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재서 이화여대 교수(중문학)는 동양권에서 대표적인 에세이로 노신의 ‘雜感文’을 든다. “隨感文이라고도 하는데, 여기에는 유머, 위트, 신랄한 풍자가 어우러져 있고, 때로는 이런 형식으로 서로 논전을 벌이기도 했다. 동아시아의 전통 문인들은 ‘筆記體’라는 형식을 즐겨 썼다. 설화, 시사평 등 자유로운 내용을 담는 글쓰기였다. 漫錄, 雜記 등도 눈여겨봐야 한다. 이런 글들은 평범한 일상에서 논변까지 포괄하고 있다.” 정재서 교수는 논문 글쓰기에 대해서 이렇게 평가한다. “서구의 논문중심주의는 객관성과 논리적 형식에 얽매여 있다. 그런 방식과 규칙을 따르게 되면, 그 세계관으로 움직이게 되고 삶이 그렇게 규정될 수도 있다. 이럴 때 우리의 삶과 문화에서 많은 부분을 놓치게 될 수 있다. 여기서 벗어나 삶의 전 범위에 종횡무진으로 나아가는 산문 형식이 필요하다.”
이남호 고려대 교수(국어교육)는 넓은 의미로 보면 인문학적 연구 대개가 에세이에 포함될 수 있다고 말한다. “철학이든 문학이든 모두 에세이이며, 사회현상을 담는 것도 에세이이다. 에세이는 형식적이고 폐쇄적인 논문에 비해 잡문에 가깝다.” 그가 꼽는 대표적인 에세이는 이렇다. “서구 계몽시대의 에세이들, 옛 선비들의 철학적 에세이, 조지훈의 에세이, 최근에 와서는 김우창의 철학적, 문화적 에세이들이 돋보인다.”
김상환 서울대 교수(철학)는 철학사에서 위대한 변화를 일으켰던 것은 바로 에세이라고 말한다. “데카르트의 ‘방법서설’이 대표적이다. 니체는 ‘비극의 탄생’을 쓰고 대학에서 쫓겨났다. 기존의 논문 글쓰기는 전문적인 이론, 규칙, 규범, 전통을 따른다. 반면 에세이는 순진하고 소박한 상태의 자기로 돌아가는 글쓰기다. 에세이를 통해 기술적이고 인위적인 글이 아니라 본래의 자기로 돌아가는 것, 자신의 인격 자체로 돌아간다. 맑스의 ‘공산당 선언’ 등 예언적인 글도 에세이로 볼 수 있다. 에세이야말로 예언적인 내용을 담기에 가장 좋은 형식이 될 것이다.” 김상환 교수는 에세이의 필요성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연구자들은 에세이를 쓸 때 논문 쓸 때와는 마음과 태도에서 달라진다. 전복적인 글은 대개 에세이 글쓰기였다. 이에 비해 논문 글쓰기는 패러다임 안에 침잠해 있다. 한국 사회에서 에세이 형식이 논문에 비해 보다 설득력이 있을 것이라 본다. 문사철을 구분치 않으며 질박한 미학을 추구해온 오랜 전통이 그렇다.”
이정우 철학아카데미 원장은 에세이 자체보다 글쓰기의 다양성을 강조한다. “논문, 강의록, 일기, 대화 등 다양한 글쓰기의 형식이 공존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중요한 것은 그 사람이 갖고 있는 생각의 알맹이이다. 그가 생각하는 주제에 가장 적합한 글쓰기 형식을 찾는 것이 필요하다.” 철학계에서 새로운 글쓰기를 배타적으로 보는 관행에 대해 묻자 “과연 어떤 것이 철학적인 글인가. 외형적인 자기 잣대로만 세상을 보는 것은 위험하다. 그런 기준으로 본다면 플라톤은 철학자가 아닐 것”이라 답한다.
권희철 기자 khc@kyosu.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