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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통일 17주년을 돌아보며] 그들의 ‘화해정책’이 시사하는 점
[독일 통일 17주년을 돌아보며] 그들의 ‘화해정책’이 시사하는 점
  • 교수신문
  • 승인 2007.10.15 11: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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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통일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 것은 고르바초프의 페레스트로이카 정책이었다. 그러나 독일 통일을 꼭 외부로부터 날아온 행운의 결과로만 해석하는 것은 잘못이다. 주변정세가 유리하게 돌아가자 전광석화처럼 기회를 낚아채 통일로 연결시킨 것은 바로 독일의 경제력과 외교력의 결과였다. 더 눈여겨보아야 할 것은 동방정책을 추진해 조용하게 통일의 기반을 다져온 독일인들의 준비성이다.

1969년 서독 수상에 취임한 브란트는 1970년 동서독 정상회담을 열어 동독과의 화해와 공존정책을 본격화했다. 한 해에 두 차례나 개최된 정상회담은 동독의 지위 문제를 놓고 합의점을 찾지 못해 결렬됐지만 실무적인 차원에서 대화와 협상은 계속 이어졌다. 그 결과 1971년 서독과 서베를린간의 보다 자유로운 통행보장, 서베를린인들의 동베를린 방문 허용 등 많은 성과가 있었고, 1972년에는 상주대표부 설치, 군축, 각 방면에서의 협력관계 증진 등의 내용을 담은 동서독 기본조약을 체결하는데 성공했다. 1970년 두 차례의 정상회담을 실패하게 만든, 동서독의 화해의 길목에서 가장 큰 난제로 부각됐던 민족문제에 대해서는 양쪽의 견해차를 인정하고 그 문제를 더 이상 거론하지 않는 ‘피하기’ 방식을 선택해 성공했다. 국군포로문제, 납북자 문제, NLL문제 등 많은 난제를 안고 있는 우리에게 시사적인 대목이 아닐 수 없다.

브란트는 동방정책을 통해 영광과 시련을 모두 경험했다. 그는 동서화해정책의 공을 인정받아 1971년 노벨평화상을 탔지만 야당과 보수파들은 그의 화해정책을 맹렬하게 비난했다. 그는 노벨평화상을 탄 4개월 후 불신임투표에 회부돼 겨우 2표 차이로 수상직을 유지할 수 있었다. 1972년에는 하원에 신임을 물었다가 반대표가 많이 나와 끝내 불신임당하고 말았다. 곧바로 실시된 선거에서 승리해 수상직은 계속 유지했지만 동방정책에 대한 국내의 반대가 만만치 않았음을 말해 준다. 햇볕정책과 2000년 및 2007년 두 차례의 정상회담을 극단적으로 비난하는 국내의 일부 보수파들의 존재가 새삼 상기되지 않을 수 없다. 북한 강경파들처럼 동독의 강경파들도 동서화해정책에 대한 방해공작을 계속했다. 브란트의 보좌관을 동독의 스파이로 포섭하고 그 사건이 발각돼 1974년 브란트가 수상직에서 물러난 것이 그 대표적인 사례라 할 수 있다.

그러나 독일인들은 브란트의 시련을 독일의 시련으로 확대시키는 우를 범하지는 않았다. 브란트의 후임자 쉬미트가 동서화해정책을 계속 수행했고, 심지어 1984년에 집권한 기민당과 콜 수상까지도 동서독 화해정책을 계속 추진하였다. 다른 대안이 없었던 때문이었을 것이다. 1990년의 독일 통일은 바로 이런 오랜 기간의 화해정책, 즉 준비기간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한반도에서도 2000년 남북정상회담이 열린데 이어 금년 10월 제2차 정상회담이 또 열렸다. 너무 늦게 시작한 정상회담이기는 했지만 그래도 풍성한 선물들을 안겨 준 회담들이었다. 두 번의 정상회담 성과에 힘입어 정치, 경제, 문화적으로 많은 교류와 신뢰가 쌓이고 있다. 상호신뢰만 갖는다면 만나서 논의할 내용, 합의 볼 수 있는 내용이 수없이 많다는 것을 새삼 인식시켜주었다. 독일의 경우처럼 당장 해결하기 어려운 난제는 향후 과제로 남겨두고 가능한 것부터 실천해야 한다.

북한의 특수한 사정을 고려할 때 앞으로도 상당 기간 친인척의 자유방문이나 자유로운 방송 청취 등의 진전을 기대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대신 우리는 서독이 하지 못했던 일들을 할 수 있고 또 이미 착수해 진행하고 있다. 예를 들어 북한의 기간시설에 대한 투자, 개성공단, 금강산개발과 같은 사업들은 북한의 경제적 재건과 함께 우리의 경제 활성화에도 크게 기여할 것이다. 향후 도래할 통일에 대비한 가장 효과적인 통일비용 절감책이다. 독일이 통일 후 통일 비용으로 홍역을 치룬 경험을 타산지석으로 삼을 때 우리는 독일과는 또 다른 성공한 통일사례를 세계사에 선물할 것이다.

최영태 / 전남대·사학과


 

필자는 전남대에서 ‘독일사회민주주의 운동에서 에두아르트 베른슈타인의 수정주의’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전남대 인문대 학장이자 한국독일사학회장, 5·18연구소장을 맡고 있다. 저서로 『베른슈타인의 민주적 사회주의론』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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