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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과 삶 휘감은 前衛美學을 호명하다
예술과 삶 휘감은 前衛美學을 호명하다
  • 이명원 / 전 서울디지털대 교수·문학평론가
  • 승인 2007.10.01 11:0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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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_ 80년대 미학을 넘어서]

 
80년대는 아련한 추억인가, 현재 진행형인가. 1980년과 1987년의 현실 공간은 한국사회의 절차적 민주화를 촉진하는 매개체이자, 기폭제였다. 그것은 현실과 이 현실에 조응하는 미적 담론까지 지배하는 커다란 물질적 상상력이었다. 학계에서 제기되는 87년체제 극복론도 이 자장권에서 멀지 않다. 과연 80년대의 미학은 어떤 모습이었을까. 그것이 남긴 트라우마는 무엇인가.

이른바 ‘87년 체제의 극복’이라는 담론이 횡행하고 있지만,
적어도 미학적인 차원에서의 진지한 논의나 검토가 수행되지 않고 있는 현실은 아쉬운 일이다.

그런 가운데 최근에는 문학계에서 자못 활발하게
‘근대문학의 종언’을 둘러싼 논의가 펼쳐지고 있다.

그런데 생각해 보면 이 근대문학 종언론이야말로 그 문제의식이
지나간 80년대의 문학적 질서의 총체적인 붕괴를 환기시키는 문제라는 점에서,
우리는 1980년대와 2000년대를 마주보게 만드는 대화의 기술을 숙고해야 한다.

알고 있는 대로 80년대는 문학예술이 단조로운 예술계의 바운더리를 뛰어넘어
현실 전체로 확산될 수 있다고 믿었던 시기였다. 80년대의 문학예술은 기왕의 순수예술론이
견지했던 사회영역과의 분리를 통해 달성되는 ‘예술의 자율성’ 개념을
강력하게 부정하는데서 출발한다.

예술가들은 1980년 광주의 비극에서 한국화된 아우슈비츠 이후의 절규의 형식을 발견했다.
예술가들은 광주 이후에도 서정시는 쓰일 수 있는가라고 물었고,
비슷하게 화가들은 아틀리에에서의 쾌적한 미적 관조와 몽상이 가능하냐고 물었다.

흉폭한 시대 앞에서 예술은 과연 무엇을 할 수 있는가라는 물음은
자연스럽게, 예술과 예술가, 예술제도 모두에 대한 근본적인 회의를 낳았다.
이 시기에 등장한 젊은 예술가들은 위계화된 예술계의 구조와 규율,
그리고 미적 규범 모두가 강림한 비극 앞에서 사치스럽다기보다는 수치스러운 것임을
강렬하게 자각했다.

그들은 현실과의 분리를 통해 달성되는
예술의 자율성 개념에 철저히 저항했으며,
반대로 현실과 예술 모두가 유기적으로 공진화하는 미래를 향해
예술적 실천이 조응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런 젊은 예술가들이 미학적 규범으로 ‘반영론’을 선택한 것은
어쩌면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그들은 예술이 사회적 생산의 일부를 이루면서도,
그 생산과정 자체를 근본적으로 성찰하고 변혁하는 실천의 일종이라고 생각했다. 그들은 예술적 오브제를 이루는 대상이 천재의식으로 무장된 예술가의 영감에
기반하는 것이 아니고, 주어진 현실 전체라는 생각에 도달했다.

그런 생각에 도달함과 동시에 그들은 예술의 생산과 수용과정 전반에 개입하는
주체인 민중적 삶의 중요성에 대해 인식하기 시작했으며, 예술의 참된 주체로서의
민중 주체의 예술론이 확산되는 계기를 맞았다.  그런 변화된 예술에 대한 인식은
다채로운 변화를 이끌어냈다.

가장 중요한 양상은 예술의
자율성 개념에 대한 회의가 깊어지면서 반대급부로 부상된 ‘변혁적 실천으로서의
예술운동’이라는 개념이었다. 당시의 예술가들은 예술작품의 생산과정과
그것의 수용과정 전체가, 군사파시즘으로 상징되는 폭압적인 지배이데올로기의
해체를 추동하는 것과 동시에, 당대에 급격하게 확산된 사회과학 담론의
문제의식을 예술운동에 용해시켜, 예술을 한국사회 변혁운동의 일부로
배치시키는 것을 당연시했다.

그런 까닭에 비평의 영역에서는 예술운동의 주체와 실천방식을 둘러싼
다채로운 이론들이 백가쟁명하는 양상을 보여주었다.

기왕의 진보적인 문학운동의 기반으로서 민족문학론(백낙청)에 대한
계승과 극복을 둘러싸고, 민중문학론이 등장하더니, 그 이후에는
이에서 분화된 민중적 민족문학론(채광석, 김명인), 민족해방문학론(김형수, 백진기),
민주주의 민족문학론(조정환), 노동해방문학론(조정환, 정남영)과 같은 다양한
이론의 분화가 급진적으로 진행됐다. 이러한 이론의 분화는 그것 자체가
사회변혁 이론의 분화양상에 조응하는 문학적 대응의 일종이었다.

이러한 사실과 함께, 종래의 부르주아적 예술생산의 주체인 예술가 개념이
급진적으로 해체되었다는 것 역시 주목할 만하다.

부르주아적 예술제도 안에서의 예술가란 질료에 대한 오랜 수련과 아카데미에서의
지루한 훈육과정을 통해서, 또 제도적인 예술가의 선발과 공식적인 승인제도 아래서,
예술가로서의 자격을 획득함과 동시에 작품 생산 자체가 개인의 독창적인
영감과 천재의식의 발로라는 관념이 지배적이었다.

그런데 80년대의 예술계는 그러한 예술제도를 근본적으로 부정함과 동시에
현실과 예술의 이론적 분리장벽을 철폐하는 양상이 광범위하게 나타났다.

공식적인 등단절차라든가 미전에서의 입상경험이 없는 문인과 화가의 등장은 물론이거니와, 이들은 기왕의 제도 예술권에서는 ‘심미적인 것’이라고 인정될 수 없는
삶의 현장을 예술적 광장으로 진입시켰다. 그런 동시에 이들은
현실로부터의 직능적 전문성과 분리에 의거하고 있는 예술가 개념을 해체시켜,
삶의 현장에서 생산적 노동에 전념하는 것과 예술적 실천에 가담하는 일의
차별성을 해소시켰다. 그 대표적인 존재가 시인 박노해였는데,
공장 노동자가 그 노동의 세계를 기왕의 시적 문법과는 무관한 방식의 육성으로
노래함으로써, 이른바 민중미학의 새로운 가능성을 선보였던 것이다.

그런가 하면 80년대의 예술가들은 고전적인 장르규범을 일거에 파괴하고자 했다.
문학계에서는 지배적이고 공식화된 장르로 전혀 존중받을 수 없었던
수기와 르포, 일기 심지어는 집회선전물까지 ‘작품’으로 간주되면서
이른바 장르확산운동이 벌어졌고, 미술관에 갇혀있던 회화가 해방돼
광장과 거리집회에서의 걸개그림으로 또 벽화로 변신하는 새로운 표현의 양식화가
이루어졌다. 그런 과정과 거의 동시에 예술적 생산의 초월적 주체로서의
개인 예술가 관념 역시 해체되기에 이르렀는데,
80년대에 이르러 ‘집단창작’과 같은 새로운 예술생산 방식에 대한 논의와
실천이 지속되었음은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일이다.

‘미적 반영론’에 입각한 예술적 실천이 80년대에 광범위하게,
또 그 표현의 강도에 있어서만큼은 주류미학으로서의 위치를 점유한 것처럼 보이지만,
이 시기에는 또 다른 예술적 흐름도 엄연히 존재하고 있었다. 그것을 우리는
‘해체론’ 또는 ‘해체주의 미학’으로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반영론에 입각한 예술적 실천이 이른바 ‘행동주의’와 결합해, 민중적으로 하방하거나
광장을 향해 개방돼 있었다면, 해체주의 미학은 그러한 급진적인 방향전환을 할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적어도 억압적인 파시즘 권력에 대한 저항의지를
포기할 수 없었던 모더니즘적 또는 지식인들의 내향적 저항의 미학이었다.

시인 황지우의 형태파괴적 시쓰기가 이러한 경향에 해당한다.
황지우는 종래의 서정시가 내포하고 있던 자아와 세계의 순연한 조화로움이라는 관념에
저항하면서도, 민중문학의 급진적인 현실로의 경사에도 경계의 태도를 취했다.

그러면서도 그는 80년대의 군사파시즘에 대한 저항을
양식화된 시 개념의 장르 내적인 해체와 파괴라는 기법적 혁신을 통해 전면화하고자 애썼다. 그는 서정시가 내포하고 있는 ‘고백’의 포즈를 취하면서도,
일종의 ‘醜의 미학’이라고 할 수 있는 부끄러움과 환멸의 내적 풍경을 가감 없이
드러내는 것과 동시에, 종래에는 非시적인 것으로 간주되던 담화양식과 소재를
과감하게 자신의 시에 도입함으로써, 그의 표현을 빌면 ‘파괴의 양식화’를 가능케 했다. 
그런 점에서 보자면, 80년대의 예술은 반영론이냐 해체론이냐를 막론하고,
억압적인 파시즘 체제를 고발·교정·전복하고자 하는 일관된 의지의 소산이면서,
그 과정의 전후에서 예술과 삶의 일원화 및 공진화를 모색하고자 했던
전위미학으로서의 임무에 충실했다고 판단된다.

이 부분에서 오늘의 현실을 살피건대 가장 아쉬운 부분은, ‘현실’이라는 변함없는
예술적 영감과 생산의 원천으로부터의 분리주의가 오늘날 오히려 강화되고 있는 양상을
띠고 있다는 점이다. 오늘의 예술은 현실의 억압적인 속도성에 전혀 브레이크를 걸고 있지
못할 뿐만 아니라, 대중과의 소통의 정치에서도 차단된 채, 과거보다 더욱 보수화된
형태로의 강고한 제도화와 미적 퇴행의 양상을 보여주고 있다. 현실 속에서 예술이
전위라기보다는 현실의 절대자본주의적 속도를 추수하기 바쁜 후위의 패잔병으로
전락하고 있는 감이 없지 않다. 과연 종언의 시대는 정당한 것일까.

이명원 / 전 서울디지털대 교수·문학평론가


필자는 1993년부터 문학평론가로 활동하고 있다. 성균관대에서 ‘최일수 문학비평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저서로는 『종언 이후』, 『연옥에서, 고고학자처럼』, 『파문』, 『타는 혀』 등이 있다. 서울디지털대 교수를 역임했으며, 현재는 지행네트워크 연구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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