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PDATED. 2024-04-20 02:30 (토)
헤이! 리버럴리스트, 상상력의 한계를 넘어서시지
헤이! 리버럴리스트, 상상력의 한계를 넘어서시지
  • 안병진 / 경희 사이버대·정치학
  • 승인 2007.12.31 23:45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확대서평] 『정치적인 것의 귀환』 샹탈 무페 지음 | 이보경 엮음 | 후마나타스 | 2007

무페의 책 서평 청탁 전화를 받으면서 번역의 적절한 타이밍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왜냐하면 이미 1993년에 출간된 이 철학서적은 바로 2007년 한국의 선거 과정 및 더 나아가서는 참여정부 5년 실패의 핵심을 마치 예언하듯이 시사해주고 있기 때문이다.

2007년 대통령 선거의 특징에 대해 많은 평론가들이 지적하는 것을 한 단어로 요약한다면 ‘ABR’(Anything But Roh) 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사실 다수의 유권자들이 노무현 정부를 심판하는 이른바 ‘회고적 투표’ 양태를 보였다는 점에서 이는 그리 틀린 평가는 아닐 것이다. 하지만 흥미로운 것은 이명박 후보가 당선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2007년의 노무현이었기 때문이라는 사실이다. 이는 단지 그가 상고출신이거나 자수성가 스타일의 공통점을 가지고 있음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보다 본질적으로는 그가 여의도 바깥의 아웃사이더로서 한나라당을 접수해, 이후 열린우리당 혹은 386으로 상징되는 ‘여의도 특권층’과 선명한 대립각을 형성했다는 의미에서 그러하다. 이러한 관점이 잘 농축된 ‘욕쟁이 할머니’ 등의 일련의 정치광고들은 2002년 노무현 후보의 ‘눈물’ 광고만큼이나 감동적이었다.

1993년 출간된 책이 2007년을 예언하다


반면 이른바 개혁파의 대표주자인 정동영 후보의 ‘가족 행복 시대’나 ‘개성 동영’은 대립각이 불분명하고 분노를 조직하지 못하는 ‘합의주의적 정치’ 방식의 구현이었다. 그는 이후 뒤늦게 전투적인 리버럴인 문국현 후보의 ‘진짜 경제 대 가짜 경제’ 프레임을 차용했지만 어울리지 않은 옷처럼 어색한 캠페인에 그치고 말았다. 주목해야 할 것은 정동영 후보의 이러한 미적지근한 합의주의적 정치는 어떤 측면에서는 그간 5년간 노무현 정부의 부분적 특성을 징후적으로 드러낸 것에 불과하다는 사실이다.

노무현 정부 초기에 필자가 경악했던 것은 대통령의 대화와 타협의 정치에 대한 천진난만한 기대와 발상이었다. 이는 이후 합의주의적 관점이 강한 울리히 벡에 대한 대통령의 열광, 합의주의 기대의 절정으로서 대연정 프로젝트로 나타났다. 반면에 그 강요된 합의주의적 정치의 틈새를 뚫고 홍준표 의원의 부동산 정책 같은 보수적 포퓰리즘이 득세한 바 있다.          

바로 위의 정치지형이 무페가 이 책에서 핵심적으로 고민하는 문제의식이다. 무페는 하버마스적인 합의의 정치를 꿈꾸었던 노 대통령이나 정책에서 정치의 적출 수술을 꿈꾸는 매니페스토 운동을 비웃기나 하듯 정치적인 것에서 적대성은 영원히 제거가 불가능한 존재조건임을 강조한다. 그의 문제의식이 빛나는 것은 놀랍게도 파시즘의 이론가 슈미트의 인생에 대한 비관적 통찰을 회피하지 않고 수용하면서도 이를 역으로 자유주의 정치의 활력소로 승화시키고자 하는 점 때문이다. 그에게 정치의 진정한 역할은 이런 적대적 힘들 간의 헤게모니 투쟁을 자유주의 정치의 틀 자체를 붕괴시키지 않는 활력 있는 ‘경합적 민주주의’로 전환시키는 것이다.

여기서 급진 민주주의자인 그의 자유주의 틀에 대한  존중이 많은 이들을 혼돈스럽게 할 수 있을 것이다. 특히 자유주의가 때로는 모욕적으로까지 들릴 수도 있는 한국의 기이한 맥락에서는 더욱 그러하다. 예를 들어 필자는 한 학술회의에서 참여정부를 자유주의적이라고 지적했다가 한 정부인사가 보수적 집단으로 매도라도 당한 듯이 정색을 하고 항의를 해서 당황한 적이 있었다. 하지만 급진적 민주주의자인 무페조차 스스로 자유주의자임을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그는 다만 자유주의의 경계를 부단히 넓히는 혁신의 관점에서 자유주의를 수용하고 있다. 그러하기에 더 급진적인 스펙트럼의 지젝 같은 학자는 무페의 시도가 자유주의의 헤게모니에 결국 포섭된다는 의구심을 표시하고 있다. 하지만 이러한 자유주의의 스펙트럼 넓히기 시도는 자유주의에 대한 제한된 상상력에 갇혀있는 서구나 한국의 자유주의나 좌파 정치진영들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무페가 하버마스나 롤즈 등의 합의주의적 정치관에 의구심을 표시하는 것은 그가 대화와 타협 자체를 부정하기 때문은 아니다. 단지 그는 집단적 정체성간의 투쟁과, 사실은 냉정한 배제에 기초한 ‘구성된 합의’를 마치 ‘포괄적인 합리적 합의’로 포장하려는 관점의 허구성을 지적하는 것이다. 더 나아가 이러한 합리주의적 탈정치관의 지배는 의도하지 않는 부작용을 양산한다는 점이 무페의 중요한 통찰이다. 왜냐하면 이들 탈정치적 관점은 적대적 힘들을 건강한 방식으로 표출시킬 통로를 제시하기보다는 합의주의적 외관 하에 회피하고 억눌러 결과적으로는 의도와 정반대로 다양한 근본주의적 정체성의 정치를 강화시키기 때문이다. 무페는 현재 서구에서 예외라기보다는 흔한 현상으로 등장하고 있는 우익 포퓰리즘이나 파시즘의 만연을 그 대표적 징후로 들고 있다.

합의주의적 자유주의에 비판적


우익 포퓰리즘이나 파시즘은 지젝의 표현처럼 단조롭고 무기력한 합의주의적 자유주의 정치가 결코 제공할 수 없는 ‘향락’(jouissance)을 시민들에게 제공한다는 점에서 비록 뒤틀린 형태이지만 어쨌든 정치의 본래적 힘을 잘 이해하는 담론이라 할 수 있다. 반면에 무페는 이 책에서 자유주의 이론들이 대중적 욕망에 근거한 파시즘의 현상을 단지 병리적인 예외로 협소하게 이해하고 있는 것을 정치의 본질에 대한 몰이해에서 기인하는 것으로 보고 있다.

무페의 이론은 개인주의적이고 합리주의적인 자유주의 이론에 대해서만 의미 있는 비판을 제공하는 것이 아니라 서구와 한국에서 그 대안으로서 인기를 끌기 시작하는 공동체주의 이론에 대해서도 의미를 제공한다. 즉 미국의 에치오니의 공동체주의 운동이나 한국의 공동체 자유주의 운동은 모두의 합의를 선험적으로 전제한 특정한 공동선의 관념을 주창한다.

하지만 무페가 보기에 이는 경합적 민주주의의 원리를 이해하고 있지 못한 탈정치적 관점의 변종들이다. 반대로 그는 선험적 공동선의 존재 대신에 상호 헤게모니의 충돌 속에서 일시적으로 우위를 점하는 경향에 의해 ‘갈등적 합의’(conflictual consensus)를 이루고, 이는 곧 부단히 도전받아 새로운 갈등적 합의로 이어지는 민주주의적 과정을 중시한다. 다시 말해 그에게 있어 공동선이란 부단히 추구하지만 “결코 도달할 수 없는 하나의 소실점”에 불과하다.

그의 이러한 관점은 최근 한국에서도 주목받기 시작하는 진보적 공화주의 철학의 공공선 개념과 수렴될 수 있는 지점이다. 호노한 등의 현대적 공화주의 이론은 공동체주의나 전통적인 시민공화주의와 달리 공동선의 선험적 규정이 아닌 민주적 구성을 주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단 호노한은 무페의 구성적 외부의 두려움에 대항하는 시민 공동체의 문제의식에서 한 발 더 나아가, 상호 의존된 시민 간의 동료관계 같은 보다 포괄적 규정으로 한 발 더 이론적으로 진전하고 있다.

결국 이 책에서 무페의 자유주의에 대한 고민들은 서구나 한국에서 자유주의의 새로운 이론적, 실천적 혁신을 풍부하게 고민할 수 있는 무기들을 제공해준다. 특히 최근 자유주의 정치진영이 선거에서 참패한 한국의 맥락은 더 큰 적실성을 가진다. 현실 자유주의의 위기가 역설적으로는 자유주의 사상의 이론적, 실천적 혁신의 장기적 계기가 될 수 있다. 더구나 탈정치적인 CEO 정치론의 지배력이 갈수록 커지는 한국의 상황은 새로운 이론적 고민의 과제를 던져준다. 무페의 책은 그 성찰의 여정으로의 좋은 입구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안병진 / 경희 사이버대·정치학

필자는 美 뉴스쿨대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클린턴과 노무현의 탄핵정치학』 등의 저서와 ‘신보수주의의 이념적 뿌리와 정치적 합의’, ‘정치양극화 시대에서 개혁보후주의의 특징과 한계’ 등의 논문이 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