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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년시론]‘탈도덕적 실용주의’와 지식인의 역할
[신년시론]‘탈도덕적 실용주의’와 지식인의 역할
  • 교수신문
  • 승인 2007.12.31 22: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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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는 우리나라가 건국 60주년을 맞이하는 뜻 깊은 해이다.
대한민국이라는 근대국가는 세워진지 불과 60년에 지나지 않지만, 그동안 정치·경제·교육·문화 등 사회의 각 부문에서 비약적인 발전을 거듭해왔다.

과거 제국주의 치하에서 식민지배를 경험했던 신생국으로서 이처럼 짧은 기간 내에 정치 민주화와 경제적 도약을 이룩한 나라는 지구상에서 비슷한 예를 찾아보기 어려울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압축적 성장의 그늘에는 아직 해결되지 못한 수많은 난제가 도사리고 있다. 이제 환갑을 맞이한 대한민국이 새로운 甲子를 성공적으로 열어가기 위해서는, 과거에 대한 성찰과 더불어 현재에 대한 점검 그리고 미래에 대한 전망이 동시에 요청된다.  

건국 이래 한국사회가 걸어온 삶의 궤적을 한 마디로 특징짓는다면 어떤 단어가 가장 적합할 것인가. 사람에 따라 각기 답이 다르겠지만, 필자는 ‘실용주의’야말로 현대 한국인의 가치관을 가장 잘 대변해주는 단어라고 생각한다. 원래 실용주의는 “진리를 판정해주는 기준은 실제적 유용성에 있다”라고 여기는 철학 이론을 말한다. 실용주의는 본질주의적 진리관을 거부하는 탓으로 현실적응력과 유연성이 뛰어나고 효용성을 창출하기에 유리하다는 장점을 갖는다.

건국 60주년과 ‘원칙없는 현실주의’의 後果
하지만 실용주의는 진리의 기준을 유용성에 둠으로 인해, 자칫하면 도덕과 원칙을 무시하거나 상대주의 또는 편의주의에 빠질 위험을 안고 있다. 실용주의는 그 안에 간직된 두 모습으로 인해, 때로는 현실의 개선이나 변화를 염원하는 ‘개척주의자’의 정신적 의지처가 되기도 하지만, 때로는 도덕과 원칙을 무시한 채 부와 권력을 획득하려는 ‘현실주의자’의 이념적 구호가 되기도 한다.

근대국가의 성립 이래 한국인이 걸어온 발자취는 실용주의가 지닌 두 측면, 즉 개척주의와 현실주의의 면모를 모두 지니고 있다. 전쟁으로 인해 폐허가 되어버린 자원의 불모지에서 OECD 10위권을 넘나드는 경제대국으로의 진입, 그리고 신분제적 전제왕정으로부터 의회민주주의로의 변화 등은 개선과 진보를
추구해온 실용주의적 태도의 결과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이렇게 화려한 겉모습의 속내를 들여다보면, 그 안에는 성장과 더불어 독버섯처럼 자라나온 정실주의·연고주의·기회주의·한탕주의의 어두운 모습이 고스란히 담겨있다. 도덕과 원칙을 무시한 채 오로지 자신과 집단의 이익을 위해 편의주의적으로 일관해 온 이러한 삶의 태도는 실용주의의 負面에 간직된 한계라고 여겨진다. 실용주의가 한낱 ‘속물적 현실주의자’의 자기변명으로 둔갑하지 않기 위해서, 진정한 실용주의는 도덕과 원칙을 도외시하지 않는
‘건강한 진보’의 이념임을 다시 한 번 상기해볼 필요가 있다.   

“유용한 것이 진리다”라는 실용주의적 진리관은 대중들 사이에서 마치 “도덕과 원칙을 무시하고서라도 성공적 결과를 낳기만 하면 된다.”는 식으로 이해되곤 한다. 하지만 도덕과 원칙을 무시하는 ‘탈도덕적 현실주의’는 탈법과 부조리를 양산함으로써 오히려 사회질서를 혼란에 빠뜨리거나, 강자의 약자에 대한 억압을 정당화함으로써 사회의 안정성을 해칠 수가 있다. 도덕과 원칙이 한낱 쓸모없는 관념 덩어리가 아니라 인간사회를 건강하게 유지하기 위해 매우 유용한 도구임을 인지할 때 실용주의는 비로소 진정한 진보의 이념으로 다가오게 될 것이다. 근래에 들어 “부자되세요.” 또는 “성공하세요.”라는 인사말이 널리
유행하고 있다. 나는 그간 다녀본 지구상의 어느 나라에서도 이러한 속물적 인사말을 주고받는 경우를 보지 못했다. 물론 중국에서는 설날이나 개업일에 “꿍시 화차이”(恭喜發財)라고 해 돈을 많이 벌라고 축원하기는 하지만, 설날이나 개업일이 아닌 경우에는 이런 인사말을 잘 쓰지 않는다.

왜 유독 우리나라에서만 이런 속된 인사말이 일년 내내 아무렇지도 않게 쓰이게 됐을까. 이런 현상은 우리사회에 팽배한 ‘속물적 현실주의’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고 생각한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돈만 많이 벌면 된다는 생각, 돈만 있으면 세상에 안 될 일이 없다는 생각, 그리고 돈이 곧 행복의 지표라고 여기는 생각이 우리사회에 만연해 있다. 돈을 받고 시험문제를 유출하는 고등학교 교사, 기간산업의 첨단기술을 외국에 팔아넘기는 연구원, 부하직원으로부터 세금을 상납받는 국세청장, 정치헌금을 위해 비자금을 비축하는 기업인, 그리고 유권자들을 부자로 만들어주겠다고 꼬드기는 정치인 등… 지금 우리사회는 바야흐로 물신숭배에 열광하고 있는 중이다.  시험문제를 유출하는 교사가 명품을 사려고 원조교제를 하는 제자를 나무랄 자격이 있는 것일까. 주주들의 돈을 빼돌려 비자금을 마련하는 기업인이 직원들에게는 삥땅치지 말라고 나무랄 자격이 있는 것일까. 부하직원으로부터 세금을 상납받는 국세청장이 국민들에게 납세의 의무를 강조할 자격이 있는 것일까. 그리고 온갖 탈법과 비리를 저지르며 小利를 탐하다가 어느날 문득 공적 영역의 수장이 된 정치인이 국민들에게 법을 지키라고 명령할 자격은 있는 것일까. 세상이 잘못돼도 나무랄 어른이 없는 것이 우리의 현실이다. 너도 나도 할 것 없이 온통 먼지와 때를 뒤집어쓰고 있으니, 누가 누구를 나무랄 자격조차 없다. 이것이 바로 지난 60년간 우리사회가 지향해온 ‘탈도덕적 실용주의’의 결과이고 ‘원칙없는 현실주의’의 後果이다.

부자가 되는 것은 좋은 일이다. 하지만 부자가 되기 위해서는 지켜야 할 원칙이 있고 걸어야할 正道가 있다. 원칙과 정도를 무시할 때 그 ‘부’는 도둑질한 장물이 되고, 그 ‘돈’은 강도질해서 얻은 노획물에 다름없게 된다. 돈 빼고는 아무런 중요한 가치가 없다고 여기는 사회, 그리고 물질지수가 곧 행복지수를 의미한다고 여기는 사회는 지독히 천박한 사회이다. 왜 연변의 동포들이 남한의 주민을 그렇게 애증어린 눈으로 바라보게 됐는가. 왜 중국을 비롯한 한반도 주변의 아시아인들이 한국을 그렇게도 혐오하게 됐는가. 그것은 바로 지난 세월동안 우리에게 길들여진 ‘탈도덕적 실용주의’ 때문이다.

‘탈도덕적 실용주의’는 결코 실용적이지 못하다. 자연에 대한 경외감을 망각하고 오직 개발과 남획의 대상으로만 파악할 때 자연은 반드시 앙갚음을 하기 마련이다. 인격의 존엄성에 대한 예의를 지키지 않은 채 인간을 단지 자본증식의 도구로만 파악할 때 사회는 노숙자와 부랑자로 넘쳐나게 될 것이며, 이들은 부자들에게 좋은 삶의 환경을 저해하는 위협적 존재로 부상하게 될 것이다.

도덕이 지켜지는 사회, 원칙이 살아있는 사회는 그래서 대단히 실용적인 것이다.
지난 1997년 금융위기를 겪은 이래 신자유주의의 확산과 더불어 우리사회는 약육강식의 장으로 변해가고 있다. 시장근본주의, 성장제일주의, 맹목적 개발주의, 물질만능주의는 기존의 神들을 제치고 가장 위대한 신으로 부상하고 있다.

實用이 失用으로 빠져들지 않으려면
이러한 광란의 질주를 제어하고 방향타를 제공해야 하는 임무를 맡은 대학이 오히려 그 흐름에 편승하려고 하는 것이 작금의 현실이다. 지금 대학에서는 도덕을 가르치는 대신 영어와 포도주 개론을, 그리고 원칙을 가르치는 대신 부자학과 재테크를 교양과목으로 가르치고 있다. 小知가 大知 위에 군림하고, 테크(tech)가 원칙(principle)을 압도하는 교육은 이미 ‘대학’(Great Learning)이 아니라 ‘소학’(petty trick)에 불과한 것이다.

어두운 시대를 밝히기 위해서는 등불이 필요하다. 모두가 눈을 감고 ‘원칙없는 현실주의’에 빠져들 때, 그리고 모두가 귀를 닫고 ‘탈도덕적 실용주의’를 외쳐댈 때, 그래도 도덕과 원칙은 살아있어야 한다고 말해줄 수 있는 자는 누구인가. 사람에게 영혼이 없으면 죽은 목숨이나 다름없듯이, 한 사회에 ‘깨어있는 지성’이 없다면 그 사회는 희망이 없는 사회이다. 조선시대의 鄭膺은 “선비는 한 나라의 元氣로서, 원기가 흩어지면 사람이 죽게 되듯이, 선비가 사라지면 나라도 망하고 만다”라고 했다.

명대의 黃梨洲 역시 이와 비슷하게 “한 나라가 무너지는 것을 망했다 하지 않고, 도의가 무너졌을 때 비로소 나라가 망했다고 한다”고 했다. 원칙없는 현실주의가 판을 칠 때 사회는 건강성과 안정성을 상실하고 ‘實用’이 아닌 ‘失用’으로 빠져들게 될 것이다. 건국 60주년을 맞이해 우리 사회가 새로운 도약을 하기 위해서는 도덕적 합리성과 역사적 성찰력을 겸비한 양심적 지성의 목소리가 늘어나지 않으면 안 된다.

이승환 / 고려대·철학과

필자는 미국 하와이 주립대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저서로 『유가사상의 사회철학적 재조명』(1998)과 『유교 담론의 지형학』(2004) 등이 있으며, 공저로 『논쟁으로 보는 중국철학』, 『감성의 철학』 등이 있다. 주요논문으로는 ‘주자 수양론에서 未發의 의미’ 등이 있으며, 동양철학의 ‘몸’과 ‘수양’에 대해 연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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