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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비평] 미래의 개인
[문화비평] 미래의 개인
  • 김영민/ 철학자
  • 승인 2007.10.08 13:5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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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경린의 단편 ‘장미십자가’의 주인공 정연우는 제 상처의 아득한 고독 속에서 “내일 오후나 모레쯤 들러주겠니?”라는 전화를 마지막으로 팔목 동맥을 끊고 자살한다. 그리고 피범벅이 된 그의 시체는 사흘 후에 ‘발견’된다.

‘매디슨 카운티의 다리’(1995)나 덕 블록(Doug Block)의 ‘엄마의 일기장’(2007)에서는 죽은 엄마의 일기장이 ‘발견’되면서 바야흐로 역동적, 감동적인 플롯의 골과 마루가 펼쳐진다. 그러나 실은 아무런 발견이 아닌 발견이며, 그 내용은 일상 속에 내내 널브러져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마치 (짐멜이나 아도르노가 똑같이 밝혀 놓았지만) 비밀은 비밀이라고 명명·인정되는 형식을 통해 그 비밀의 내용을 갖듯, 개인으로 죽은 정연우의 고독과 역시 개인으로 죽은 엄마들의 사랑은 ‘발견’이라는 사이비-형식을 통해 재가되고 사후적으로 재구성된다.

우스꽝스럽게 ‘발견’되는 오늘날의 개인은 ‘군중의 사람’(에드가 엘런 포)이었다가 ‘고독한 군중’(D. 리스먼)이었던 그 개인의 후예들이다. 전화와 일기 속에 최후의 말을 남길 수밖에 없는 그 개인의 고독은 실은 개인의 것이 아니다. 이미 그것은 ‘체계적’인 것이다. 이 경우 유일회적 불안과 희망 속에 진동하던 내 실존조차 체계적이며, 우리의 실존은 그 사밀한 처녀성을 잃고 체계에 구성적으로 의탁한다. 강수돌은 현대인의 만성적인 ‘일중독(work addiction)’을 분석하는 글에서, ‘자아정체성의 자리에 시스템 정체성이 대신 들어앉는 것’을 말한다. 비단 일중독의 문제가 아니라도, 개인(실존)/전체(체계)로 양분해서 세상을 뜯어보던 구태를 반성·비판하는 학인들의 음성은 이미 벌떼처럼 잉잉거린다. 미래의 개인주의는, 실존과 체계의 공속적(Zusammengehrig) 운명 속에서 하나의 기계적 함수로 드러날 오멘(omen)의 냄새를 풍긴다. 

그 때에 각 개인에게 그 개인의 자아는 (마치 ‘나만의 비밀’이 꼭 그러하듯) 오히려 ‘나 혼자 모르고 있는 것’이 된다. 그리고 내 상상 속에 꼭꼭 감추고 있었던 그것은 오히려, 이미, 타인들 사이의 어느 (상상치 못한) 곳곳에서 심각하게 변형된 채 유통되고 있는 것이 된다. 그렇게 개인은 어느덧 내 것이면서 동시에 완전히 남의 것이다.

예를 들어, 몇몇의 똑똑한 여자들은 심각하게 페미니즘을 배운 후에 명랑하게 유행의 강물 속에 몸을 담근다. 그러니까, 괴테나 짐멜의 낭만적 여성관이 씨알도 먹히지 않는  그곳에서부터 미래의 인간을 조망할 새로운 시야가 트인다. 마찬가지로 보드리야르나 벡(U. Beck)에 의하면, 세계화된 소비 자본주의 속의 개인은 시장의 일반명령에 순응해서 결국 존재의 체계적 표준화에 이르는 길일뿐이다.

리프킨처럼 자기실현욕망과 소비욕망의 성공적인 결합을 얘기하는 이들은미래의 이데올로그로 뻔질나게 무대 위에 올려지겠지만, 언젠가는 후쿠야마처럼 자신의 언설로부터 꽁지 빠지게 도망 다닐 신세에 처하고 말 것이다. 그렇다면 ‘실존을 미학적으로 규범화·양식화하기’(푸코)가 제법먹힐 것이라는 생각은 어떤가. 엄밀히 말하자면, 그것은 미시마 유키오나 체 게바라의 세대에서 이미 멈춰버린 신화다. 오래 전에 캠벨(J. Campbell)이 ‘자본주의적 미래 속에는 신화가 없다’고 했던 식으로, 이제 개인의 실존이나 人紋으로 귀속하는 미학은 없다.

중세를 내팽개치고 계몽의 마당 속에서 해방과 자유를 일구어온 현대의 개인들은 다시 새로운 주인을 즐겨 섬긴다. 효율과 편리를 앞세운 갖은 기계들이 강박적으로 분화하고, 그 분화에 적응해야만 하는 개인들은 반인격적으로 기능화된다. 영어도 수학도 기능이고, 연애와 혼인도 기능이고, 가족도 사회도 기능이고, 몸도 정신도 기능이고, 부처도 예수도 기능이다.

이 사이, 기계적 기능주의에 저항하는 일부의 개인들은 기계와 자본의 체계로부터 ‘더 개인적인 것’을 구원하기 위해 용을 쓰고 과장을 떨고 짐짓 심오한 체한다. 그러나 ‘판타즈마고리아같은 도시자본제적 삶의 양식’(벤야민) 속에서 애써 구한 ‘개인적인 것’은 실은 그 ‘누구’의 것도 아니다. 그것은 체계의 것이며, 유행의 단말기이며, ‘모방 그 자체’(R. 지라르), 혹은 한갓 환상이다. 미래의 개인, 그것은 절망적인 해방이며 해방된 절망이다; 개인의 구원을 희망하되, 그 구원이 절망임을 늘 한 발 늦게 발견하는 강박이다.

김영민/ 철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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