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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쟁점서평] 『레비나스 타자윤리학』(김연숙 지음, 인간사랑 刊)
[쟁점서평] 『레비나스 타자윤리학』(김연숙 지음, 인간사랑 刊)
  • 문성원 부산대
  • 승인 2001.11.26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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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비나스에 대한 평면적 해석 아쉬워

문성원 / 부산대·철학
김연숙 선생의 ‘레비나스 타자윤리학’은 우리 나라 최초의 본격적인 레비나스 연구·소개서라고 할 수 있다. 물론 1990년대 중반 이후 강영안 서강대 교수(철학)를 비롯해서 몇몇 분들이 레비나스를 소개하는 글을 발표했고, 레비나스 자신의 저작도 비록 소책자이지만 ‘시간과 타자’(강영안 옮김, 문예출판사, 1996), ‘윤리와 무한’(양명수 옮김, 다산글방, 2000) 등이 번역됐다. 하지만 레비나스에 대한 우리 사회의 관심은 이제 막 시작된 것으로 보인다.

전체성을 깨뜨리는 근원적 관계로서의 ‘타자’
이 책은 우선 제목부터 독특하다. ‘레비나스 타자윤리학’. 레비나스 자신은 ‘타자윤리학’이라는 말을 쓴 적이 없지만, 김연숙 선생은 주체 중심의 윤리학과 대비하기 위해 이 용어를 사용하고 있다.

레비나스에게서 윤리란 워낙 타자와의 관계를 이르는 것이며, 이 타자는 어떤 규정이나 한정으로도 가둘 수 없는 것이다. 그러니까 레비나스가 말하는 윤리는 동일한 규정이나 특성을 가진 주체들 사이의 관계가 아니다. 오히려 레비나스는 그러한 방식의 설정이 폐쇄된 전체성을 이룬다고 비판한다. 오늘날 서구 문명의 자기 중심성과 그로 인한 위기는 이 전체성에서 초래된 것이다. 레비나스가 말하는 타자와의 관계는 이와 같은 전체성을 깨뜨리는 근원적인 관계이다. 레비나스에 의하면, 이 근원성은 그 무엇보다 우선하는 것이며, 따라서 타자와의 관계를 다루는 윤리학은 제1철학이 된다.

이런 맥락에서 보면, ‘타자윤리학’이라는 명칭은 레비나스 윤리학의 중요한 특성을 드러내줌과 동시에, 그 주장의 주요한 부분을 훼손할 위험을 안고 있다. 레비나스 윤리학은 언제나 ‘타자’를 문제삼지만, 레비나스가 바라는 것은 자신이 주창하는 윤리학이 ‘타자윤리학’으로서 ‘주체윤리학’과 대비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혹시 김연숙 선생은 이런 점에 충분히 주의를 기울이지 않은 채, 손쉬운 대비의 효과를 보는 데 만족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이 같은 명칭 선택이 사소한 문제로 여겨지지 않는 것은 유사한 대비 구도가 이 책 전체에 걸쳐 나타나고 있기 때문이다.

김연숙 선생은 이성윤리학과 감성윤리학, 이기적 자아와 윤리적 자아를 또한 맞세워 놓음으로써, 레비나스 철학의 특성을 뚜렷하게 부각시키려 한다. 물론 레비나스의 반대편에 놓이는 것은 이성 중심의 이기적 자아이고, 레비나스 편에 놓이는 것은 수용적 감성을 바탕으로 하는 윤리적 자아이다.

특히 눈길을 끄는 대목은 김연숙 선생이 레비나스와 儒家 철학 사이에서 공통점과 유사점을 찾아내려 시도하고 있는 지점이다. 여기서 레비나스의 윤리적 자아는 孔孟의 性善과 비교되며, 감성에 대한 레비나스의 강조는 感通을 중시해온 동양의 전통과 견주어진다.

이를 통해 도출되는 공통된 문제의식은 ‘이기적 자아에서 윤리적 자아로의 전환’이다. 그리고 이것은 도덕 교육에 큰 관심을 가진 김연숙 선생 자신의 문제의식이기도 하다. 말하자면 레비나스와 동양의 전통이 김연숙 선생을 통해 오늘날의 교육 문제 속에서 만나고 있는 셈이다.

레비나스에 대한 평면적 해석 아쉬워


그런데 언뜻 주체성이 돋보이는 이런 식의 이해 방식은 자칫 레비나스 철학을 밋밋한 것으로 만들 위험도 있는 것 같다. 서구 문명의 폐쇄성을 돌파하려는 레비나스 나름의 치열한 노력이 혹 도덕적 자아의 확립이라는 진부한 목표 아래 오히려 그 생생함을 잃어버리지는 않을까. 그리고 타자윤리학과 주체윤리학, 감성윤리학과 이성윤리학, 이기적 자아와 윤리적 자아의 손쉬운 대비가 혹 이러한 평면적 이해의 위험을 가중시키지는 않을까.

물론 이 책의 곳곳에는 서구의 자기중심성을 비판하는 레비나스의 논지가 소개돼 있다. 그 중에서도 오늘날 특히 주목할 만한 것은 정의가 자유에 앞선다는 레비나스의 주장이다. 타자를 받아들이고 환대하는 데서 성립하는 정의가 자기화된 영역에서 지배를 획책하는 자유보다 우선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관점은 오늘날의 신자유주의 횡포를 비판하는 데 깊이 있는 철학적 기반을 제공해 준다. 그런데 이런 점을 주로 언급하고 있는 김연숙 선생의 글은 아쉽게도 영어 논문의 형태로 책의 맨 뒷부분에 실려 있다. 그런가 하면, 레비나스의 주저인 ‘전체성과 무한’을 인용하고 있는 대목들에서 부정확한 번역이 상당수 눈에 띄는 것도 이 책에서 크게 아쉬운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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