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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주체성의 역설
비주체성의 역설
  • 김상봉 / 서평위원·철학자
  • 승인 2001.11.14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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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수상]
‘안티호모에렉투스’(박동환 지음, 길 刊)라는 책이 나왔다. 무슨 자기혐오일까. 책표지에도 뒷장 어디에도 지은이의 이름이 없다. ㅂㄷ이라는 부호가 끝에 있을 뿐. 꼼꼼히 살펴보니 ㅂㄷ은 철학자 박동환 연세대 교수(철학)의 머리글자이다. 그가 이처럼 익명성에 집착하는 것을 보는 것은 적잖이 안쓰러운 일이다. 평생을 자기가 누구인지, 우리가 누구인지 물어온 사람이 도달한 곳이 자기중심주의의 부정과 익명성이었다니.

그러나 이 역설은 그가 보여주는 우리 모두의 운명이다. 우리는 한 번도 온전한 의미의 주체로서 자기를 정립해보지 못한 민족, 언제나 타자 속에서 자기를 상실한 채 살아온 민족이었다. 그리하여 우리는 한 번도 나로서 또는 우리로서 존재한 적이 없는 민족이었다. 그런데 바로 이러한 우리의 비주체성이 역설적이게도 오늘날 우리를 다른 사람들이 아닌 우리로 구별하게 하는 종차이다. 그리고 이 차이가 박동환이 머물러 사유하는 지점이다.

그의 진단에 따르면, 우리가 서양사람일 수도, 중국사람일 수도 없는 것은 바로 이 차이 때문이다. 서양철학이든 중국철학이든 지금까지의 철학은 ‘도시의 철학’이며 인문주의 또는 자기중심주의 철학이다. 그것은 인간이 인식할 수도, 제어할 수도 없는 ‘무한’에 불안정하게 의존하고 있는 존재임을 애써 외면하고 인간 존재를 어떤 허구적인 자립성의 바탕 위에 세우려 한 철학이었다. ‘안티호모에렉투스’는 이점에 관한 한 서양철학과 중국철학 사이에 아무런 본질적인 차이가 없음을 잘 보여주고 있다. 두 철학은 인간의 절대타자에 대한 의존성을 지양하고 개체로서든 집체로서든 인간을 자립적인 주체로서 정립하려 했다. 주체란 그렇게 허구적인 자립성 속에서 이해된 자기였던 것이다.

박동환은 그런 주체를 해체하려 한다. 그리고 나를 다시 원시적인, 아니 시원적인 의존성 앞에 마주 세우려 한다. 이를 통해 그는 자기 존재의 보다 근원적인 진리를 드러내려 한다. 아무튼 주체는 자기반성 속에서 자기에게 돌아옴으로써 자기가 된다. 그런 한에서 자기반성은 자기정립이다. 그런데 박동환이 보여주는 것은 반성 속에서 주체가 일면적으로 정립되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지양돼버린다는 것이다. 주체의 자기복귀는 단순한 자기정립과 자기동일성이 아니라 도리어 자기부정으로 귀결된다. 그리고 이것이야말로 참된 의미에서 주체의 진리이다. 자기반성의 끝은 부정된 자기이다. 그리고 자기의 부정 속에 도리어 자기의 참 진리가 있다.

이것이 박동환이 언제나 타자성 속에 함몰돼 왔던 우리 겨레의 존재역사를 읽어내는 방식이다. 그리고 이와 더불어 비로소 우리도 철학할 수 있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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