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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중의 中國 散策]개혁개방과 공산당
[이중의 中國 散策]개혁개방과 공산당
  • 교수신문
  • 승인 2007.10.08 14: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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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인 등소평, “홍콩 되찾지 않으면 역사의 죄인”

문화대혁명의 주체도 중국 공산당이요 개혁개방 정책의 추진 주체도 중국 공산당이다. 파괴와 건설의 주체가 한 통속인 공산당이다. 영구 혁명을 이념화해서 줄기차게 추진했던 모택동과, 이에 맞서 만난을 무릅쓰고 중국의 현대화를 지향했던 등소평도 같은 중국 공산혁명의 1세대 지도자이다. 서방의 시각으로는 이해하기 힘든 부분이 바로 그것이다. 왜 중국엔 여당, 야당이 없을까. 선거에 의해서 정권교체가 이루어지고, 따라서 정책의 변화도 자연스럽게 이루어질 텐데 말이다.

등소평의 개혁개방 정책은, 모택동이 주도했던 10년의 대 동란이었던 문화대혁명의 종말과 함께 비로소 개화할 수 있었다. 건국의 1급 공신들인 주은래, 유소기, 주덕, 팽덕회, 등소평 등이 한결같이 중국의 미래는 현대화밖에 없다고 주장하고 있을 때, 모택동의 생각과 지향은 달랐다. 그는 인민공사와 대약진 운동, 반 우파 투쟁 등을 통해 이들 당의 주역들을 심하게 옭죄고 있었다. 1959년 유소기가 국가주석이 되었을 때, 모택동의 심기는 아주 불편했다. 주은래, 유소기, 등소평이 당과 나라를 다 말아먹고 있다고 모택동은 생각했고, 또 노골적으로 불평도 했다.

당의 실권파들을 공격하고 파괴시키기 위해서는 외곽에서 때리는 방법밖에 없었다. 계급도 차별도 없다는 공산 사회에 점차 계급이 생기고 계층 간에 이질감과 불화가 조성되는 것을 계기로 모택동은 젊고 순수하고, 혁명의 열정에 불타는 젊은 학생들을 전면에 배치하는 의외의 방법을 택했다. “造反有理”를 내세워 “지도부를 공격하라!”고 선동했다. 공격 대상의 정점에 유소기와 등소평이 있었다. 결국 유소기는 모택동의 당으로부터 ‘영구 제명’을 당하고 감옥에서 죽었다. 문화대혁명이 얼마나 비극적이고 처절했던가를 유소기의 죽음이 웅변적으로 말해준다.

그의 죽음은 가족에게도 알려지지 않았다. 하기야 아내인 王光美 역시 감옥살이를 하고 있었으니 더 말할 여지가 없겠다. 1968년 8월, 중공당은 그에게 “叛徒, 內奸, 工賊”이란 죄명을 씌워 “영구 출당”을 결정했다. 홍위병에 시달려 만신창이가 된 몸으로 그는 이듬해인 1969년 10월 북경에서 하남성 개봉으로 쫓겨났다. 그해 11월 11일 새벽에 71세로 눈을 감았다. 시신을 처리할 때에도 그의 이름은 가명인 채로였다. “사망인 성명; 유휘황. 직업;무업. 사인; 병사.” 그리고 “열성 전염병자”로 취급되어 죽자마자 화장 처리되었다. 한편으로 모택동의 특별한 ‘배려’에 의해서 복권된 등소평은 우여곡절을 겪으며 마침내 모택동 시대를 마감하고

□ 1997년 7월 1일 중국이 영국으로 부터 홍콩을 넘겨받으면서 일국양제가 시작됐다. 사진은 1997년 6월 30일 반환식 전야제 불꽃놀이.

중국의 ’건설’과 ’현대화’의 등소평 시대를 열게 된다.
최근 한 일간지 특파원의 재미있는 글을 보았다. ‘덩샤오핑의 후계자자가 된 홍콩’이란 제목의, 최형규 중앙일보 홍콩 특파원이 쓴 기사였다. 흔히 세상에서는, 오늘날까지는, 등소평의 후계자는 강택민, 호금도로 알려져 있지만, 실제 후계자는 30년 전에 중국으로 반환된 홍콩이라는 것이 기사의 골자였다. 여기에 등장하는 중국인 금융전문가 劉靑松은 4년 전에 정부 계획에 의해 홍콩으로 보내진다. 그는 홍콩의 금융시장에서 미국인, 영국인 밑에서 하루 10시간 씩 일했다. 작년에 대륙으로 돌아온 그는 현재, 상해와 광동과 더불어 중국 3대 경제권으로 발돋움하는 天津시에서 핵심 금융전문가로 일하고 있다고 한다. 그가 한 말이다. “선진 시스템과 법치 정신, 그리고 전문성…… 중국의 미래를 결정할 대부분을 홍콩이 갖고 있다. 내가 홍콩에 온 이유와 돌아가 무엇을 할지를 알았다.”

등소평이 홍콩 같은 것을 한 두 개 더 갖고 싶다고 한 말이나, 홍콩을 되찾지 않으면 역사의 죄라고 한 말은 결코 정치적인 발언이 아니었다. 實事求是 정신에 입각해서 먼 미래를 내다본 국가 지도자의 경륜을 이런 곳에서 읽을 수 있다. 등소평의 생각과 바람은 오늘의 홍콩이 성공적으로 증명해 주었다. 그러나 등소평의 개혁 개방 정책이 중국공산당의 소산이라는 점이, 외국인에겐 좀처럼 이해되지 않는다. 호금도 주석이 에너지 외교라 해서 전 세계를 누비고 다니는 한편으로 중국공산당의 정통성과 중국의 정체성을 살리려고 안간힘 하는 것을 보면 이것 역시 일종의 수수께끼라는 생각이 들 때가 많다.

등소평은, 중국 공산당을 위해서도 개혁개방이 필요했고, 개혁개방을 위해서도 공산당이 필요했다. 등소평은 경제전문가가 아니다. 그는 탁월한 정치 지도자였기 때문에 개혁 개방의 필요성을 누구보다도 절감했다. 백성을 잘 먹이는 것이 공산당이라는 것이 그의 일관된 신념이자 주장이었다. 중국 공산당이 사상을 해방하고 새로운 활로를 열기 위해서는 반드시 개혁 개방이 필요했고, 개혁 개방이라는 미증유의 대변혁을 성공시키기 위해서도 등소평에겐 공산당의 통치력과 능력이 필요했다. “시장경제=자본주의=정당정치, 양당 또는 다당 정치”라는 등식을 서방인들은 어릴 적부터 배워왔고 익혀왔다. 그러나 평생을 공산주의자로 살았고, 중국의 공산혁명의 선두 그룹에 있던 등소평과, 등소평의 중국인들에겐 그런 등식이 쉽게 이해 되지도, 받아들여지지도 않는다.

중국의 정치현황에 대해서 다소의 불만을 표출하는 중국의 젊은 지식인들과 얘기해보면 의외로 한국의 어지러운 정치현실을 부러워하지 않는 것을 보고 약간 당황해질 때가 있다. 너무 질서가 없고 뒤죽박죽이라는 촌평을 쉽게 듣는다. 신영복 교수는 그의 저서 『강의』(돌베개, 2004)에서 “중국이 추구하는 21세기의 구성 원리”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그가 바라보는 오늘의 중국은 “자본주의를 소화하고 있는 중”이며 “자본주의와 사회주의를 지양한 새로운 구성 원리를 준비하고 있는 현장”으로 파악하는 것이다. 이 같은 신 교수의 희망과 기대에 동조하는 한국의 지식인들이 적지 않다.

21세기에 들어 국가 간 경쟁은 더더욱 치열해지고 있다. 아귀다툼에 가까운 생존경쟁의 무대가 21세기에도 여전히 펼쳐지고 있다. 양질의 국가 지도 그룹을 어떻게 효율적으로 산출해 내는가에 따라 결과가 많이 달라질 것이다. 한국엔 고위 공무원을 산출하는 기능으로 고시 제도를 활용하고 있다. 다른 한편으론 정당 활동을 통한 선거의 결과로서 새로운 지도 그룹이 형성되기도 한다. 그러나 앞의 유청송이, 중국의 미래를 결정할 요소로 든 ‘선진 시스템과 법치정신, 전문성’을, 오늘의 한국의 지도 그룹이 충분히 소화시킬 수 있을는지, 그러기 위해선 또 다른 엘리트 산출 기능이 보완되어야 할는지, 앞으로의 과제가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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