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PDATED. 2024-03-29 18:20 (금)
대표작 없는 ‘잔치’… 미술 문화 성숙에도 역효과
대표작 없는 ‘잔치’… 미술 문화 성숙에도 역효과
  • 하계훈/ 단국대 대학원 겸임교수 · 미술평론가
  • 승인 2007.10.08 13:44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미술_‘블록버스터 전시’ 비평: 오르세 미술관전(예술의 전당), 모네전(서울시립미술관), 비엔나미술사 박물관전(국립현대미술관)

□  발타자르 데너, ‘늙은 여인’, 37×31.5cm, 캔버스, 1721년 이전.
우리나라에서 미술관 전시문화가 제법 활발하게 펼쳐지기 시작한 것은 1990년대에 들어서서부터다. 특히 1990년대 후반부터는 소위 ‘블록버스터 전시’라는 이름으로 외국 대형 미술관의 중요한 소장품들이 한국에 소개되는 일이 심심치 않게 생겨났다. 이러한 대형 전시가 일본에서는 이미 그 이전부터 개최돼 비교적 성공을 거두어왔다. 특히 일본에서는 신문사나 방송사가 주축이 돼 다양한 블록버스터 전시를 개최해왔다. 자체 홍보 매체를 가진 주최 측의 사업인 만큼 대규모의 관람객을 끌어들이는 데 유리했으며 일본 특유의 제노마니아(xenomania) 성향도 이러한 전시를 성공시키는 원인으로 작용한 듯하다.

그러나 우리나라는 1990년대에 들어설 때까지 몇 가지 사정때문에 미술관들이 블록버스터형 전시를 수용하기 어렵다고 판단해왔다. 무엇보다도 예산 부족이 문제였다. 그런데 1990년대부터 이런 대형전시를 기획하는 외부 기획사들이 등장하면서 예산 면에서나 다른 측면을 고려해볼

□  모네, Water Lilies, 87.6 x 92.7cm, Oil on canvas, 1906.

때 대형 전시를 시도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들기 시작했던 것 같다.

모두가 동의하는 것은 아니지만 원래 블록버스터라는 말은 극장 공연에서 사용하던 용어로서 소위 ‘히트를 친’ 공연을 가리키는 말이었으며, 이 용어가 확대돼 영화 산업에도 비슷하게 적용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마치 2차 세계대전 중에 사용된 한 블록 전체를 날려버릴 정도의 위력을 가졌던 폭탄처럼 한 공연이 엄청나게 성공함으로써 그 여파로 공연장이 집중돼 있는 시내의 한 블록 내에서 관람객들을 빨아들이며 다른 공연들의 흥행을 초토화시킨다는 의미로 사용된 것이다.

미술에서 블록버스터 전시의 기원은 뉴욕의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의 관장이었던 토머스 호빙(Thomas Hoving)으로부터 찾아볼 수 있다. 1967년부터 10년간 메트로폴리탄 관장직을 맡았던 호빙은 관장으로 임명되자마자 대대적으로 시설을 확장하고 리노베이션을 감행했으며 소장품을 공격적으로 사들였다. 그의 소장품 수집 정책은 예산 범위를 벗어나는 세계적 수준의 미술품을 사들임으로써 이사회와 마찰을 빚기도 했지만, 결과적으로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이 오늘날과 같은 세계적인 미술관의 명성을 갖게 만든 공로자로 평가받기도 한다.

호빙은 자신의 미술관이 더 이상 미술사학자와 큐레이터의 연구를 위한 폐쇄적인 미술관으로만 머무르기를 원하지 않았으며, 더 많은 일반 대중들이 미술관의 문턱을 넘어오게 만들기 위해서는 보다 대중적으로 흥미를 끌 수 있는 대형 전시회를 개최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의 재임 중에 수집한 미술품들을 이용해 개최한 초대형 전시들은 많은 관람객들을 끌어들였으며 이런 전시가 유럽으로도 전파돼 영국의 대영박물관이나 프랑스의 루브르박물관 등에서도 이집트미술이나 인상파미술품 등을 가지고 블록버스터형 전시를 개최하기 시작했다.

올해 우리나라에서는 오르세 미술관전(예술의전당 미술관), 모네전(서울시립미술관), 비엔나미술사박물관전(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분관) 등의 블록버스터형 전시를 통해 수십만 명의 관람객들을 동원하고 있다. 초기와는 다르게 요즘 개최되는 블록버스터형 전시들은 대부분 관람객 동원에 성공하고 있는 편이다. 그런데 이처럼 외형적인 성공에도 불구하고 전시를 바라보는 시각은 대체로 부정적이다.
물론 일부에서는 먼 외국의 현장에 가야만 볼 수 있었던 진귀한 미술품을 국내에서 다수의 관람객에게 쉽게 보여줄 수 있는 좋은 기회라는 긍정적인 의견을 표시하고 있기도 하지만, 결과적으로 금전적 이익 외에는 투자비용에 대비해 미술관에 남는 것이 별로 없다는 비판적인 시각이 더 우세하다.

근래 개최된 블록버스터 전시를 자세히 살펴보면 전시회 타이틀에서 표방하는 대표작가의 작품이 극히 일부 포함되거나 그 작가의 대표작이라고 부르기 어려운 태작들이 다수 포함되는 경우가 대부분이라는 게 중론이다. 따라서 미술사적으로도 의미를 찾기가 어려우며 전시회가 거듭되더라도 중복되는 이벤트에서 얻는 진행의 노하우 축적 정도의 성과 이외에 미술사적 연구의 누적이나 미술문화 전반의 질적 개선과 같은 효과는 기대하기 어렵게 된다.

블록버스터형 전시의 문제점은 무엇보다도 그 주도권이 개최 미술관에게 있지 않다는 점이다. 대부분의 경우 이러한 전시들은 외부 기획사나 신문 또는 방송사가 수익사업의 관점에서 해당 미술관을 사실상 대관하는 형식으로 진행된다. 해당 미술관에서 일부 예산을 투입하는 경우도 있지만, 수십억 원이 소요되는 초기비용을 투입할 수 있는 공공 미술관이 거의 없다보니 어쩔 수 없이 미술관은 기획사의 진행 계획에 종속될 수밖에 없다. 이렇게 되면 미술관의 공익적 성격이 지나치게 상업화되고 미술관 내부의 학예인력이 비중 있는 전시에서 주변으로 밀려나 외부 기획사의 지휘를 받는 우스꽝스런 상황이 발생하기도 한다.
미술관에서의 전시는 기본적으로 해당 미술관에서 보유하고 있는 소장품을 중심으로 이뤄져야 한다. 블록버스터형 전시도 해당 전시가 미술관의 소장품과 성격이 어느 정도 연관성을 가져야만 내부 인력의 참여도 가능하고 전시회 개최 예산도 절감할 수 있다. 자신의 미술관 소장품을 바탕으로 전시를 기획하고 다른 미술관에서 일부 작품을 빌려오는 형식으로 전시가 기획될 때 두 기관 간의 협력과 교류가 효과적으로 이루어질 수 있으며 학예인력의 역할도 제대로 기능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경우는 유럽이나 미국 등의 유명 미술관 소장품을 일방적으로 빌려오는 형식으로 전시회가 진행됨으로써 작품을 대여해주는 외국 미술관에서 요구하는 대로 비싼 대여료를 지불할 수밖에 없다. 이 때문에 전시의 학문적, 질적 내용은 차치하고 비용에 대한 압박이 클 수밖에 없으니 무슨 수를 써서라도 많은 관람객을 동원해야 한다는 압박을 받게 된다. 특히 블록버스터형 전시에서 수십만의 관람객을 동원하기 위해 과장 광고를 하거나, 경우에 따라서는 학생들을 단체로 동원하면서 불미스런 소문도 들린다. 방송사나 신문사가 전시회 주최자가 되면서 자사의 전시사업을 교묘하게 기사화해 관람객 몰이에 나서기도 한다.
앞으로도 적지 않은 수의 대형전시가 비슷한 형식으로 계획돼 있다. 전시를 개최해왔던 미술관으로서는 블록버스터 전시가 지닌 양면성을 제대로 파악해 단점을 극복하고 장점을 강화할 필요가 있다. 이를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미술관의 내부 인력이 중심이 돼 장기적인 준비계획 아래 보다 철저한 큐레이터쉽을 바탕으로 관람객을 맞이해야 한다. 특히 미술관 본래의 사명인 공익성이 상업성에 의해 훼손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할 것이다.

하계훈/ 단국대 대학원 겸임교수 · 미술평론가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