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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비평] 한국영화의 이상기류
[문화비평] 한국영화의 이상기류
  • 박명진 / 영화평론가
  • 승인 2001.11.26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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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11-26 17:09:09
박명진 / 영화평론가

그람시는 텍스트에 있어서 ‘재미’는 이미 예술의 범주를 넘어 문화의 한 요소가 된다고 말한다. 그는 큰 성공을 거둔 상업문학의 중요한 가치를 발견했는데, 이른바 대박을 터뜨린 작품은 그 자체로 ‘시대의 철학’을 보여주며 ‘침묵하는’ 다수에게 우세한 정서와 세계관을 나타내는 지표라고 지적한다. 동시에 그람시는 ‘도덕적’ 재미가 없이는 이러한 예술이 민중의 아편이나 마취제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상기시키는 것을 잊지 않았다.
최근 임순례 감독의 ‘와이키키 브라더스’와 정재은 감독의 ‘고양이를 부탁해’는 평론가들의 극찬 속에 개봉했지만 ‘조폭 마누라’와 ‘킬러들의 수다’의 폭발적인 흥행에 밀려 쫓기듯이 막을 내렸다. 평론가들과 영화 관계자들은 자신들의 평가가 극장으로 연결되지 못한 현실에 당황했고, 관객들은 이들의 기대를 비웃듯이 철저하게 자신들의 욕망을 따라갔다. 평론가들이 대중의 취향과 동떨어진 고답적이고 오만한 자기 만족에 빠져 버린 것인가, 아니면 한국 영화의 관객들이 욕망을 자신 있게 추구하고 있는 것인가.
악화가 양화를 구축하듯이, 자본주의와 대중문화가 발전할수록 작품성 있는 영화보다는 흥행성 있는 영화가 대중의 환호를 받기 마련인 것. 기실 이러한 현상은 특별하게 생소한 것도 놀랄 만한 것도 아니다. 어찌 대중의 大河와 같은 욕망의 흐름을 한낱 지식인들의 알량한 잣대로 거스르게 할 수 있으랴. 조폭 영화에 대한 모방 범죄의 발생이나, 흥행 영화에만 몰리고 있는 관객들의 저속 취미를 지적하는 것은 효과적이지 않다. 이제 이 시대는 모든 엄숙함과 비장함을 떨쳐버린, 그야말로 소위 자유와 다양성을 구가하는 시대가 아니던가. 그 어떤 멋지고 웅장한 거대담론도 우리들을 환원시키지 못하는 세상이 우리 앞에 버티고 서있다.
그러나 우리는 그람시의 말투를 빌려 다음과 같이 물어보아야 한다. 침묵하는 다수가 보여주는 이 시대의 철학은 어떤 도덕을 담지하고 있는가. 대중은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가 문을 통해 들여다 본 것처럼 ‘우리가 꿈꿀 수 있는 것보다 더 아름답고 사랑스러운 정원’을 원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 시대의 관객들은, 문을 통해 판타지의 세계로 뛰어들어간 앨리스가 목이 길어지면서 외친 말, “점점 더 나쁘게 되고 있어. 이제 나는 세상에서 가장 긴 망원경처럼 늘어나 버리고 말았어. 내 발들아, 안녕!”을 무심하게 중얼거리고 있을 뿐이다. 그리하여 이 시대의 욕망은 있으되 철학은 생존해 있지 않다고 강변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와이키키 브라더스’와 ‘고양이를 부탁해’의 조기 종영을 안타깝게 여긴 쪽에서 연장 상영을 추진하고 있는 사태는 일종의 희비극(tragicomedy)에 속한다. 그것은 골리앗을 향한 다윗의 돌팔매질, 또는 ‘모던 타임즈’에서 기계 톱니바퀴에 낀 채 지어 보이는 찰리 채플린의 눈을 상기시킨다. 실직한 30대 악단 멤버들의 쓸쓸한 연주 소리나, 지방 여상을 졸업하고 막막한 세상을 맞이해야 하는 소녀들의 서늘한 눈초리는 이미 이 시대 대중의 코드가 될 수는 없을 터. 어찌 과묵하고 진지한 카메라의 시선이 전망 부재의 대중들에게 감정이입될 수 있겠는가. 현실과 일상에 대한 구질구질한 내러티브와 미장센은 가볍고 매혹적인 재미에 기선을 제압 당했다. 고개 숙인 30대 실직자들과 10대 소녀들의 쓸쓸한 목소리는 조폭과 킬러들의 수다 속에 묻혀 버린다.
만델이 ‘즐거운 살인’에서, 현대 범죄 소설에서 개인적인 복수와 폭력을 이상적으로 그린다는 것은 극도로 불길한 징조이고, 이러한 상상력의 산물들이 폭력의 가공할 만한 확산에 부합할 뿐더러 폭력을 정당화한다고 경고한 것을 여기에서 강조할 필요까지는 없다. 만델의 완고한 사회주의적 비전은 또 하나의 도덕적 견결성으로 귀착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보다는 차라리 여러 가지 경제적, 정치적 위기가 심리적 위기를 유발하고, 이 심리적인 위기가 재현의 위기를 불러오는 국면에 시선을 돌리는 것이 나을 것이다. 영화가 보수적 이데올로기로 재현될 때 문화적 표상으로서의 국민의 심리적 통합성이 ‘대상의 견실성’을 상실해 버리기 쉽다.
한국 영화, 그리고 한국 관객의 무의식은 제어장치가 풀린 수레처럼 욕망의 비탈길을 내달리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앨리스의 머리와 발이 멀어질수록 앨리스의 정체성이 ‘은유’의 동일시 욕망을 닮아가듯이, 우리 관객은 ‘감상주체-텍스트-현실’의 삼각관계를 인접성의 ‘환유’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끝없이 지연되는 판타지로 소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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