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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잡계 경제학 설명 미흡 …‘창발성’ 제시에 그쳐
복잡계 경제학 설명 미흡 …‘창발성’ 제시에 그쳐
  • 교수신문
  • 승인 2007.12.10 15: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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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확대서평]『부의 기원』 에릭바인 하커 지음 | 안현실·정성철 옮김 | 랜덤하우스 | 2007

경제학자 악셀 레이온후프트는 “經濟族의 삶(Life Among the Econ)”이라는 논문을 쓴 적이 있다. 스스로 인류학자의 입장을 취한 레이온후프트는 경제학자들을 경제족이라는 하나의 부족으로 상정하고, 그들의 삶을 냉소적으로 관찰했다. 경제족 사회에서 최고의 카스트는 ‘수리경제계층’인데, 이들은 철학의 내적 비밀이 교양 있는 인간, 즉 수학을 공부한 사람들에게만 알려져야 한다고 믿는다. 수요공급곡선을 연상시키는 X자 표시는 경제족의 신성한 토템이다. 경제학과 그 비판론자들 사이의 논쟁은 이제 과학적 타당성의 문제가 아니라 신념의 문제가 돼버렸다는 신랄한 비판인 셈이다.
문제가 무엇인가. 이 책의 저자 바인하커는 마침 레이온후프트의 다른 논문을 인용함으로써 대답의 단초를 마련하려고 한다. “현실세계는 ‘매우 복잡한 상황에 직면해 있는 정말 단순한 사람들’로 표현하는 것이 보다 정확할 텐데도 전통 경제학은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단순한 상황에 너무나 머리 좋은 사람들’로 모델화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는 경제학의 균형이라는 개념이 갖는 정태성과 폐쇄성에서 벗어나 역동적으로 상호작용하는 사람들로 이루어진, 동태적이고 개방적인 세상을 연구하자고 제안한다.

현실적합성과 모델링 접합이 관건
이러한 제안 자체로는 별로 새로울 것이 없다. 사회학은 이미 두 세기 전부터 동태적이고 개방적인 세상을 연구해왔고, 역동적으로 상호작용하며 살아 움직이는 사람들에 대한 연구라면 인류학을 따라갈 학문이 어디 있으랴. 물 분자의 움직임이 모여서 거대한 파도를 이루는 것과 같은 창발성에 대한 강조도 마찬가지이다. 에밀 뒤르케임은 이미 1895년에 개인들에게서는 발견되지 않는 새로운 성질이 집단 수준에서는 발견되는 창발성에 주목하면서 이것이야말로 사회학의 연구대상이라고 갈파했다. 문제는 “어떻게”이다. 경제학은 이른바 한계혁명을 통해 물리학 모델을 받아들이면서 현실적합성을 일정 부분 포기하는 대신 간결한 모델을 얻었고, 여타 사회과학은 끝내 현실적합성을 포기 못한 대가로 모델링을 미뤄왔다. 경제학이 초창기의 엄격한 가정들을 조금씩 완화하면서 괄목할 만한 현실적합성을 얻는 데에 성공한다면 사회과학의 판도는 팍스 이코노미카로 끝날 가능성이 높고, 비판자들이 경제학에 버금가는 수준의 모델링에 성공한다면 기존의 경제학은 급격히 설득력을 잃게 될지도 모른다. 양 진영의 노력은 조금씩 결실을 맺어가고 있지만, 아직까지 상대방을 설득할 수준에 이르지는 못한 것 같다.
바인하커가 소개하는 복잡계 경제학은 두 마리의 토끼를 모두 잡을 수 있을 것인가. 책의 1부에서 100쪽 이상 이어지는 전통적 경제학 비판은 재미있기는 하지만 새로울 것은 없다. 많은 기대를 하게 하는 2부 ‘복잡계 경제학’은 1996년에 나온 엡스타인과 액스텔의 『가상사회 키우기』의 내용을 상세히 소개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이 매력적인 책은 유일한 자원인 설탕이 불규칙하게 분포돼 있는 가상사회 ‘슈거스케이프’에 무작위적 유전자와 기대수명을 가진 행위자들을 분포시키고 그들 사이의 상호작용을 관찰하는 행위자기반모형(agent-based modelling)의 고전이다. 이들은 행위자들 사이의 섹스, 출산, 상속, 거래 등을 차례로 허용하면서 여러 가지 놀라운 창발적 결과들을 얻어내는데 성공했다. 능력과 자원이 무작위적으로 분포됐다는 의미에서 완벽한 평등사회인 슈거스케이프에는 얼마 지나지 않아 부익부 빈익빈 현상과 계층이 관찰되고, 사회 전체의 부가 증가하며, 인구증가와 감소의 사이클이 나타나고, 경제학 교과서에 나오는 것과 비슷한 수요공급 곡선이 관찰되고, 심지어는 금융기관까지 출현한다.
사회과학에서의 미시-거시 긴장관계에 조금이라도 관심이 있는 사람들에게 엡스타인과 액스텔의 이 연구는 대단히 흥미로울 수밖에 없다. 경제학의 엄격하고 비현실적인 가정을 전혀 필요로 하지 않으면서도 그 창발적인 결과는 우리가 경험하는 현실에 매우 근사한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매력에도 불구하고, 행위자기반모형은 사회과학적 ‘설명’인가 아니면 ‘컴퓨팅 파워’인가? 로버트 악셀로드는 1981년 ‘협동의 진화’라는 논문을 통해 죄수의 딜레마 게임이 반복된다면 이기적인 행위자들 사이에서도 협동이 지배적 전략으로 나타날 것이라는 점을 보인 바 있다. 협동의 진화 이후 15년이라는 시간은 컴퓨팅 파워의 눈부신 발전을 가져왔고, 이것은 슈거스케이프와 같은 고도로 복잡한 반복수행을 가능하게 했다. 슈거스케이프 이후 또 다시 10년이라는 세월이 지났고, 이제 우리는 엡스타인과 액스텔이 했었던 250명의 행위자 정도가 아니라 100만 명의 행위자를 놓고도 같은 실험을 PC에서 반복할 수 있다.
그러나 컴퓨팅 파워가 증가한 만큼 사회과학적 설명도 나아졌는가라고 묻는다면 대답은 부정적이다. 설명의 개선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아직까지는 통찰력 수준에 머무른다는 것이 솔직한 대답이다.
바인하커의 설명은 여전히 재미있지만, 2부와 3부를 읽으면서 독자는 조금씩 고개를 갸우뚱하게 된다. 이유는 두 가지이다. 첫째로, 바인하커는 복잡계 경제학의 원리를 체계적으로 소개하기보다는 슈거스케이프와 같은 흥미로운 사례들을 열거하는 방향으로 이야기를 전개해간다. 둘째로, 바인하커가 소개하는 사례들을 보면 복잡계 경제학과의 관련성을 부정하기는 어렵지만 과연 이것이 복잡계 경제학인지 의심스러운 경우들도 많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허버트 사이먼의 제한적 합리성, 리차드 쎄일러의 행동경제학, 악셀로드의 반복PD게임, 욘 엘스터의 합리적 선택이론, 브라이언 아서의 수확체증경제학, 스탠리 밀그램의 작은 세상, 마크 그라노베터의 약한 연계의 힘, 앨버트 바라바시의 척도 없는 네트워크 이론, 리차드 넬슨과 시드니 윈터의 진화론적 경제학 등이 모두 뭉뚱그려지면서 복잡계 경제학의 사례인 것처럼 소개되고 있다. 이들 중에는 브라이언 아서처럼 산타페 연구소와 뗄 수 없는 연구자도 일부 있지만, 상당수는 과연 이들이 복잡계를 염두에 두고 있었을까라는 의문을 제기하게 된다. 물론 그들의 연구가 사후적으로 복잡계 경제학에 영감을 주었으리라는 것은 분명하지만 말이다. 복잡계를 처음 접하는 독자들이라면 여전히 흥미진진하겠지만, 어느 정도의 기초지식을 가진 상태에서 더 진전된 복잡계 경제학의 발전상을 보고 싶었던 독자라면 실망스러운 대목이다. 더구나 앞서 지적한 바와 같이 복잡계 경제학이 과연 설명인가 컴퓨팅 파워인가라는 관점에서 본다면, 넬슨과 윈터가 결여하고 있던 컴퓨팅 파워를 이제는 가지게 되었으니 이제 한번 마음껏 놀아보자는 저자의 제안은 다소 진부하다.

사례들 엮어내는 경제학 논리없어
3부에서 바인하커는 이 책의 전체적인 기획을 이해할 수 있는 중요한 단서를 제공하는데, 그것은 바로 다음과 같은 언급이다. “내가 이 책을 통해 강조하려는 모델은 경제의 진화를 물리적 기술 공간, 사회적 기술 공간, 사업 계획 공간이라는 이 세 공간에서의 협동적인 진화의 산물로 본다.” 이 언급이 중요한 이유는 책의 끝부분에 무려 200쪽 가까이 차지하고 있는 4부의 존재 때문이다. 4부의 제목은 ‘기업과 사회에 대한 의미’이고, 예상할 수 있듯이, 복잡계 경제에서의 경영지침들로 채워져 있다.
복잡계 연구를 조금 들여다본 필자가 알고 있는 사정은 이렇다. 고도의 불확실성이 지배하는 오늘날의 시장상황에서 기업경영자들은 수많은 경영지침서들에 관심을 갖지 않을 수 없고, 그 중에서도 ‘창발적인 대폭발’을 예측하게 해준다는 복잡계 이론은 충분히 매력적이다. 그래서 관심을 가져보지만, 막상 그것을 기업경영에 적용하려고 하니 구체적으로 어떻게 해야 한다는 것인지 막막하기만 하다. 복잡계의 선도적인 연구자들은 자신의 연구를 진행하기만도 너무 바빠서 기업인들에게 지침을 일러줄 정도로 친절하지는 않다. 이 비어있는 시장을 바인하커는 대단한 재능으로 채워줬다.
이제 이 책에 대한 평가를 정리할 때가 되었다. 결론부터 말하면, 독자가 이 책의 의도를 오해하지 않고 잘 활용한다면 추천할 만한 좋은 책이다. 이 책은 연구서가 아니라 소개서이고, 궁극적으로는 상당히 고급스런 경영지침서를 지향하고 있다. 책의 앞부분에서 했던 현란한 약속에 비하면 막상 복잡계 경제학의 원리에 대한 설명은 미미하고, 새로울 것도 없다. 따라서 복잡계 경제학의 최첨단 연구를 보고 싶었던 독자라면 속았다는 느낌마저 가질 수 있을 것이다. 기본적으로 바인하커는 진지한 연구자라기보다는 해박한 지식을 가진 평론가에 가깝다. 참고로 필자가 JSTOR에서 검색한 결과 그의 논문은 한 편도 찾을 수 없었다. 하지만 기존 연구들을 잘 이해하고, 언뜻 서로 무관해 보이는 연구들을 하나의 스토리로 엮어내고, 그것들을 이해하기 쉬운 말로 독자에게 전달하는 저자의 재능은 탁월하고 그 덕에 이 책을 읽는 것은-적어도 중반까지는-꽤 즐거

운 경험이었다. 경제학의 역사와 복잡계 연구에 대한 소개를 원하는 연구자나 대학원생이라면 좋은 지적 경험이 될 것이다. 도대체 복잡계가 뭐기에 그리 시끄러운지 알고 싶은, 혹은 상아탑과 현실 사이에 긴밀한 연계가 있다고 아직까지 믿고 있는 기업인이나 지적인 대중에게도 좋은 독서거리가 될 것이다.

장덕진 / 서울대·사회학

필자는 시카고대에서 사회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이화여대 교수와 하버드대 방문교수를 역임했으며, 주요 저서로는 『경제위기의 사회학』, 『대한민국 파워엘리트』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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