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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 분류체계 제시 … 상상력의 이론화에 발판 마련
이미지 분류체계 제시 … 상상력의 이론화에 발판 마련
  • 송태현 / 백석대·불문학
  • 승인 2007.12.03 13: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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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간프리뷰] 『상상계의 인류학적 구조들』 l 질베르 뒤랑 지음 l 진형준 옮김 l 문학동네

질베르 뒤랑의 주저인 『상상계의 인류학적 구조들』(1960)을 필자가 처음 접한 것은 대학원에 갓 입학하면서였다. 당시 우리 학과에는 이 책을 텍스트로 삼는 독회가 있었고, 이 책을 함께 읽고 토론하는 가운데 나는 실로 엄청난 지적 충격을 받았다. “어떻게 한 인간이 이렇게 방대한 지식을 소유할 수 있는가?” 뒤랑의 이 책에는 과연 거의 모든 학문과 예술이 녹아 있었던 것이다.

그의 다양한 지적·예술적 관심은 ‘인류학’(Anthropologie, Science de l’Homme)이라 부르는 것으로 수렴된다. 그가 주창하는 인류학(인간학)은 ‘인간 현상의 총체’를 다루며, 인류학자인 그에게 “인간적인 것은 그 어떤 것도 낯설지 않다.” 뒤랑은 기존의 ‘인문과학’(sciences humaines, sciences de l’homme)이 인간의 복잡한 현상을 절단하고 파편화시켜 접근하면서도, 역설적으로 그 분과된 개별학문의 방법론은 거의 한결같이 전체주의적이고 환원론적이었다고 비판한다. 뒤랑의 인류학은 인간에 대한 총체적이고 유기체적인 지식을 지향하고 있다.

뒤랑의 상상력 이론의 출발점은 바슐라르이다. 과학철학자로서 문학 및 예술 이미지에 꾸준한 관심을 기울여온 바슐라르는 이미지에 대한 고찰을 거듭할수록 상상력의 세계에도 질서가 존재한다고 믿게 된다. 이미지들은 작가의 자유로운 상상력 작용에 의해 형성된 것이지만, 그것들이 아무렇게나 조합되거나 전개되는 것은 아니다. 이미지의 형성에는 나름대로의 일관성이 내재해 있다. 상상의 날개를 타고 우리가 아무리 자유롭게 여행을 한다 할지라도 그 여정에는 일정한 규칙성이 발견된다는 것이다. 이렇게 바슐라르가 전개한 상상력 이론이 바로 ‘四元素論’이다. 바슐라르는 상상력의 영역에서 불, 공기, 물, 흙의 어느 원소에 결부되느냐에 따라 다양한 물질 상상력을 분류해주는 사원소론을 규정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믿는다.

뒤랑은 구조주의자들의 구조를 ‘빈 형식’, ‘무의미의 의미’라고 비판하고, 인류학의 초석을 신화로부터 찾는다. 그림은 19세기 프랑스 상징주의 화가 귀스타프 모로의 ‘파에톤’. 태양신의 마차를 몰다가 추락해 죽은 파에톤은 빛에 대한 동경, 상승과 하강의 신화적 원형을 상징하는 존재다(사진제공 문학동네).

질베르 뒤랑은 상상력에도 나름대로의 질서 혹은 범주가 있다는 바슐라르의 견해에 동의한다. 그러나 그는 사원소론이 사원소 이외의 다른 원소도 있을 수 있기에 ‘불충분’하고, 각각의 원소들이 애매성과 양가성을 지녔으며, 또한 물질 원소 자체가 그러한 면들의 궁극적인 동기를 해명해 주지 못하기에 ‘부적절’하다고 간주한다. 한편, 바슐라르가 사원소론을 온 인류 심성의 공동 기반에 근저를 둔 보편성을 지닌 체계라고 믿었음에 반해, 뒤랑은 마니교도들과 중국인들과 같은 비서구 문명권에서는 사원소론적 분류 방식이 아닌 다른 분류 방식을 채택하고 있음을 지적하며 스승의 사원소적 분류의 보편성을 비판한다.

그는 스승이 제시한 ‘사원소론’에 입각한 이미지와 상징의 분류를 해체하고 새로운 분류 방식을 제시한다. 뒤랑의 분류 방법은 바슐라르의 작업이외에 융, 엘리아데, 인도-유럽학자 조르주 뒤메질, 특히 반사학을 발전시킨 베흐테레프 등 많은 선구적 학자들의 방대한 작업을 수렴하고 있다. 또한 그는 『상상계의 인류학적 구조들』에서 이미지 분류 체계를 위해 非서구의 인류학적 문헌을 충분히 고찰하고자 노력함으로써 모든 문화권에서 나타나는 이미지와 상징에 질서를 부여하고자 했다.
뒤랑은 이러한 연구들을 길잡이로 삼아 원형들과 상징들의 거대한 분류 체계를 세운다. 그는 세 가지 지배 반사에 입각해 상상계의 주된 내용물들을 분열행태적 구조, 신비적 구조, 종합적 구조라는 세 가지의 구조 혹은 도식(schme, 본 번역서에서는 표상으로 번역)그룹으로 분류한다. 뒤랑은 이 세 구조를 두 개의 체제로 나눈다. 분열형태 구조는 이미지의 낮 체제에, 그리고 신비 구조와 종합 구조는 이미지의 밤 체제에 배속한다. 상상력의 소산물인 이미지들을 세 구조의 틀 속에 분류함으로써 뒤랑은 상상계에 보편성과 동일성이 존재함을 확인한다.

『상상계의 인류학적 구조』가 발간되던 시기는 구조주의의 시대였다. 구조주의 대표자인 클로드 레비스트로스의 유명한 저서 『구조인류학』은 이보다 2년 앞선 1958년에 출간됐다. 뒤랑은 레비스트로스의 ‘구조인류학’이 ‘구조’에 초점을 둔 표현인데 반해, 자신의 ‘인류학적 구조’는 인류학적 요소를 더 강조한 용어라고 말한다. 레비스트로스와 ‘구조주의 논쟁’을 벌였던 폴 리쾨르와 함께 뒤랑은 레비스트로스의 구조주의가 사실은 ‘형식주의’에 가깝고, 구조주의자들의 구조는 ‘빈 형식’에 지나지 않으며, 또한 구조주의가 말하는 의미는 ‘구문상의 배열’에 의해만 생기는 것으로서 이는 ‘무의미의 의미’에 지나지 않는다고 비판한다. 동시에 뒤랑은 공시태보다도 통시태, 즉 역사성에 우위를 부여한 리쾨르에 사상도 비판한다. 이 점에서 뒤랑은 공시태를 우위에 둔 레비스트로스 입장에 동조한다. 뒤랑이 보기에 역사나 통시태는 작품을 이해하는 데 핵심적인 요소가 아니다. 역사에 적절한 역할을 부여해 주는 것은 오히려 ‘신화’이다. 신화야말로 인류학의 초석이며, 역사는 바로 이 신화 위에 토대를 두고 있는 이차적인 것이다. 인류학이 인류의 공통적인 요소들을 우선 포착한 후에, 역사는 통시태를 구성하는 차이들을 포착해 내는 것이 올바른 순서라는 것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그의 상상력 이론은 그의 신화론(『신화비평과 신화분석』)으로 자연스럽게 연결된다.

이 책은 상상력 이론을 집대성한 ‘기념비적’ 저작이다. 어떤 의미에서는 뒤랑이 이미지 분류와 관련된 너무나 완벽한 체계를 제시했기에 그의 후학들은 이를 넘어서는 새로운 체계 작업을 감히 시도조차 하지 못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다. 이 책에서 제시한 체계에 대한 부분적인 비판은 있어 왔지만, 이 체계를 전면적으로 설득력 있게 부정하는 비판은 아직 존재하지 않는다. 그리고 이 책을 능가하는 체계, 다시 말해 상상계의 체계에서 ‘패러다임 전환’을 이룩한 새로운 체계도 아직 출현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 책을 상상력의 성경으로 볼 수는 없다. 이 책을 교조적으로 대할 필요는 없다는 말이다. 인간의 학문에서 그런 책은 존재할 수 없다. 그러나 이 책은 인간의 창조적 상상력에 관심이 있는 모든 이들에게 큰 유익을 끼칠 수 있다. 뒤랑이 세운 상상계의 인류학은 이미지와 상징들의 컬렉션이자 인간의 두려움과 희망의 일람표이다. 각자는 ‘이미지의 박물관’을 통해 예술 작품을 감상하는 가운데 자신을 깨닫고 또한 타인을 이해할 수 있다. 이러한 작업에 이 책은 매우 유익하게 사용될 수 있다.   

송태현 / 백석대·불문학

필자는 프랑스 그르노블대에서 ‘질베르 뒤랑의 문예비평관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주요 저서로는 『판타지-톨킨, 루이스, 롤링의 환상세계와 기독교』, 『상상력의 위대한 모험가들-융, 바슐라르, 뒤랑』 등이 있다.

 

 

 



함께 읽을 만한 책

 

□『상상력과 가스통 바슐라르』 I 홍명희 지음 I 살림 I 2005
이미지와 상상력 연구의 대가로 이성중심의 서구 사상 흐름을 전환한 바슐라르의 사상과 삶을 연구했다. 그의 물질적 상상력과 이미지 사원소론을 설명한다.

□『상상력의 위대한 모험가들』 I 송태현 지음 I 살림 I 2005
상상력, 원형, 신화에 논의의 초점을 맞추고 상상력 연구자들의 이론을 연구했다. 바슐라르와 뒤랑의 이론, 융과 뒤랑이 발전시킨 원형 이론을 살핀 후 신화에 대해 고찰하고 있다.

□『상상적인 것의 인간학』 I 진형준 지음 I 문학과지성사 I 1992
뒤랑의 책이 쉽사리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면 이 책을 참고하자. ‘질베르 뒤랑의 신화방법론 연구’라는 부제만큼 뒤랑 이론의 종횡을 해설·분석하고 있다.

□『신화비평과 신화분석』 I 질베르 뒤랑 지음 I 유평균 옮김, 살림 I 1998
서구 정신사를 지배해온 지적 흐름을 신화학의 입장에서 재조명한다. 특히 신화학적 접근을 가능하게 하는 비평과 분석의 틀을 체계적으로 정립하고 있다.

□『이미지』 I 유평근·진형준 지음 I 살림 I 2001
서울상상계연구센터, 한국상상학회는 그르노블대에서 뒤랑이 이끌고 있는 상상력연구센터의 한국판이다. 이곳의 수장인 유평근과 『상상계의 인류학적 구조들』의 번역자 진형준의 공동저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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