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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장의 퇴행적 확장’과 ‘마르크스의 귀환’
‘시장의 퇴행적 확장’과 ‘마르크스의 귀환’
  • 백승욱 / 중앙대·사회학
  • 승인 2007.11.05 14:19
  • 댓글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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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확대서평] 『대중들의 공포』 엔티엔 발리바르 지음 | 최원․서관모 옮김 | b | 2007

발리바르는 마르크스주의를 전화시키려 한 노력으로 한국 사회에 잘 알려져 있는 정치철학자이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발리바르에 대한 관심은 표면에서 다소 사라졌던 것으로 보인다. 흥미롭게도 이것은 마르크스에 대한 관심이 표면에서 다소 사라졌던 것과 궤를 같이 한다. 마치 ‘마르크스 이후’ 시대에 들어선 것처럼 마르크스에 대한 관심은 줄어든 것처럼 보였는데, 단지 마르크스 아닌 것을 이야기하기 위해 가끔씩 마르크스는 초청받아 무대에 등장하곤 했다.

그렇게 마르크스가 무대에서 사라진 데는 마르크스와 무관하지만은 않던 환상들의 붕괴가 작용했고, 그와 더불어 마르크스도 무대에서 끌려 내려갔던 것 같다. 그러나 우리가 신자유주의 시대라고 부르는 현 시대의 특징들이 어느 정도 전면적으로 드러나면서, 결국 마르크스 없이 갈 수 없다는 것은 좀 더 분명해졌고, 이제는 ‘환상 몰락 이후’의 마르크스가 귀환하고 있고 또 귀환해야 할 때이다. 발리바르의 작업에 다시 주목해야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는데, 이렇게 귀환한 마르크스는 이제 좀 더 분명하게 아포리아들과 모순들을 가득 안고 있는 마르크스이며, 그렇기 때문에 노력 여하에 따라서는 오히려 현 시기의 문제를 풀고, 그 난점을 통해 발전이 가능한 마르크스가 될 가능성은 더 높아졌다.

왜 아포리아와 모순인가
발리바르의 『대중들의 공포』에서 다루는 쟁점은 매우 포괄적이다. 발리바르는 이런 쟁점들과 전면적으로 대결해, 이를 통해 어떻게 우리가 마르크스라는 계기의 강점을 충분히 살려, 그것을 통해 우리 시대의 모순과 파국을 돌파해 갈 계기를 찾아낼 수 있는지의 고민을 제기하고 있다.

우선 시대에 대한 이야기부터 해 보자. ‘세계화’라는 시대 규정은 무엇을 말해 주고 있는가. 우리는 시장의 세계적 지배와, 또한 전례 없는 세계적 배제와 불평등의 증대라는 이야기를 동시에 듣고 있다. 미국헤게모니 이후 세계체계의 특이성이라 할 이 현상의 핵심적 특징은 무엇인가. 발리바르는 이것을 세계가 ‘문턱’을 넘어선 것으로 설명하며, 이를 ‘시장의 퇴행적 확장’으로 이야기한다. 현 시기 세계는 자본이 세계의 구석구석을 남김없이 자본 축적 속에 포섭해 가는 것이 아니라, 이제 자본은 축적의 공간을 선별적으로 장악하고, 나머지의 공간은 배제(그리고 극단적 폭력) 속에 던져 놓고 있다. 이 버려진 ‘배제’의 공간은 자본-노동이라는 적대의 구도조차 성립되지 않는 공간이다. 그리고 이런 배제의 공간은 외적으로만 확대되는 것이 아니라, 내적으로도 파고들어 지금까지의 노동포섭의 전략을 근본적으로 전환시킨다. ‘민족·사회 국가’의 해체는 이렇게 이중적으로 진행된다. 동일화와 인종주의의 문제가 전례 없이 중요해지는 정세는 이런 맥락에서 이해된다.

그렇다면 이런 상황에 대해 우리가 알고 있는 지금까지의 마르크스주의는 적절한 대응을 할 수 있는가. 노동의 인간학과 노동의 정치만으로 이 쟁점에 마주할 수 있는가. 발리바르가 시민인륜의 정치라는 ‘타율성의 타율성’의 정치를 강조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이것 없이는 정치의 다른 영역의 작동은 불가능하다. 이는 동일화와 탈동일화의 과정이 동시에 사고돼야 하는 정치이며, 여기서 이를 가능하게 하는 정치적 ‘매개’와 ‘헤게모니’가 강조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발리바르가 국가라는 ‘매개’가 강조되는 ‘허구적 보편성’을 ‘봉기’라는 ‘이상적 보편성’과 반드시 결합시켜 사고하려는 데서도 보이듯이, 이런 시민인륜의 정치는 그 자체로 성립될 수 없고 다른 두 가지 정치와의 정세적 절합 속에서만 의미를 갖게 된다. 여기서 ‘정치의 자율성’과 ‘정치의 타율성’이라는 다른 두 가지 정치가 문제가 된다. 인종주의의 문제가 예외적이고 특수한 상황이 아니라 보편성의 차원으로 확대되어 사고돼야 한다는 주장이 나오는 이유도 이런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정치의 자율성은 ‘인민의 해방은 오직 인민 자신에 의해서’라는 ‘해방의 정치’의 주장이다. 이는 근대정치가 늘 열어놓지만 동시에 늘 억압하려 하지 않을 수 없는 모순적 쟁점이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이것이 ‘자유로운 평등’의 주장에서 알 수 있듯이, 그 계기가 외부로부터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이미 근대정치의 틀 자체 속에서 전복의 계기들을 가지고 있는 ‘내적 전화’라는 쟁점으로 제기된다는 점이다.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발리바르가 강조하는 마르크스의 특이점은 이런 정치의 자율성에 대한 강조를 기본으로 하면서도, 동시에 그 정치의 공간이 다른 곳에, 즉 구조에(또는 ‘경제’에) 있음을 강조한다는 점에서 정치의 타율성을 강조하고, 이는 ‘변혁’이라는 사고로 이어진다는 점이다. 여기서 우리는 두 가지 점에 특히 주목할 수 있는데, 첫 번째는 노동의 모순을 사고하는 데서 정치경제 비판의 핵심으로서 ‘정치와 경제의 단락’을 강조하고 있다는 점이다. 시민인륜의 정치에서 ‘노동의 인간학’의 한계를 지적할 수는 있지만, 그럼에도 동시에 노동의 인간학의 핵심을 버릴 수는 없는데, 그 이유는 노동가치설 때문이 아니라, 적대라는 정치적 의념이 노동과정에 도입되고, 여기서 노동과정의 내부적 분할과 그에 대한 정치적 과정의 작동이라는, 즉 노동과정의 적대와 국가라는 문제가 서로 뗄 수 없는 관계 속에 있다는 점을 강조하기 위해서이다. 이 때문에 변혁은 노동과정의 내적인 전화(그것은 지식노동과 육체노동 관계의 전화를 말한다)와 동시에 그와 맞물린 국가의 내적인 전화를 요구하는 것이 된다.

헤게모니와 이데올로기의 내적 균열
둘째로 주목할 점은 이데올로기라는 문제이다. 발리바르는 알튀세르에게서 모호하게 남은 이데올로기론의 문제를 분명히 발전시키는데, 여기서 핵심적인 쟁점은 지배이데올로기는 지배계급의 이데올로기가 아니라, 피지배자의 요소를 주요한 성분으로 하여 구성된 이데올로기이고, 그렇기 때문에 헤게모니와 이데올로기의 내적 균열이 여기서 동시에 가능하다는 주장이다. 그렇기 때문에 지배이데올로기는 ‘허구적’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상상적’인 것으로 이해될 수 있고, 늘 동일성의 형성과 재형성을 둘러싼 투쟁의 과정 속에서 비로소 그 작동이 이해될 수 있는 것이 된다.

이 두 가지 측면을 통해 강조하려는 바는, 자본주의 근대세계에서 지배는 피지배자에 대한 내적인 지배를 배제하고서는 성립 불가능하지만, 억압할 수 없는 최소한으로 피지배자의 저항과 모순을 배제할 수 없고, 따라서 이렇게 얽힌 과정전개의 역사적 분석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이런 발리바르의 논의의 함의는 몇 가지 대립점들을 통해 좀 더 분명해 질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푸코 통해 프로이트 마르크스주의 비판
첫째로 시민인륜의 정치는 단순한 국가에 대한 개혁의 언사는 아니다. 발리바르는 세 가지 정치가 ‘원리적’으로 결합될 수 없고, ‘정세적’으로만 결합될 수 있음을 강조한다. 그리고 여기서 특히 중요한 점은 그가 ‘이상적 보편성’이라는 말을 통해서 강조하려한 ‘봉기의 정치’의 우위라는 사고이다. 정치의 자율성이나 노동의 적대를 말하면서, 그가 이미 현 구조 사이에 모순의 전복의 계기가 포함돼 있음을 이야기 할 때 중요한 점은 현재의 ‘규칙을 인정함으로써’ 변혁이 오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돌파하기 위해 새로운 언어’를 개발해야 함을 끊임없이 강조하고 있음을 지적해 둘 필요가 있다. 이 점에서 이 책의 역자후기는 오해의 소지가 있음을 주의해 읽는 것이 좋다.

둘째로, 발리바르의 프로이트 마르크스주의 비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발리바르는 이 대립을 부각시키기 위해 푸코라는 이단점을 동원하고 있는데, 이를 통해 오히려 마르크스의 강점이 부각된다. 프로이트 마르크스주의의 핵심적 난점은 동형성의 유비가 지닌 한계이고, 서로 다른 구조에 대한 서로 다른 분석의 필요성을 일반성으로 대체하는 한계에서 발생한다.

셋째로, 소수자라는 쟁점이 제기된다. 발리바르는 소수자 문제에 대해 조심스러운데, 그는 소수자라는 쟁점이 동일성의 정치에서 그 자체로 벗어나지 못한다는 점과, ‘세계화’시대에는 다수자조차 점점 더 소수자적 외양을 띠어간다는 점을 지적한다. 오히려 그는 ‘소수자 되기’보다는 보편성의 전유의 쪽에 서고 있다. 그가 페미니즘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 해결책은 새로운 동일성을 갖춘 ‘공동체’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공동체를 변혁하는 것임을 강조하는 것도 이런 이유라 할 수 있다.

마르크스를 귀환시키는 여러 가지 길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역사적 주체로서 인민의 자율성을 강조하면서, 또한 ‘정치경제 비판’의 ‘변혁’의 마르크스를 발전시키면서, 그리고 마르크스주의를 지금까지보다 더 넓은 외연으로 일반화시키려는 시도를 동시적으로 수행하려 할 때 발리바르의 시도를 피해간다면 그 모색은 불가능할 것으로 보인다.

백승욱 / 중앙대·사회학

필자는 서울대에서 ‘중국 단위 체제와 국가의 노동력 관리방식의 변화’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주요 저서로는 『중국의 노동자와 노동정책』, 『자본주의 역사강의』, 『문화대혁명』 등이 있다.


 

발리바르는 누구인가

발리바르(Etien Balibar)는 마르크스주의의 근원적 해체를 시도했던 알튀세르의 제자이자 고전적 마르크스주의의 마지막 대가로 꼽힌다. 1942년 프랑스 아발롱 출생, 니메그대(네델란드)에서 철학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는 파리 낭테르대 명예교수이자, 미국 캘리포니아대 비판이론 교수로 재직 중이다.
지은 책으로는 『역사유물론연구』, 『민주주의와 독재』,『역사유물론의 진화』, 『마르크스의 철학』 등이 있다.
그의 아포리즘 하나. “어떤 정치의 개념도 완전하지 않다. 따라서 역사적 시간 속에서 그리고 생의 공간 속에서 각각의 것들은 다른 것들을 전제한다. 변혁 없이는 해방도 시민인륜도 없으며, 해방 없이는 시민인륜도 변혁도 없다. 그러나 이러한 복잡한 전제들로부터 하나의 체계, 하나의 불변의 질서를 만들길 원하는 것은 부질없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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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수신문 편집국 2007-11-08 10:15:12
선생님의 hotmail계정으로 메일을 넣었습니다.
확인하시고 가능한 빠른 회신을 부탁드리고자 합니다.
02-3142-4112, khj@kyosu.net

최원 2007-11-08 06:35:08
'서평을 읽고...'를 올리고 나서 어떤 지인과 약간의 대화를 했는데, 백승욱 선생님이 말한 '봉기의 정치의 우위'라는 것이 '구성에 대한 봉기의 우위'를 말하는 것 아니냐는 이야기가 있었습니다. 백승욱 선생의 의도가 그런 것이었다면, 백승욱 선생님의 말이 오히려 오해의 소지가 좀 있었다고 보이는군요. 그 의도가 무엇이었든 여기서 이론적으로 분명히 지적해야 할 것은, 발리바르에게서 '구성에 대한 봉기의 우위'란 '(제도적인 것으로서의) 정치적인 것의 자율성에 대한 (대중적 실천으로서의) 정치의 자율성의 우위'를 말하는 것이지, 결코 '시민인륜의 정치에 대한 해방의 정치의 우위'를 가리키는 말이 전혀 아니라는 점입니다. 시민인륜을 '구성'이라는 계기로 한정하는 것은 시민인륜을 '정치'가 아닌 '제도적인 것'으로 환원하려는 것으로, 발리바르가 '정치의 세 개념'에서 명확한 반대입장을 표명한 것이지요. 물론 저는 역자 해제의 어디에서도 '봉기에 대한 구성의 우위'를 주장해 본 바가 없습니다. 또 이번 역자해제에서 제가 봉기와 구성의 관계를 명확히 다루지는 않았습니다만, 저는 [공포]의 한 역주와 많은 다른 글에서 이미 '구성에 대한 봉기의 우위'를 누누히 강조해왔지요. 따라서 저는 여전히 '오해의 소지가 있다'는 백선생님의 말은 (앞으로 근거를 정확히 밝히지 않는다면) 무리가 있는 말이었다고 생각합니다.

편집국 2007-11-07 13:49:03
백승욱 선생님이 지적하신 오자 수정했습니다.

백승욱 2007-11-07 00:53:04
아래서 12째 줄에 "푸코라는 장.단점을"은 "푸코라는 이단점을"의 오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