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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재의 심연’에 이끌린 피렌체의 절대군주들
‘존재의 심연’에 이끌린 피렌체의 절대군주들
  • 이남재 / 한국교원대· 음악학
  • 승인 2007.12.31 23: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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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페라로 읽는 서양 근대의 편린_ ②<오르페오>와 <돈 키호테>

페리의 ‘에우리디체’의 첫 공연에는 신부의 큰 언니 엘레오노라의 남편 만토바 공작 빈센초 곤차가 1세가 그의 두 아들과 함께 처가의 혼례 축하 행사에 귀빈으로 참석했다. 이들의 수행원들 가운데는 후에 앙리 4세와 신부 마리아 데 메디치의 혼례 장면들을 스물두 폭의 대형 화면에 그려내게 되는 루벤스와 더불어, 크레모나 출신답게 이미 십여 년 동안 바이올린 주자로 곤차가 궁정을 섬겨왔던 몬테베르디가 포함돼 있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페리의 오페라 공연에 깊은 인상을 받은 맏아들 프란체스코 곤차가는 이를 능가할만한 오페라를 작곡할 것을 몬테베르디에게 명했으며, 마침내 1607년 2월 카니발 시즌에 공작 및 그의 아들들과 대본을 쓴 스트리지오가 속했던 아카데미아 데글리 인바기티의 회원들을 위해 최초의 걸작 오페라 ‘오르페오’를 공작 궁전의 무대에 올렸다.

‘오르페오’가 최고의 걸작이 된 이유
페리의 ‘에우리디체’가 현존하는 최초의 오페라라는 의미만 부여받는 반면 몬테베르디의 ‘오르페오’가 걸작이라고 평가받고 있는 근본적인 차이는 무엇일까.

우선 지적할 수 있는 점은 작곡한 사람들의 경력 자체가 다르다는 점이다. 캇치니와 함께 페리는 뛰어난 성악가로 인정받고 있었지만, 바로 이 점이 역으로 오페라 작곡가로서의 그의 한계이기도 했던 것으로 보인다. 기악 연주자였던 몬테베르디와는 달리 페리는 직접 노래를 불러야 하는 가수로서의 입장에서 끝내 벗어날 수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더구나 몬테베르디는 연주자로 일하는 한편 실내 성악곡인 마드리갈을 꾸준히 작곡해왔던 것도 걸작을 빚어낼 수 있는 밑거름이 됐다. 극의 진행 상황이 요구하는 적확한 음악적 표현에 필요한 모든 수단을 동원해 적절히 구사할 수 있는 심리적 거리를 확보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리누치니의 것과 마찬가지로 스트리지오의 ‘오르페오’ 대본도 15세기 말 만들어진 폴리치아노의 작품에 바탕을 두고 만들어졌기 때문에 고전 비극의 틀에 따라 다섯 부분으로 이루어진 전체 짜임새는 별반 다르지 않으나, 혼례 행사를 위한 ‘에우리디체’가 행복한 결말로 끝맺는 반면, ‘오르페오’는 에우리디체가 따라오는지 뒤돌아보다 또다시 상실의 아픔을 겪는 오르페오에게 하늘로부터 아폴로가 내려와 함께 천상으로 올라가는 것으로 마무리 된다. 르네상스 연극으로부터 물려받은 이러한 두 가지 방식의 끝맺음들은 그 후 해피 엔딩이란 뜻의 ‘lieta fine’와 기계 장치에 의해 하늘에서 내려와 꼬인 상황을 해결한다는 의미의 ‘deus ex machina’라는 특정 용어로 각각 굳어질 만큼 궁정 오페라의 관습을 이룬다.

그러나 이 두 작품은 이러한 전체 윤곽보다는 각 부분을 구성하고 다루는 솜씨의 차이가 더욱 두드러진다. 단조로운 낭송조 일변도로 한없이 이어지다가 마침내 인테르메디의 상투수법인 춤을 곁들인 합창으로 각 부분을 마무리했던 페리와는 달리, 몬테베르디는 각 부분마다 뚜렷한 성격의 독창곡들을 적절히 배치해 놓았다. 갓 결혼한 신랑의 기쁨을 맘껏 표출한 첫 막의 흥겨운 “그늘진 숲이여”, 독사에 물려 숨진 에우리디체의 비보를 듣고 지옥으로 내려가기로 마음먹는 비통한 “네가 죽다니” 같은 노래들은 지금 들어도 기억에 뚜렷이 각인되는 인상적인 곡들이다.

특히 3막에서 스틱스 강을 건너기 위해 뱃사공 카론을 향해 부르는 “막강한 영이시여”는 인간이 신적 존재를 설득하려고 시도하는 기원이자 呪文이라는 점에서 더욱 흥미를 끈다. 네 절로 이루어진 이 노래는 단순한 것과 장식이 붙은 두 가지로 기보돼 있어 변화를 줄 수 있는 데다, 반주 악기가 각 절마다 바뀌는 소위 ‘유절 변주’ 형식으로 돼 있어 단조로움과 변화를 동시에 추구하고 있다.

그러나 더 재미있는 것은 이 노래를 들은 카론이 노래에 취해 잠들어 버린다는 점이다. 음악을 들으면 왜 잠이 오는 것일까. 아마도 하늘의 별들이 낮에도 빛나고 있지만 태양에 압도돼 보이지 않다가, 밤이 되면 영롱한 모습을 드러내는 것에 비유할 수 있을 것이다.  세상사의 필요에 따라 이성의 빛만 바라보던 우리들이 음악이 녹여버리는 이성의 껍데기를 벗고 마음의 속살을 뽀얗게 드러내게 되면 감추어졌던 있는 그대로의 자신의 적나라한 모습에 직면하지 않을 도리가 없기 때문이다.

의식에 떠오르지 않아 사라진 줄로만 여겼던 기억들이 초저녁 별들처럼 하나씩 살아날 때, 나는 왜 여기서 이러고 살고 있는지 돌아볼 심리적 거리를 되찾을 수 있다. 연극을 시종 노래로 부른다는 이치에 닿지 않는 오페라가 두고두고 마음에 남는 것은 바로 우리의 존재의 밑바닥을 휘저어 놓았기 때문일 것이다.

왕권신수설에 대항했던 유일한 통로

오페라가 피렌체와 만토바의 절대 군주들의 마음을 끌었던 것도 바로 이처럼 스스로 존재의 심연을 엿볼 수 있었기 때문이었으리라. 누구나 그렇듯 몬테베르디의 오페라 초연에 참석했던 만토바 궁정의 사람들도 남자라면 오르페오, 여자라면 에우리디체의 입장과 자신들을 동일시했었겠지만, 대본을 쓴 스트리지오나 몬테베르디의 입장에서는 만토바 공작이 오르페오의 노래를 듣다 잠든 카론 같은 존재이기를 간절히 바랐을지도 모른다. 공작을 비롯한 당시 절대 군주들은 자신의 권력에 정당성을 부여하기 위해 왕권신수설이라는 이상주의적 태도를 취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이안 와트에 의하면 이러한 “이상주의가 파괴적인 현실의 힘에 대항하기 위해 필연적으로 취하는 방어기제”가 바로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경직된 자세”라고 설파 했는데, 오페라를 즐기며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보는 것이 바로 이러한 이상주의적 경직성을 풀어줄 수 있는 최상의 수단임을 잘 알고 있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당시 군주들의 경직성을 풍자적으로 보여주는 『돈 키호테』가 초기 오페라가 태어난 무렵인 1605년에 출판됐다는 사실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스페인이 16세기 유럽 최강국으로서의 위세를 아직도 떨치고는 있었지만, 무적함대의 영국 침공 실패 후로는 그 누구도 유럽을 합스부르크 가문의 영도 하에 종교 개혁 이전처럼 하나로 모으겠다는 황제 카를 5세가 품었던 원대한 이상이 실현되리라고는 더 이상 믿지 않게 됐다.

□ 켄트 오페라의 ‘오르페오’ 공연 장면이다.


아무리 애써도 결코 이루지 못할 이상을 내세우지 않고서는 그나마 물려받은 권력조차 유지할 수 없으리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던 피렌체와 만토바 같은 도시국가의 절대군주들은, 돈키호테가 풍차에서 거인을 보았듯 현실에 이상주의라는 색을 덧입혀 볼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현실을 외면하고 명분에 집착하는 군주들의 이렇듯 허약한 모습을 가까이에서 지켜봐야 했던 예술가들로서는, 마치 자신들이 초자연적인 존재라도 되는 듯이 권력을 휘둘러대는 이들의 겉치레를 남김없이 벗겨버리고 싶은 충동을 종종 느끼지나 않았을까. 이러한 맥락에서 초기 궁정 오페라들을 1328년 이래 이어져 왔던 곤차가 가문의 만토바 통치가 빈센초의 막내 빈센초 2세가 1627년 성탄절에 후사 없이 죽자 만토바 작위 계승 전쟁(1628~31)으로 이어져 만토바 자체가 점령돼 약탈당하는 씁쓸한 역사적 불운의 전조로도 읽을 수도 있을 것이다.

이남재 / 한국교원대· 음악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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