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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시대의 고전] <22> 케이트 밀레트의 『Sexual Politics』(1970)
[우리시대의 고전] <22> 케이트 밀레트의 『Sexual Politics』(1970)
  • 한설아 / 서울시립대
  • 승인 2001.11.26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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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11-26 17:01:59
케이트 밀레트의 『(Sexual Politics』,(1970)
(국역 『성의 정치학』, 현대사상사 刊)

케이트 밀레트(Kate Millett)는 1934년 미국의 아일랜드계 카톨릭 가정에서 태어났다. 미네소타주립대에서 영문학을 전공했고, 이후 영국 옥스퍼드대에 유학, 빅토리아 시대의 문학을 전공했다. 1961년부터 2년 동안 일본에 체재하여 조각을 공부했고, 뉴욕으로 돌아와 헌터대와 버나드대에서 교편생활을 했다. 1964년 이후로는 여성해방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있다. 1970년 3월에 ‘성의 정치학’을 탈고했는데, 이것은 컬럼비아대의 문학박사 학위논문으로 저술된 것이다. 1969년 그 일부가 발표됐을 때부터 미국 사회에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한설아 / 서울시립대 강사·여성학

“남성에게 권력이 집중된 부권제 사회에서 남성과 여성의 관계는 근본적으로 그 성격이 정치적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 케이트 밀레트가 박사논문을 책으로 출판하면서 ‘성의 정치학’이라는 제목을 붙인 이유이다. 이러한 제목이 의미하는 바가 사회에 던진 파장은 만만치 않았다. 그 이전까지 남성과 여성이 사랑하고 성관계를 맺고 결혼해 가족을 이루고 사는 것은 권력이니 정치니 하는 것과는 멀리 떨어진, 아주 개인적인 친밀성의 영역에 속해있는 것으로, 심지어 신비롭고 낭만적인 어떤 것으로 간주돼 왔기 때문이다.

밀레트는 사랑이나 성 역시 ‘지배의 도구’, ‘주도권 싸움의 영역’이 될 수 있음을 주장한다. 더욱이 이렇게 양성간의 ‘친밀성’, 혹은 ‘애욕’의 형태를 띤 권력관계가 다른 모든 지배-피지배 관계에 하나의 모델이 돼 왔음을 암시한다. 이로써 성별정치학은 사회의 모든 부조리와 불평등의 근본에 놓여있는 것이 되며 만일 우리가 이러한 불평등을 제거하려는 사회적 개혁을 원한다면 이 근본에 대한 철저한 도전은 피할 수 없는 일이 된다. 부권제를 간과한 모든 개혁은 궁극적으로 실패에 돌아가게 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러한 통찰은 어째서 이 책의 출판이 단지 ‘성별관계’를 다룬 탁월한 문예비평서라는 평가를 넘어서 서구의 제2기 여성운동을 불붙게 한 결정적인 사건으로 간주되고 있는지를 이해할 수 있게 한다. 또한 여성주의와 여성운동의 역사 속에서 후대 페미니스트 지식인들이 케이트 밀레트의 사상을 ‘급진적 페미니즘’이라고 명명해온 이유를 알 수 있게 해준다.

그러나 케이트 밀레트의 탁월한 통찰력은 단지 그가 내린 결론이나 주장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주장을 이끌어낸 방법에 있다. 서구에서 19세기와 20세기에 걸쳐서 성의 정치적 혁명이 최초로 일어난 시기와 그에 대한 반동, 즉 반혁명이 일어난 시기를 꼼꼼히 검토하면서 그녀가 주목한 것은 문화와 지식의 생산과정에 침투한 성별 권력관계였다. 여성에게 교육과 선거의 권리가 부여돼야 한다고 주장했던 첫 번째 성혁명의 물결이 반격을 맞고 쇠퇴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성과 결혼과 가족제도의 변혁과 그것을 떠받치고 있는 인간의 정서적 심리적 구조의 가부장성을 간과하고 단순히 제도적 변화에만 선배 혁명가들이 주목했던 데에도 그 원인이 있지만, 무엇보다도 여성들이 주도하는 변화의 물결에 맞서서 남성지식인들이 ‘새로운’ 과학을 내세우고 문화적 생산물들을 만들어내면서 이를 통해 남성과 여성의 성적 관계에 침투해있는 불평등한 권력구조를 자연스러운 것, 과학적인 것, 심지어 심미적인 것으로 의미화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에 밀레트는 성별 불평등을 하나의 본능적인 심리적 구조로 고착시키는 ‘남근선망과 외디푸스 콤플렉스’로 명성과 권위를 얻은 프로이트나 성별 권력관계를 사회의 운영에 순기능적인 것으로 간주했던 파슨즈의 기능주의뿐만 아니라 부권제 자체를 남녀관계의 자연스러운 성적 욕망으로 미학화했던 대표적인 남성작가들의 작품을 철저하게 해부했다. 영문학자였던 밀레트는 D.H. 로렌스, 헨리 밀러, 노오먼 메일러 같은 남성작가들이 자신들의 작품을 통해 20세기 초 성의 반혁명물결을 통한 가부장제의 부활에 사회적 의미를 부여하면서 동시대인들이 정서적으로 반혁명의 정당성을 자연스럽게 수용하도록 만드는 과정을 낱낱이 밝혀냈다.

지식을 갖춘 독립적인 여자주인공에 대한 조소와 파멸, 그리고 이 여자들에 대한 남자주인공의 성적 지배를 ‘성애’의 자연스러운 한 부분으로 구성하는 것은 이 작가들의 작품에서 공통적으로 보이는 패턴이다. 이를 통해 성의 혁명을 주장하며 자신의 사회적 구성원으로서의 지위를 확보하고자 했던 여성들은 철저한 문화적 ‘반격’을 맞게 된다.

30년 전에 쓰여진 이 책이 여전히 살아 숨쉬는 ‘고전’으로서의 의의를 간직하고 있는 것은 무엇보다도 성의 혁명과 반혁명에 크게 기여하는 문화와 과학의 흐름에 대한 선구적 통찰 때문이다. 이 책은 오늘날 한국사회에서 성별관계를 둘러싸고 벌어지고 있는 일들을 성의 정치, 문화정치의 관점에서 철저하게 검토할 것을 요구한다. 평등을 향한 염원이 반동의 물결 속에 또다시 익사 당하는 역사적 오류가 되풀이되지 않기 위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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