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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국 유럽을 뒤집어 보면
제국 유럽을 뒤집어 보면
  • 최미화 미국통신원
  • 승인 2001.11.27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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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11-27 09:53:01
‘포스트콜로니얼 소트 앤 히스토리얼 디퍼런스’라는 부제가 달린 ‘유럽의 지역화하기’는 정치적 프로젝트이다. 저자 차크라바르티는 제3세계의 세계 자본주의 편입이 현실화된 현재에, 유럽 혹은 제1세계의 전지구적 지배를 전복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점을 인정하면서도, 이 불가능하지만 추구할 가치가 있는 프로젝트를 위해 체계화된 인식론적 근거를 마련하려는 힘든 작업을 시도한다. 그의 물음은, 자생적인 자본주의 이행 경험이 없이 식민주의, 근대성, 세계 자본주의에 동시에 맞닥뜨린 제3세계인들이 자신들의 견지에서 자신들의 과거를 수용하는 역사서술을 가능케 하는 이론적 기반을 어떻게 마련할 것인가, 그리고 그들의 역사는 유럽중심의 세계역사와 어떤 상관관계를 맺는가에 있다.
아홉 편의 에세이마다 느껴지는 저자의 인간적인 음성은 한국이 80년대의 치열한 논쟁들에서 겪었던 고뇌와 아픔과 힘을 상기시킨다. 그것은 바로 저자 차크라바르티의 작업이 인도에서 시작된 80년대 ‘저층인 연구(subaltern studies)’에 기반을 두고 있다는 데에 연유한다. ‘유럽의 지역화하기’는 이러한 ‘저층인 연구’의 논의를 수렴 발전시켜, 후기자본주의 이론뿐 아니라 인문사회 과학 전반에 걸친 심도 깊은 논의를 전개한다.
그렇다면 ‘유럽의 지역화하기’라는 말은 대체 어떤 의미인가. 차크라바르티에 따르면 ‘유럽’이란 하나의 가상적 실체이다. 물론 ‘유럽’은 현실의 유럽과도 밀접한 연관이 있지만, 우선적으로는 근대 제국주의와 제3세계 민족주의자들이 합작하여 만든 담론 안의 유럽이다. 따라서 이는 근대, 자유주의, 이성주의, 역사주의라는 개념과 떼어놓을 수 없으며, 보편적이고 객관적인 힘을 발휘하면서 제3세계의 담론을 지배하고 있는 어떤 것이다. 이 ‘보편적’ 유럽을 ‘지역적’으로 만들기란 다른 후기식민지론자들이 말하는 것처럼 전혀 불가능한 것인가.
챠크라바르티는 ‘유럽’ 혹은 세계 자본주의가 학문과 경제 양쪽에 걸쳐 현재의 세계사를 만들고 있는 현실을 인정하면서도, 주변부에서 끊임없이 이에 제동을 검으로써 아주 조금씩이나마 ‘유럽의 지역화’를 성취할 수 있는 희망을 키우자고 한다. 차크라바르티는 데리다의 방법을 토대로, 맑스와 하이데거를 종합하려 한다. 그는 자신이 맑스주의에 지대한 영향을 받았음을 밝히면서도, 역사주의의 객관화된 역사발전 법칙이 제3세계 식민주의의 자본주의 이행을 포착하지 못한 점과, 맑스의 ‘추상화된 노동’ 개념이 인간의 개별적 노동을 배제한 점을 비판한다.
저자는 맑스가 말하는 객관적 역사는 단지 유럽 중심의 역사 서술일 뿐이라고 규정하면서, 이를 제1의 역사(H1)라고 한다. 한편 이 객관적 역사 발전에 딱 들어맞지 않으면서 그 자체의 진행 과정을 거치는 제3세계의 역사를 제2의 역사(H2)라고 한다. 제1의 역사와 제2의 역사는 동시에 존재하고, 제2는 제1의 외부가 아닌 바로 그 내부에 있으며, 제1의 영향을 받으면서도 나름의 독자적인 발전과정을 지닌다는 것이다. 제2의 역사는 근대성의 잣대로 잴 수 없는 고유한 전통의 과거를 지니고 있기에, 근대적 정치적 주체로서의 제3세계인은 독자적으로 자신의 전통적 가치를 선별하는 결정력을 행사할 수 있어야 한다고 차크라바르티는 역설한다. 그는 바로 이 제2의 역사, 하이데거 식의 인간적 거주의 여지를 포착하는 삶의 역사가 제1의 역사에 제한적으로나마 제동을 걸 수 있다고 주장한다.
저자의 주장이 현실적으로 과연 어느 정도의 설득력을 가진 것인지에 대해서는 다양한 평가가 가능하다. 그러나 대부분의 제3세계 학자들에게서조차 사실상 불가능한 그래서 포기한 프로젝트로 여겨졌던 주제를 정면에서 입체적으로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 ‘유럽의 지역화하기’는 일정한 성과를 얻고 있다. 제3세계의 정치와 역사, 나아가 후기식민주의 문학이론을 연구하는 이들에게 이 책이 여러 가지로 주목받고 있는 이유이다.
최미화 / 미국 통신원·시카고대 박사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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