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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적 문화유산의 복원 기대 … 고전 계보학 구축이 관건
지적 문화유산의 복원 기대 … 고전 계보학 구축이 관건
  • 김혜진 기자
  • 승인 2007.10.29 15:2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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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단] 고전번역 박사학위제 도입, 어떤 내용인가

한글이 보편적인 문자체계로 정착된 것은 겨우 100년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 갑오개혁 이전까지 반만년에 이르는 한국의 사유체계가 한문으로 기록돼 현대에게 전해지지 못하고 있다는 말이다. 물론 민족문화추진회(이하 민추)를 필두로 하는 국가 차원의 사업과 재야학자들의 꾸준한 노력이 지적 전통문화 유산의 명맥을 끊이지 않게 했지만, 아직 한글로 전환되지 않은 고서가 80% 가까이에 이른다.
고전번역의 필요성과 중요성에 대한 전반적인 공감대가 형성돼 있는 가운데, 고려대와 성균관대의 한문고전번역 석·박사 학위과정 개설에 관심이 쏠리고 있다. 
고전 번역은 전공자에 의해 이루어진 경우가 거의 드물다. 실제 지난 10년간 진행된 한국고전 번역 중 75.5%(469책)가 민추에서 수행됐다. 사업 차원의 번역이 아닌 경우에는 재야학자들에 의해 수행된 경우가 대부분이다.
물론 이들에 의해 고전번역과 한학의 학문적·대중적 지평이 넓어진 것은 틀림없지만, 번역의 질적 발전을 구조적으로 가로막는다는 점 또한 지적돼왔다. 고전의 번역과정과 학문 일반이 원활하게 연계되지 못할 수 있다는 것이 일반론이라면, 국가와 민추의 사업방식의 문제도 제기됐다. 장기적 계획에 의해 번역 사업이 수립되기보다는 단기적으로 추진돼 ‘위촉제 분할 번역방식’으로 이루어짐으로써 부실번역의 원인이 된다는 지적이다.

엄정한 교감, 학술적 주해로 체계 세워야
관련 연구자들은 한문고전번역의 학위과정 도입이 텍스트의 단순번역 경향을 극복하고 천년 이상 누적된 한국의 지적 사유를 복원할 수 있다는 데 의미를 두고 있다. 고려대의 고전번역협동 과정을 주도한 윤재민 교수(한문학과)는 “한문문화로 이루어져있던 수천 년의 역사와 전통을 학문적 경험으로 축적하고 이론화할 수 있다”고 말한다. 성균관대 고전번역과정 준비위원장인 신승운 교수(문헌정보학과) 역시 ‘방대한 한자문화의 한글문화화 작업’으로 현재적 의미를 부여했다. 암호화되어 있는 한국의 지적 유산들을 한글세대에게 전수하는 매개 역할이 활성화될 수 있을 거란 기대다.
고전 번역 학위과정 도입의 의미는 무엇보다 번역을 학술적 작업으로 끌어올리는 것에 있다. 문제는 연구자들이 높은 질적 수준의 연구 결과를 내놓을 수 있도록 어떠한 번역의 방법론을 구성하느냐에 있다.
교수진과 교과 내용의 구성이 이러한 구상의 기본이 된다. 두 대학의 한문고전협력과정의 교수진은 한문학과를 비롯해 철학과, 사학과, 국문·중문·일문학과 등을 포괄했다. 교과 과정에서 성균관대는 번역학과 더불어 한학, 문헌학, 컨텐츠 영역 등의 강좌를 구성했고, 고려대 역시 ‘번역학’, ‘번역비평’ 등 교양과정과 ‘전통사회경제학의 이론과 개념화’, ‘전통자연과학의 이론과 개념화’ 등의 전공강좌를 개설했다. 한문학이 생산되는 문화권과 학문분야별 이론적 경향을 짚어낸다는 의도다.
학문 분야와 연계하는 문제와 함께 고전번역이 짊어져야 할 과제는 구체적인 방법론의 설정이다. 성균관대는 이번 과정에서 주목하는 학술적 번역의 정의를 제시했다. 엄정한 校勘과 학술적 성과를 반영한 주해작업이 두 가지 방향이다. 이판본이 많이 존재하는 고전의 특성을 반영해 이판본들의 대조가 제대로 이뤄져 정본이 만들어졌는지, 해당 고전과 관련한 쟁점들이 번역에 반영됐는지를 평가 기준으로 제시하고 있다.

구체적 대상 선정 원칙 확립부터
경상대 남명학연구원의 이상필 교수(한문학과)는 “번역의 학술적 가치에 대해서는 공감대가 형성돼 있었지만 고전 중 어떤 저서, 어떤 인물을 선정할 것인가의 기준이 없었다”고 지적하면서 과제로 구체적 대상선정 원칙의 확립을 강조했다. 번역과정 개설의 필요성을 꾸준히 주장해온 김인환 고려대 교수(국어국문학) 역시 “학문분야별로 꼭 읽어야할 고전의 계보를 작성할 수 있어야 한다. 서양철학처럼 학문의 흐름과 사회적 배경이 함께 검토된 한문학의 계보 작성이 절실하다”고 전했다.
양질의 번역을 위한 평가 방법에 대한 지적도 있다. 김 교수는 엄정한 심의 기구의 구성을 강조하면서, “동양의 역사학자, 철학자, 어학을 볼 수 있는 한문학자는 물론 들어가야 하지만, 서구 고전 평가의 예를 배울 수 있어야 한다”고 전한다.
또 이상필 교수는 “미술사, 음악사를 비롯한 역사학, 국문학 등 국학연구의 기본 자료가 부족한 것이 현실”이라며, “그간 해독되지 못했던 고전들이 깊이 있게 번역됨으로써 학술적 지평을 확대하는 데에 기여할 것”이라는 기대를 전했다.
두 학교가 고전번역을 제도적 차원으로 끌어들이면서 민족문화유산의 정당한 복원과 계승의 가능성은 한층 커졌다. 고전번역이 급속한 근대화 과정에서 사장됐던 반만년의 사유에 다가가 이를 진지하게 탐색, 체계화하는 계기를 만든다면, 국학 연구의 획기적 진전을 기대할 수도 있다. 나아가 인문학 위기론 속에서 한국 인문학 부흥에도 상당히 기여할 것으로 예측된다. 이러한 예측과 전망이 성취되려면, 역시 투명한 원칙에서 시작하는 일이 필요하다. 그래서 더욱 주목된다.       김혜진 기자 khj@kyosu.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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