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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면으로의 초대] : 건축가 곽재환, 은평구립도서관과의 대화
[지면으로의 초대] : 건축가 곽재환, 은평구립도서관과의 대화
  • 전미영 기자
  • 승인 2001.11.13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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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11-13 18:17:15

서울시 은평구 불광동. 북한산 자락 밑에 자리한, 서울의 수많은 동네 중 하나인 이곳, 불광동 사람들은 요즘 몹시 행복하다. 쾌적한 공부방이 생긴 학생들이 그렇고, 집안 걱정 잠시 접고 한가하게 소설책 읽을 한적한 공간이 생긴주부들이 그렇고, 석양 무렵 이제 막 뛰기 시작하는 아기를 앞세워 포근한 잔디밭으로 산책 나온 젊은 아빠들이 그렇다. 그 뿐이랴, 아늑한 야외쉼터에서는 연인들의 밀어가 포실포실 피어난다. 2001년 10월 15일에 문을 연 은평구립도서관.

불광동 야트막한 산자락에 터 잡은 뒤 4년이라는 긴 시간을 기다려 비로소 맞은 도서관이 바로 은평구민들을 살맛 나게 하는 소중한 공간이다. 은평구립도서관은 완공 전부터 많은 사람들의 각별한 관심과 애정을 받았다. 2001년 한국건축문화 대상에서 본상을 받았다는 것 말고도 상상력이나 주변과의 조화하고는 아무런 상관없이 지어진 투박하고 폭력적인 수직수평의‘공공건물’에서 벗어난 새로운 건축미학으로 주목받고 있다.

하루에 이곳을 찾는 이들은 2천여 명이 넘는다. 그 2천 명이 열람실 구석구석에 들어앉아 책만 들여다보고 있다고 생각한다면 오해도 이런 오해가 없다. 많은 사람들이 도서관에 ‘놀러’ 온다. 은평구립도서관을 아름답게 만들어낸 건축가 곽재환씨(49세·맥 건축사무소 소장)에게, “사람들이 도서관 와서 즐겁게 놀다간다”는 말처럼 흐뭇한 말이 없다. 그보다 더한 찬사는 없다.

“자본주의사회에서 모든 건축물은 슈퍼마켓처럼 만들어집니다. 얼마나 많이 채워 넣느냐, 얼마나 편리하게 이용하느냐, 오직 ‘기능적’인 관점에서 건물이 지어지지요. 그렇게 만들어내는‘현대적 건물’은 박스형, 창고형의 건물들입니다. 도서관이 인간에게 왜 필요할까요. 아름답고 행복하게 사는 것에 지식이 쓰여야 하지 않을까요.”

은평구립도서관에 담긴 그의 믿음은 바로 여기에서 출발한다. “바로 ‘이 장소’에서 건물은 어떠해야 하는가”라는 물음. 건물이란, 지형지세에 순응하고 흐름을 거스르지 말아야 한다는 그의 믿음이 기본이 되어 도서관 뒤로는 산책로가 흐르고 양옆으로는 토박이 집들이 오밀조밀 사이좋게 어울린다.

은평구립도서관이 건축가들에게 ‘탐구’의 대상이 되고, 지방 건축학도들이 공부를 위해 단체관람 오는 이유는, 건축물 자체가 가진 독특한 구조와, 자연과 어울린 구조가 빚어내는 아름다움 때문이다. 안과 밖의 구별이 없고, 지붕과 담도 없다. “사람에게 들숨과 날숨이 있듯이안과 밖이 서로 호흡하면서 모두에게 열린 장소이기를” 바라는 건축의도가 구현된 셈이다.

양옆으로 계단을 따라 오르면 제일 먼저 출입구 앞에 솟은 5개의 원기둥이 반긴다. 누군가가 ‘헤르메스의 기둥’이라는 이름을 붙인 이 5개의 솟대는 五感, 五方, 인의예지신, 지상에서 수직으로 뻗는 의지의 상징 등 무궁무진한 뜻을 담고 있다. 또 뒷산과 도서관 옥상을 이어주는 ‘夕橋’는 건축가가 심혈을기울인, 작지만 중요한 공간이다. ‘저녁으로 나아가는 다리’라는 이름처럼 도서관의 사색이 뒷산의 산책로로 이어지고, 멀리서 보면 꼭 책을 세워놓은 것 같은 사각 기둥형태의 ‘凝夕臺’ 역시 ‘석양을 응시하는 누대’라는 이름에 걸맞게 석양이 가장 아름답게 보이는 자리이다.

렇듯, 은평구립도서관은 정오의 태양보다 저녁놀이, 한낮의 들끓음보다는 해질 무렵의 사색이 어울리는 공간이다. 놀이하고, 사색하고, 사랑을 속삭일 수 있는 공간. 거실, 서재, 마당이 되어 모든 사람이 공유하는 열린 공간이다.

건축가 곽재환씨의 바람 역시 그것이다. 가벼운 마음으로 도서관에 찾아와 안과 밖을 에둘러 산책하고 잔디밭에 앉아 편히 쉬고, 그리고 석양을 바라보며 ‘자연이 주는 메시지’ 하나 받고 가는 것. 시인 함성호는 은평구립도서관에 대해 “충분히 서정적이며, 서사적이고, 상징적인 의미들로 가득 차 있다.

작가가 구축하려 했던 보이지 않는 것으로서의 건축 바깥에 있는 무엇과, 자연의 지세에 순응하며 구축된 보이는 것의 관계를 이 건물은 절묘한 긴장으로 이뤄내고 있다”고 평한 바 있다. 모름지기, 공공건물이란 이래야 하지 않겠는가. 권위로 우뚝 서서 내려다보지 말 것이며, 문 걸어닫고 차별하지 말 것이다. 이래저래 은평구 주민들은 요즘 참 행복하다.
전미영 기자 neruda73@kyosu.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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