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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항쟁, 출판계 활력 제공 … 공안당국, 부활한 ‘창비’에 시비
6월항쟁, 출판계 활력 제공 … 공안당국, 부활한 ‘창비’에 시비
  • 최성일 / 출판평론가
  • 승인 2007.12.31 23: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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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동기의 출판소사] 1980년대의 출판사들(하)

1980년대 초반, 정부당국은 신규 출판사의 등록뿐만 아니라 기존 출판사의 정기간행물 등록마저 받아주지 않았다. 새잡지를 창간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하여 출판사들은 부정기간행물을 펴내기 시작한다. <실천문학>은 출판사 실천문학사의 모태가 됐고, 문학과지성사의 <우리 세대의 문학>은 1980년 7월 신군부에 의해 강제폐간당한 계간 <문학과지성>을 대체하는 성격이 있었다.

창작과비평사는 비평, 시, 소설을 장르별로 따로 묶어 단행본으로 펴낸다. 신작비평집과 신작시집은 독자의 좋은 반응을 얻었다. 비평모음집 『한국문학의 현단계』는 ‘창비신서’를 통해 1982년부터 1985년까지 해마다 한권씩 네 권이 나왔다. “한국문학의 자기인식을 위한 논문과 작가론을 비롯하여 문화예술 전반에까지 논의를 확대한 이 기획은 민족문학의 새로운 모색과 함께 참신한 신인 발굴로 침체된 문단에 큰 활력을 불어넣었다”는 것이 출판사의 자평이다.

1981년부터 1987년까지 다섯 번 나온 신작시집 중에선 『마침내 시인이여』(1984년 2월 출간)를 주목할 필요가 있다. 김지하 시인의 9년만의 신작 발표 장시 ‘다라니’가 포함된 17인 신작시집은, 이런 유형의 시집으로는 드물게 베스트셀러가 됐다. 제3차 ‘오늘의 책’에 선정되기 한다. 『마침내 시인이여』는 검은색 장정이 인상적이었다. 영인본 <창작과비평>의 표지를 떠올리는 『마침내 시인이여』의 검정 표지가 <창작과비평>의 ‘상속자’라는 측면과 암울한 시대의 분위기를 동시에 반영하여 암묵적 저항의 효과를 극대화시킨 점이 독자의 큰 호응을 끌어낸 것으로 보인다. 고등학교 2학년 진급을 앞둔 필자의 어린 기억에도 이 시집은 계절적으로나, 시대적 상황으로나 추위를 녹여준 까만색 장갑으로 훈훈하게 남아 있다. 상대적으로 신작소설집에 대한 독자의 호응은 낮은 편이었다.  

‘창비’ 사태와 출판 탄압
신작시리즈로는 늘어나는 독자의 독서 수요를 감당하기 벅찬 상태에 이른 데다 학원자율화 등의 유화국면을 틈타 창작과비평사는 1985년 10월 30일 부정기간행물 1호 <창작과비평>을 발행한다. 하지만 1980년 7월 강제폐간당한 계간 <창작과비평>의 제호를 쓰고, 계간통산 57호임을 분명히 하여 폐간된 잡지와 연계성을 나타냈다는 것을 빌미로 창작과비평사의 출판사등록취소조치가 내려진다(1985년 12월 9일).
출판사등록취소는 서울시가 총대를 멨으나, 정부당국의 의지와 입김이 작용한 것은 말하나 마나다. 당국은 등록 취소된 잡지의 무단복간이 ‘출판사 및 인쇄소의 등록에 관한 법률’ 제5조 2항에 저촉된 사실을 전례 없는 출판사등록취소의 명분으로 내세웠다. 하지만 여기엔 점증하는 민주화열기를 누그러뜨리려는 의도가 깔렸고, 창작과비평사에는 괘씸죄를 발동한 것이 사태의 본질이다.  

한편, 창작과비평사의 전격적인 출판사등록취소 이후, 그 취소의 취소를 촉구하는 국내외 인사들의 탄원이 잇따른다.
10여개의 선언 성명 가운데 범지식인 2,853명이 참여한 등록취소조치에 대한 건의문(1985년 12월 26일 발표)은, 규모와 참여자의 면면에서 가장 두드러진다. 문학 예술계는 586명이 참여해 그 비중이 가장 높거니와 문학관을 초월해 문인들이 망라돼 모처럼 범 문단적 단합을 이뤘다. 이듬해 1월 7일 ‘출판사 등록취소처분 취소청구’에 대한 행정심판을 청구하지만, 3월 29일 행정심판위원회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는다. 1986년 7월 25일 창작과비평사는 새로운 이름으로 출판사등록을 신청하여 8월 5일 ‘창작사’의 출판사등록증을 교부받는다.

정부당국은 출판사의 반성과 새로운 이름을 쓴다는 조건을 달아 당국의 선처라는 모양새를 갖추려 했으나, 창작과비평사의 ‘부활’은 민주진영의 단합된 힘으로 쟁취한 거나 다름없다. 국내외의 비난 여론과 대학생들의 잇따른 분신, 그리고 부천경찰서 성고문 사건으로 궁지에 몰린 군사독재세력은 체제위기에서 빠져나오기 위해서라도 자충수를 물릴 수밖에 없었다.
8개월의 악몽에서 벗어난 창작과비평사는 ‘창작사’의 이름으로 『바람 속으로』, 『피뢰침과 심장』, 『맑은 날』 등 시집 세 권을 펴낸다. 1988년 봄, 창작과비평사는 2년 만에 출판사 이름을 되찾는다. 계간 <창작과비평> 또한 복간호를 내면서 떳떳하게 ‘부활’한다. 6월 항쟁의 결과, 거꾸로 돌아가던 시계가 제시간을 찾으며, 사회 각 분야에서 원상회복이 이뤄진다.

출판계에 미친 6월 항쟁의 영향은 비단 10년 안쪽에서 있었던 착종과 왜곡의 복구에 그치지 않는다. 해묵은 숙제들을 해결하는 실마리를 제공했다. 납·월북 문인들이 해금돼 그들이 남긴 작품에 대한 출판금지의 족쇄가 풀리고, 이념도서의 제한적 허용은 이른바 ‘북한 원전’의 수용으로까지 비약한다. 금지된 영역을 다룬 책들이 봇물처럼 쏟아져 나오면서 출판계는 실로 오랜만에 활기를 띤다.

마지막 금기
지리산 파르티잔의 手記 『남부군』(두레, 1988)은 꽤 많은 독자의 호응을 얻었으며, 북한 원전이 다수 출간됐다. 하지만 그건 장마철 먹구름 사이로 살짝 얼굴을 내보인 ‘해님’일 따름이었다. 이내 공안정국의 한파가 불어 닥쳐 출판계는 다시금 움츠러든다. 판매금지도서 지정, 출판인 구속, 출판사와 서점에 대한 압수 수색이 마구 자행된다. 이런 와중에서 창작과비평사는 또 한번 시련을 겪는다.

<창작과비평> 1989년 겨울호에 실린 소설가 황석영의 북한방문기 『사람이 살고 있었네』가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를 받아 국가안전기획부에 의해 이시영 주간은 전격 구속되고, 출판사는 압수 수색을 당한다. 출판사 등록취소 사태 때와 마찬가지로 국내외의 비난여론이 들끓었다. 이에 힘입어 이 주간이 구속 24일 만에 보석으로 풀려나는 선에서 사건은 마무리된다.
황석영 방북기가 앞서 <신동아>에 게재된 터여서 이적성 있는 내용을 그대로 내보냈다는 공안당국의 주장은 법적 형평성에서 심각한 문제가 있었다. 그것을 꼬투리로 창작과비평사를 음해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아무튼 창작과비평사는 1980년대 내내 하루도 바람 잘 날이 없었다. 창작과비평사는 그렇게 단련됐다.

1980년대 후반의 베스트셀러 출판사
청하(『홀로서기』), 언어문화사(『마주보기』), 실천문학사(『접시꽃 당신』), 자유문학사(『추락하는 것은 날개가 있다』), 정신세계사(『성자가 된 청소부』), 진선출판사(『보여줄 수 있는 사랑은 아주 작습니다』), 을유문화사(『내 아들아 너는 인생을 이렇게 살아라』), 김영사(『내가 정말 알아야 할 모든 것은 유치원에서 배웠다』) 등이 80년대 후반의 베스트셀러를 산출했지만, 특히 나는 임선영의 『헬로우 미미』(1987)와 라즈니쉬의 『배꼽』(1990)을 펴낸 도서출판 장원을 기억하고 싶다.

1980년대의 출판은 졸속이고, 그때 나온 책들은 부실하다는 비판이 없지 않다. 하지만 나는 그렇게 평가하는 이들에게 되묻고 싶다. 1990년대와 최근의 출판은 얼마나 내실 있고 알찬지를. 1980년대 사회과학출판은 출판의 사회적 소임을 다했다는 측면에서 전무후무한, 다시 맞이하기가 거의 불가능한 우리출판의 르네상스다.

최성일 / 출판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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