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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중진단 : 학부제 어디로 가고 있나 5 - 학부제 기획자에게 듣는다
집중진단 : 학부제 어디로 가고 있나 5 - 학부제 기획자에게 듣는다
  • 손혁기 기자
  • 승인 2001.11.26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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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11-26 17:27:14
개혁은 대학 스스로…껍데기 벗고 ‘알맹이’ 찾아야

□ 약력 : 분석철학을 전공한 이명현 교수는 1974년 미국 브라운대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1977년부터 서울대 철학과 교수로 재직해왔다. 1994년부터 1996년까지 대통령직속 교육개혁위윈회 상임위원을 맡아 현 교육정책의 기틀인 5·31 교육개혁안을 작성하는데 참여하고, 1997년 8월부터 1998년 3월까지 제8대 교육부 장관을 역임했다.

“학부제는 사기다.” 이명현 전 교육부 장관(서울대 철학과)의 학부제에 대한 평가는 냉혹했다. 이 전장관은 교육개혁위원회에서 현재 학부제의 모태가 된 5·31 교육개혁안을 마련하고, 교육부장관 재직당시 학부제의 법적 근거가 된 모집단위 광역화를 고등교육법 시행령에 담았다. ‘기획자’로서 현재 학부제의 문제점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냐는 질문에 이 전장관은 “학부제라는 말은 쓰지도 않았다. 도대체 학부제가 뭐냐”며 오히려 반문했다. 당초 기획은 “대학모형을 다양화하고 학생들이 다양한 전공을 이수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었는데 현재는 “교육개혁의 정신은 사라지고, 형식만 남아 학생, 교수, 사회를 모두 망하게 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이러한 원인으로는 △대학의 몰이해 △관료의 잦은 교체 △통제하려는 교육부 △자율의식 없는 대학 △교수의 보신주의를 꼽았다. 서울대 연구실에서 도입배경과 취지, 그리고 진행과정에서 어떻게 왜곡됐는지를 들었다.

△학부제로 대학마다 혼란을 겪고 있습니다.
“학부제라는 말은 법령 어디에도 없어요. 학부제는 김숙희 전 장관 때 교육부에서 공문에 처음 사용했습니다. 그런데 이 ‘학부’라는 말이 패컬티(faculty)를 일본에서 번역한 것으로 개념적인 정의조차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장관할 때도 관료들이 대학교육과 관련해서 ‘학부제’라는 용어를 사용하기에 이를 금지시켰습니다.”

△ 그래서 교육부는 ‘모집단위 광역화’라는 말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장관 재직당시에 도입한 ‘그것’은 무엇입니까.
“5·31 교육개혁에서 하고자 했던 것은 대학모형의 다양화와 학생들이 다양한 전공을 경험할 수 있도록 전공이수학점을 낮추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나라 대학의 모형이 되는 서울대는 미군정이 독일식 상아탑 대학인 경성제대에 ‘농·공·상’을 위한 전문교육을 포함해서 미국식 주립대학형태로 만든 것입니다. 우리의 대학이라는 것이 말하자면 대학 비슷하게 만든 것이지만 이는 정보화 사회, 지식중심 사회로 변하는 새로운 문명체계에 맞지 않아요. 21세기에 대비하기 위해 다양화된 대학을 만들어 가는 것이 고등교육개혁 방향입니다.”

△하지만 장관재직당시 “모집단위를 복수의 학과 또는 학부별로 정한다”고 고등교육법 시행령을 개정한 것이 학부제의 근거가 되고 있습니다.
“1995년 이후부터 교육법을 정비해왔습니다. 여기에 교육개혁위원회가 내놓은 5·31교육개혁안을 담았지요. 그런데 이 모법에서 법의 시행기간을 1998년 3월1일부터라고 못박아 두었습니다. 결국 국민의 정부 출범을 며칠 앞두고 1998년 2월말에서야 시행령을 만들었지요. 이 과정에서 교육개혁위원회가 권장한 광역화와 관련해서 적어도 학생들에게 전공선택권만은 줘야 한다는 취지에서 집어넣었습니다. 그냥 두면 대학이 스스로 안 하니까. 그러나 여기서도 대학의 교육상 필요한 전공은 독립하도록 했습니다. 대학모형을 다양화하기 위해서 최소한의 방향만 정한 겁니다.”

△하지만 교육부가 학부제를 획일적으로 추진하면서 부작용이 심화되고 있다는 게 대학들의 입장입니다.
“강제한다면 그것은 교육부가 법을 위반하고 있는 겁니다. 법령은 대학별로 학칙을 바꿀 수 있도록 규정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대학이 하나도 안 고치고 있지요. 대학과 관련해서 지금은 대부분 승인사항이 아니라 보고사항입니다. 고등교육법은 풀어놓았는데 대학이 정부만 쳐다보고 있지요. 교육개혁의 기본적인 아이디어도 ‘대학개혁은 대학 스스로 해야 한다’는 겁니다. 교육부는 할 능력도 없고, 해서도 안됩니다. 대학 스스로 아이비리그모형, 주립대학모형, 21세기 모형을 찾아야 합니다.”

대학모형다양화가 기본취지

△그러면 지금의 학부제는 무엇입니까.
“대학과 교육부는 학부제라는 이상한 마술에 걸려 있습니다. 눈 가리고 아웅하고 있는 거죠. 학부제가 제대로 되려면 전제조건들이 있는데 이를 안 했어요. 대학들은 그걸 안하고 과 2개만 합쳐서 학부라고 하는데 이것은 한마디로 사기입니다. 학부제를 하면 교육부에서 지원한다고 하니까 엉터리로 하고 있는 겁니다.”

△기본적인 전제는.
“전문대학원제, 법학·의학·경영·언론·행정 등 직업과 관련한 과목들은 대학원 과정으로 올려야 합니다. 학부과정에서는 없애야 하지요. 미국에서도 직업교육에 치중하는 대학들만 학부과정에서 이러한 전공을 가르칩니다. 다음으로 사회에서도 학사 때 전공에 대한 인식을 바꿔야 합니다. 지금 우리나라에서는 입학점수에 따라서 대학과 학과가 한 줄로 서열화 돼 있습니다. 그래서 기업에서는 전공과 관계없이 똑똑한 학생이라고 생각하면서 인기전공을 이수한 사람을 뽑지요. 그러나 이는 대학과 사회가 모두 망하는 길입니다. 늘 이야기하는 것이 ‘대충 뽑아서 잘 가르치자’는 겁니다. 지금은 ‘엄격히 뽑고 아무렇게나 가르치자’는 식이지요. 이건 ‘지대’를 받아먹는 겁니다. 대학이 간판으로 계급을 만들고 불로소득을 취하는 것이지요. 1∼2점차로 서열화 되는 한 대학교육은 가망이 없습니다.”

△도입당시 취지는 어떤 것이었습니다.
“학생들에게 다양한 전공을 경험하게 하자는 겁니다. 연계전공, 복수전공이 제일 필요한 분야는 응용학문입니다. 응용학문의 생성 소멸주기는 점점 빨라지고 있어요. 공학분야는 교수되고 10년이 지나면 대학원생보다 모르는 경우도 있지요. 그래서 대학에서는 수학, 물리 등 기본을 갖춰야 하는 것이고, 문과대도 철학, 문학, 역사처럼 인간에 대한 기본을 배워야 합니다. 기초가 없으면 이후에 응용도 모릅니다. 전공을 묶을 때는 응용학문과 기초학문을 결합해야 합니다. 학생들은 취업이 잘되는 응용학문으로만 가려고 하는데, 바람직하지 않은 현상이지만 어떻게 하겠어요. 그러니까 대학은 음식을 만들 때 먹기 좋은 것과 영양가가 있는 것을 잘 섞듯이 해야 합니다. 이는 대학본부의 권한인데 교수들에게 미뤄놓으니까 자기전공 학생이 없어질까 봐 필요 없는 싸움을 하는 겁니다. 고만고만한 것끼리 묶어놓으면 학생들이 어디 가겠냐는 거죠. 지금처럼 커트라인이 비슷한 것끼리 묶는 것은 연계전공이 아닙니다. 이렇게 섞을 바에는 차라리 과로 모집해서 전공점수만 낮춰주는 게 낫습니다“

△취득학점을 낮추면 다양한 전공을 경험하겠지만, 전공교육이 부실화될 우려도 있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대학개혁에는 교과과정 개편이 선행돼야 합니다. 이걸 안 하니까 그런 지적이 나오지요. 지금은 학사과정을 굉장히 세분화 해 놓았습니다. 지금의 학부는 대학원의 전공과정을 학사과정에서 가르칩니다. 그러다 보니 강의 내용이 비슷비슷해지고, 교육체계도 없지요. 학생들이 학점 받기는 좋지만 이건 교과목 거품입니다. 미국에서는 대학 물리학이 1학기면 끝나요. 공학분야도 교과과정이 제대로 편성되면 학부과정에서 10개 강좌 이상을 들을 필요가 없습니다. 전세계에서 철학의 한 분야를 떼어내 미학과를 둔 곳은 서울대밖에 없습니다. 전면적인 교과과정개편이 없으면 교수들이 주장하는 ‘전공교육부실’이 맞지요. 예외적으로 어학분야에는 특별한 대책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이도 교육방법측면에서 보완돼야지요.”

연구 안하는 대학 책임 커

△그러면 어디서부터 잘못된 겁니까.
“학부제를 진행하려면 제도의 특성에 대해서 잘 알아야 합니다. 이를 위해 관료들을 대상으로 세미나도 하고 훈련을 많이 했어요. 그런데 정권이 바뀌고 나서 담당관료들도 죄다 교체됐지요. 뒤에 온 관료들은 사전 지식도 없이 행정적인 것들만 처리하다보니 부실하게 된 겁니다. 지금은 장님이 길을 인도하는 격이지요. 대학도 마찬가지. 장관 당시에 전국의 총장들을 대상으로 학부제에 대해 2시간 동안 설명했는데 이후에 질문을 받아보니 대부분 이해를 못하고 있더군요. 교무처장, 기획실장들을 대상으로도 교육했지만 마찬가지였어요. 한 열번은 더했어야 돼요. 그런데 대학에서도 이들마저 바뀌었지요. 이러니 제대로 될 리가 있나요. 대학은 대학 스스로 외국 대학을 견학하고, 연구도 해야 합니다. 그런데 지금은 교육부 심사에 맞춰 ‘작문연습’만 하고 있지요. 이것은 교육개혁이 아닙니다.”

△앞으로 어떻게 진행돼야 할까요.
“총을 분해·결합 할 때도 순서대로 해야합니다. 5·31 교육개혁은 부속품만 크게 1백개 입니다. 순서대로 하지 않으면 맞춰지지 않지요. 무엇을 먼저 하느냐에 따라 될 수도 있고 안될 수도 있어요. 우선 형식적인 것을 실질적인 것으로 바꾸어야 합니다. 교육의 균형발전도 중요하지만 사회와 학생이 요구하는 것은 할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안 할 이유가 없지요. 다만 학생들이 몰리는 것을 조절하는 기술적인 장치를 마련해야 합니다. 기본점수를 제한한다든지, 낙제생을 많이 만들어서 학사관리를 철저하게 해서 학생들 스스로 포기하도록 해야 합니다. 전공 선택권을 크게 해치지 않으면서도 할 수 있는 방법들은 여러 가지입니다. 그리고 모든 개혁에는 희생과 혼란이 따르기 마련이지요. 정치적 설득력, 도덕적 설득력으로 아픔을 감싸야 합니다.”
손혁기 기자 pharos@kyosu.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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