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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자인(Dasein)’ 번역어, 독자들 혼란케 한다”
“‘다자인(Dasein)’ 번역어, 독자들 혼란케 한다”
  • 구연상 / 한국항공대 연구교수·철학
  • 승인 2007.11.26 13: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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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확대서평_ 『하이데거와 신』 신상희 지음 | 철학과 현실사 | 2007

논문 모음집이라고 할 수 있는 이 책의 주제는 크게 세 갈래다. 첫째는 하이데거 철학의 핵심 문제인 존재문제(Seinsfrage)를 그 신학적 유래에서 해명하는 것이고, 둘째는 하이데거 철학의 구조를 여러 관점에서 조명해 보는 것이며, 마지막으로 고향상실의 시대에 사람이 사람답게 거주하기 위한 조건들에 대한 하이데거의 숙고를 되짚어 보는 일이다. 이 세 주제 모두가 기인한 방식으로 ‘신’이 관련돼 있다. 그래서 책 제목이 『하이데거와 신』으로 붙여진 듯하다.

먼저 첫 번째 주제에 대해 논해 보자. 저자는 하이데거의 존재문제가 종교적 삶의 구조에 대한 현상학적 분석에서부터 자라나왔다고 주장한다. 이에 대한 근거로 저자는 초대 그리스도교인들의 삶에 대한 하이데거의 분석이 존재문제로 이어지는 연관을 제시한다. 초대 교인들은 예수의 처형과 부활 그리고 재림으로 이어지는 종말론적 희망 속에서 자신들이 처했던 핍박과 고난의 현실 전체의 상황을 결단적으로 떠맡았다. 저자는 하이데거가 초대 교인들의 종말론적 삶을 인간 존재의 통일적 시간성이란 차원에서 구조적으로 해명함으로써 서양의 존재론이 철저히 인간이 처한 현사실적 삶의 차원을 망각해 왔다는 사실, 따라서 삶의 생생한 현실을 철학적으로 파악하기 위해서는 이러한 현실을 가리는 존재론의 역사를 해체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고 본다. 그런데 저자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하이데거의 사유의 길이 결국 초대 그리스도교인들에게 열어 밝혀졌던 근원적 진리에로 다가가기 위한 에움길이었다고까지 주장한다.

저자의 주장에 두 가지 문제점이 발견된다. 하나는 종말론적 기다림은 구원에 대한 기대로서 더 이상 그 어떠한 것도 기대할 수 없는, 즉 모든 가능성의 불가능성으로서의 죽음에로 앞서 달려가는 결단성과는 그 구조가 전혀 다르다는 점이다. 기다림은 유일신에 대한 절대적 믿음에 기초한 종교성의 회복, 즉 구원을 목표로 하지만, 결단성은 양심의 부름에 응답하면서 자신의 죄를 스스로 떠맡는 가운데 자신의 본래적 가능성을 선택해 나가는 것을 뜻한다. 또 하이데거의 철학을 “신앙에로 다가가기 위한 에움길”로 규정하는 것도 무리다. 하이데거의 사유의 길은 존재 자체에로, 또는 근원에로 나아가는 길이었지, 신앙적 삶에로 향한 것이 아니었다. 신앙의 길은 사유의 길로는 도달할 수 없는 막힌 길이다.

존재 자체를 향해 나아간 사유의 길
두 번째 주제라고 할 수 있는 하이데거 철학의 구조 해명과 관련해 저자는 하이데거의 방대한 저술 『철학에의 기여』의 체계를 압축적으로 요약해 보인다. 존재문제를 근원적으로 사유하는 하이데거의 철학은 존재망각을 일깨우는 일로부터 시작해 존재가 우리에게 건네는 말에 귀를 기울이고, 존재 자체에게로 도약해 뛰어들며, 존재의 밝혀진 자리에 가까이 머물고, 그 머무는 자리에서 울려 퍼지는 존재의 부름을 듣기 위해 다가가며, 그렇게 다가가는 자들에게 새로운 시원을 암시하면서 스쳐지나가는 궁극적 신의 눈짓을 기다리는 구조로 짜인다. 이는 하이데거 철학의 내재적 구조라 할 수 있다.

반면 하이데거 철학의 외적 구조라 할 수 있는 것을 저자는 니체의 허무주의와 관련해 제시한다. “신은 죽었다”는 말로 대표되는 니체의 허무주의는 서양 형이상학이 처해 있던 존재 망각의 결과, 달리 말해 존재를 끊임없이 아무 것도 아닌 것으로 배제해 온 사유의 결과이다. 반면 하이데거는 존재에 대해 묻기 위해 존재자 대신 無에 대해 “도대체 왜 존재자이며 오히려 무가 아닌가?”라는 물음을 물으며, 더 나아가 형이상학의 역사에서 나타났던, 존재의 다양한 규정들의 근원을 밝혀내려 한다. 이는 곧 하이데거의 철학적 구조가 형이상학과의 대결을 통해서가 아니라 서양 형이상학의 역사적 과정을 가능케 했던, 즉 존재 자체가 이러한 역사의 영역에서 빠져나가면서 동시에 자신을 드러내는 사건(에어아이크니스, Ereignis)을 통해서 결정이 난다는 것을 뜻한다.

마지막으로 이 책의 핵심 주제인 사람다운 居住의 조건에 대해 저자는 다각도의 분석과 충실한 인용 그리고 섬세한 논의를 인상 깊게 제시한다. 이 문제는 사람이 사람답게 살 수 있는 세계란 어떤 세계인지를 묻는 것이다. 저자는 오늘날 우리가 살아가는 세계는 사람답게 살아갈 수 있는 세계가 아니라고 단언한다. 저자는 우리가 삶의 고향을 잃어버린 원인이 모든 것을 부품으로 몰아세우는 현대기술에 있다고 보았다. 저자는 기술이 인간과 자연을 비롯한 모든 것을 황폐화시키고 있다는 하이데거의 주장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저자는 한 걸음 더 나아가 기술문명과 기술의 본질을 극단적으로 혐오하는 태도를 보이고 있는데, 이는 하이데거의 입장도 아닐 뿐 아니라 현실적으로도 지지되기 힘든 견해라고 본다. 한국의 경제현실을 고려했을 때 한국의 살길은 기술 발전이라고들 입을 모으고 있다. 저자가 인용하고 있는 하이데거의 논의들은 오늘날 우리의 삶의 맥락에서 너무 동떨어져 있다. 오늘날 기술은 자본이나 시장의 지배에서 자유로울 수 없고, 정치와 무관한 것도 아니다. 현대문명의 문제점을 지나치게 기술에로 전가하는 것은 사태를 너무 좁은 눈으로 보는 것과 같다.

저자는 인간이 자신의 본질을 잃지 않고 살아갈 수 있는 참다운 거주지를 하이데거의 사방세계 개념을 빌어 ‘이 땅 위에’, ‘하늘 아래’, ‘신적인 것들 앞에’, ‘죽을 자들과 더불어’로 규정한다. 초기에 ‘세계 속에 있음’에 의해 규정됐던 인간존재는 이제 네 개의 방역이 한데 어우러진 세계 속에 거주함을 뜻하게 된다. 사방세계 속에 거주함은 농부가 경작지를 보살피듯 땅을 돌보는 것, 날씨의 변화에 순응하듯 하늘을 받아들이는 것, 구원의 신이 깃들이기도 하는 신적인 것들을 기다리는 것, 죽음을 죽음으로서 죽을 수 있는 죽을 자들과 더불어 살아가는 것을 말한다. 거주함의 구체적 실천은 지음을 통해 이루어진다. 거주를 위해 지어진 사물은 ‘성스러운 신전’과도 같이 그 안에 사방세계가 하나로 접혀 들어가 있어야 한다.
그런데 하이데거의 사방세계에는 仁義禮智와 같은 도덕의 차원이 주제화되지 못하고 있을 뿐 아니라, 공동체의 올바른 구성 원리나 노동과 자본 등의 이론, 더 나아가 문화의 문제 등이 다루어지지 못하고 있다. 현대의 정보인 또는 기술인이 사람답게 살 수 있는 삶의 세계는 농부의 세계와는 전혀 다를 수밖에 없다. 저자가 우리에게 진정으로 참다운 삶의 자리를 제시해 주기를 원한다면 하이데거를 넘어서야 할 것이다.

‘터있음’과 ‘존재’, 언어적 유사성 없다
‘다자인(Dasein)’의 번역어 문제는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것 같다. 저자는 ‘다자인’을 ‘터있음’으로 새겼다. 반면 ‘자인(Sein)’은 ‘존재’라 옮긴다. ‘터있음’과 ‘존재’ 사이에 언어적 유사성이 없기 때문에 일반 독자에게는 이해의 혼란이 예상된다. 또 ‘다자인’은 독일 관념론의 경우 정신이나 의식에 의해 개념적으로 파악된 ‘있음의 양태’를 가리키기 때문에 ‘터있음’이라는 번역어는 타 전공자들에게 거의 받아들여질 수 없을 것이고, “현존재의 본질은, 그 존재자가 각기 자신의 존재를 자기의 것으로 존재해야 하는 거기에 있기에, 현존재라는 칭호는 순전히 이 존재자를 지칭하기 위한 순수한 존재표현으로서 선택된 것이다.”(『존재와 시간』 9절)라는 초기 하이데거의 입장을 따를 경우 ‘터있음’이라는 새김은 자신의 있음 자체(실존)를 스스로 떠맡아야 한다는 사태를 반영하기 어려워 보인다.

번역 논쟁에서 반드시 검토돼야 할 점은 번역어 자체의 의미이다. ‘터있음’은 ‘트여 있음’이나 ‘터가 있음’으로 풀이될 수 있는데, ‘트여 있음’은 ‘그는 생각이 트여 있다’에서처럼 어떤 것이 막혀 있지 않고 열려 있음을 뜻하고, ‘터가 있음’은 ‘사람은 다리가 있다’처럼 ‘터’가 누군가의 소유임을 나타낸다. ‘터있음’이라는 번역어가 성공적이 되려면, ‘존재’라는 일본어 번역어를 ‘있음’으로 바꿔야 할 뿐 아니라, ‘터’라는 우리말이 ‘여기’와 ‘저기’ 등과 어울려 쓰일 수 있는지를 신중히 검토해 보아야 할 것이다.

원전보다 어렵게 쓰인 암호해독문
마지막으로, 이 책은 하이데거의 철학적 낱말들 사이의 관계를 마치 낱말 맞추기를 하듯 또는 톱니바퀴가 돌아가듯 유기적으로 풀어내는 방식으로 쓰였다. 하이데거의 핵심 개념들 하나하나가 엄밀하고 세심하게 배열돼 있음에 틀림없지만, 전문적 학술 용어들이 인용이나 참고의 방식으로 끝없이 이어져 나온다는 것은 독자에게는 커다란 고통을 안겨준다. 이는 대화 중에 모르는 말들이 자꾸만 튀어나와 소통단절이 생길 때의 기분, 또는 암호풀이에 성공하지 못해 내용은 제대로 소화하지 못한 채 그저 낱말만 읽어간다고 느낄 때의 고통과 같다. 하이데거의 원전을 읽는 것보다 더 어렵게 쓰인 연구 논문들을 대한다는 것은 그리 유쾌한 일이 아니다. 저자는 하이데거의 원전 내용을 빠짐없이 충실히 전달하기 위해 해당 내용을 최대한 압축적으로 요약하고 있지만, 이렇게 하나의 문장 속에 관련 내용을 논리적이고 체계적으로 소개하려는 바람에 독서는 마치 암호해독이 되고 만다. 한국어 독자를 대상으로 쓴 글이라면 한국어 독자가 이해하기 쉽도록 써야 할 것이다.

구연상 / 한국항공대 연구교수·철학

필자는 한국외대에서 ‘공포와 두려움 그리고 불안’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주요 저서는 『번역가의 윤리』, 『후회와 시간』, 『감각의 대화』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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