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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외동향]독일_‘새로운 무신론자’에 관한 논의
[해외동향]독일_‘새로운 무신론자’에 관한 논의
  • 교수신문
  • 승인 2007.10.08 1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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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 테러’ 경험한 국가들로 확산 추세

9·11 테러 사건은 사적 영역에 봉인됐던 종교를 다시 세계사의 무대로 등장시킨 상징적 사건이 되었다. 종교와 폭력이라는 오래된 주제가 새로운 역사적 맥락 속에서 재조명되고, 기독교, 유대교, 이슬람교 등 일신교의 비개방성과 비타협성에 대한 비판적 연구가 성행되더니, 최근에는 종교 자체를 부정하는 새로운 무신론자들의 논쟁적 서적들이 쏟아지고 있다.

샘 해리스의 『종교의 종말』(2004), 미셀 옹프레의 『우리는 신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2006),  리차드 도킨스의 『신이라는 망상』(2006), 다니엘 데닛의 『마법 깨뜨리기:자연현상으로서의 종교』(2007), 크리스토퍼 히친스의 『신은 위대하지 않다: 종교는 어떻게 모든 일에 해악을 끼치는가』(2007) 등은 새로운 무신론적 경향을 대표하고 있다.

흥미로운 사실은 미국, 영국, 프랑스, 스페인, 네덜란드 등 종교에 의한 테러를 경험한 국가들에서 이들의 주장이 힘을 얻고 있다는 점이다. 반면에 페터 하네와 에바 헤르만으로 대표되는 보수적 분위기와 비교적 온건한 종교적 성향을 지닌 독일에서 무신론적 종교비판은 그리 과격하게 이루어지고 있지는 않다. 그러나 사태의 중심에서 벗어나 있는 독일의 지정학적 위치는 새로운 무신론을 비판적으로 고찰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주는 장점이 있다.

<슈피겔>은 지난 5월 “모든 게 신 탓이다! 새로운 무신론자들의 십자군 전쟁”이란 제목으로 각국의 무신론적 종교 비판을 점검하는 13페이지 가량의 글을 실은 특집호를 발간했다. 그 글에서 알렉산더 스몰트은 최근의 무신론적 주장에서 새로운 점은 “포교적 아비투스”에 있다고 지적한다.

만약 신이 없었다면, 자살폭탄 테러도, 9·11 사태도, 십자군 전쟁도, 마녀사냥도,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간의 갈등도 없었을 것이라는 “복음”을 전파하며 종교 자체를 파괴하기 위해 전 세계의 무신론자들의 “커밍아웃”을 촉구하는 도킨스의 주장은 역설적으로 그가 비판하는 근본주의자들의 주장과 닮아 있다.
최근에 독일에서도 번역된 도킨스와 히친스에 대한 서평에서 저명한 종교학자인 프리드리히 빌헬름 그라프 역시 이들이 지닌 맹점을 지적하고 있다.(쥐트도이체 차이퉁, 2007.9.11)

그는 종교의 역사는 종교 비판의 역사와 함께 진행되어 왔다는 점에서, 새로운 무신론자들의 주장은 전혀 새로울 게 없다고 본다. 특히 도킨스의 주장은  종교 비판의 역사에서 볼 때 그가 원전에 대한 이해 부족 때문에 무자비한 무신론자들로 오인하고 있는 흄이나 칸트의 수준에 훨씬 미치지 못한다고 평가한다.
도킨스는 종교를 “문화적 유전의 단위”인 “밈(Meme)의 부산물”로 해석한다. 그라프는 다윈주의를 자연 뿐만 아니라 정치, 문화, 종교, 예술 등 사회의 모든 분야에 통용되는 만능열쇠로 사용하는 도킨스가 종교적 상징과 과학 이론 간의 차이점을 인식하고 있지 못하다고 지적한다.

도킨스는 믿음과 지식을 동일한 해석 지평 위에 올려놓는 실수를 저지름으로써 종교의 탈정치화를 통해 이룩한 서구의 근대화 과정을 역행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과학 자체를 일종의 신앙으로 만들고 있다고 비판한다. 그런 점에서 과학으로 위장한 창조론인 “지적 설계론(Intelligent Design)”-대표적 이론가로 마이클 비히의 『다윈의 블랙박스』(2006) 역시 이러한 비판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그라프는 새로운 무신론자들 중 상당수가 모든 종교적 상징언어의 “근본적 양가성”을 무시하고 있다고 지적한다. 즉 종교는 신과의 합일을 통한 자기절대화의 경향을 가질 뿐만 아니라 자기제한의 치유적 잠재력도 지니고 있는데, 무신론적 종교 비판가들은 한 측면만을 일방적으로 해석하고 있다는 것이다.

종교를 둘러싼 최근의 논쟁은 창조론과 진화론 간의 해묵은 싸움이 아니라 종교의 외피로 은폐된 정치 투쟁이자 문화 논쟁으로 이해하는 것이 바람직해 보인다. 종교에 대한 문제제기는 자본이 전지구화된 현 세계 질서의 정치적, 경제적, 문화적 위기에 대한 문제제기이기 때문이다.
종교는 분업화를 통해 자율성을 획득한 사회의 부분체계들의 독자성을 해치지 않는 선에서 전체에 대한 질문을 제기하고, 복잡한 현실에 의미를 부여함으로써 세계가 다시 안정된 질서를 찾게 만드는 기능을 가진다는 점에서 폐지해야 할 대상이 아니라 오히려 진지한 논의의 대상이 된다.(그라프,『신들의 복귀』, 2004)
윌프레드 캔트웰 스미스는 『종교의 의미와 목적』(1962)에서 최근에 문제가 되고 있는 기독교, 유대교, 이슬람교 등의 일신교가 지닌 “상호 대립적인 이념 공동체”로서의 종교 개념은 서구의 근대화 과정의 산물임을 지적한 바 있다. 또한 얀 아스만은 이집트인 모세가 인류의 종교 역사상 최초로 진정한 종교와 거짓 종교를 구분한 것은 흔히 오해되듯이 타인에 대한 폭력과 증오의 근원이 아니라 인류가 정신적인 완성을 향해 나아가는 이정표를 세웠다는 점에서 획기적 사건으로 평가한다.(『모세의 구분』,2003)

문제가 되고 있는 종교 자체를 없애자는 새로운 무신론자들의 파괴적 주장과 달리, 종교가 원래 “쿨”하지 못한 것이니 “일신교가 지닌 에너지의 평화로운 사용법”을 모색하는 일이 시급하다는 철학자 페터 슬로터다이크의 주장은 오히려 더 흥미롭게 보인다.(디 차이트, 2007.02.08.)

이영범 / 독일통신원·만하임대 박사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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