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정요망 2008-02-01 16:57:25
"그렇다면, 김훈의 역사소설에 내장돼 있는 이데올로기는 무엇인가.(후략)"의 단락이 연거푸 두번 게재되어 있습니다. 수정되어야 할 것 같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