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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비평] 나는 걷고 싶다
[문화비평] 나는 걷고 싶다
  • 최재목 영남대 철학
  • 승인 2007.10.22 15:3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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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년 이상 나를 도왔던 차가 고장나버렸다. 고치기도 싫고 해서 그냥 주차장 한 쪽에 쳐 박아두었다. 한 달이 넘었다. 어쨌든 걸어 다니게 되어 천만다행이다. 걸어서 학교까지는 한 시간 남짓. 벼가 익어 넘실대는 황금 들판을 가로질러 집으로 갈 때면 마음이 참 행복하다. 이제 책가방도 들지 않기로 했다. 빈손으로 돌아간다. 그래서 집에 가면 쉰다. 마음대로 스케치하고 채색할 내 마음의 ‘빈틈’을 많이 만들어내고 있는 중이다. 나를 구상하는 동안의 放牧과 下放이다. 

 이상하게도 자가용을 멀리하면서 내가 누구인지 오히려 잘 보이기 시작했다. 차가 죽고, 내가 독립했다. 나의 생각과 느낌이 살아나고, 내 방식의 이야기가 풍성해짐을 느낀다. 무슨 이론과 무슨 지식 따위에 憑依되었던 나와 좀 거리를 두었다가 아예 별리를 하고 싶다.

 ‘걷기’는 새로운 시공간의 풍경을 탄생시키는 힘을 갖는다. 차로 다닐 땐, 차 때문에 많은 것들이 가려졌다. 속도로 인한 한정된 시야, 前進 운동의 업보가 만들어 낸 幻影이었다. 그 뒤로 밀려나 은폐된 구불구불한 길, 느린 물살의 도랑물, 벌레 먹고 있는 나무의 뒷면. 서서히 이런 것들이 내 눈 속에 포착되기 시작했다. 가슴 깊이 스며들어 굽이쳐 흐르게 된, 벌판 너머의 강물과 눈앞에서 일렁이며 말을 건네는 빛나는 숲들. 둔덕을 넘어서지 못하고도 편히 하루를 행복해 하는 갑충의 발. 내 逍遙 앞에 사물은 제각기 눈 뜨기 시작한다.

 걸어 다니다 보면, 대부분의 길이 자동차 走行 중심으로 난폭하게 구획돼 있음을 실감한다. 보행로가 멋대로 끊겨 있거나 장애물로 턱턱 막혀 있기도 하다. 자동차 운전자는 다수=강자이며, 보행자는 소수=약자여서 권리 주장이 미약한 탓인가. 그런데, ‘걷기’가 죽으면 各個의 신체가 만들어 내는 各樣各色의 문화도 함께 죽는다. 그런 도시에는 매캐한 배기가스로만 가득 차, 인간 생태의 살아있는 풍경이 없다. 아무 것도 아닌 것들, 오래 전에 퇴색한 망각된 것들이, ‘걷기’로 인해 내 눈앞에서 얼굴을 드러내며 새로운 의미로 펼쳐진다.

 스스로의 행복과 삶이 뭔지 더 이상 책 속에서 묻고 싶지 않다. 종이의 책은 창백하며, 쓸쓸하다. 내 책은 더 이상 紙面 위의 文字가 아닌, 산천이고 바람이며 언덕과 구름이길 바란다. 걷다 보면 안다. 내 밖이 모두 無情法門이고, 長廣舌임을. 보이고 들리는 것, 아니 그것 너머에 숨은 것 모두가 살아있는 언어임을. 나를 길러 온 것은 희망이 아니었다. 內服처럼 껴입고 다닌, 까칠하면서 따스한 아픔들, 서글픔들, 고민들이었다. 하지만 그런 것들이 나를 길러주었다. 그들에게 감사한다. 

철학의 종자돈은 ‘걷기’와 ‘대화’였다. ‘쓰기’로 인해 신체는 逍遙로부터 차츰 멀어져갔다. 이후 강화된 맞춤법, 띄워쓰기, 교정법, 규격에 맞도록 ‘차렷, 경례!’를 해가며 야생적 사고는 변형되었다. 그에 맞도록 행위도 세밀하게 분절화 되었다. 야생적 ‘걷기’가 죽자 천진난만·유치찬란의, 상상력 풍부한 ‘대화’도 죽었다. 나의 걷기나 산책이 신선미가 떨어진 내 심신의 放牧, 下放을 부추겨 하나의 童心에 찬 ‘사상운동’으로 이어지길 바란다. 진흙탕에 빠진 듯이 헤어 나올 수 없는 雜務. 이제 보직마저 정리하고 나면 나는 정말 ‘걷기’로 돌아가, 하고 싶은 인문적 공부에 몰두하고 싶다. 잘 노는 것이 바로 工夫 아닌가. ‘有能’보다도 잘 노는 능력=‘遊能’이 존중받았으면 한다. 그래서 통조림이나 냉동품 형태로 유통되는 지식에 맛 들인 내 삶의 혀를 씻어내고, 자연의 미각에 눈을 돌려, 차츰 귀향에 익숙해지고 싶다.

 고향의 回生. 이것은 자생적 공간의 구축이라는 생태론적 의미를 갖는다. 脫故鄕, 無故鄕의 유목 시대에 맞서는 대항 담론으로서, 획일적 규격화된 풍경에 대들며, 당분간 이런 소박한 생각이라도 지키고 싶다. 기억의 파편 속에서만, 상상력 속에서만 남아 그리움으로 자가발전되는 상실된 고향. 적극적 능동적 은둔의 이상이 된 그런 고향을 내 발로 찾아가야 한다. ‘시인의 사명은 귀향이다.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라고 말한 시인도 있다. 하지만 귀향의 진정한 정신은 시인만이 아니라 자신에 눈 돌린 인문학자들의 성찰 속에서 자각된다. 그리고 그것은 ‘걷기’로서 구체화 되며, ‘나’의 살아있는 이야기를 만드는 동력이 될 것이다.

최재목 /영남대 ·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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