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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명사적 지평 펼치는 존재로 거듭나야
문명사적 지평 펼치는 존재로 거듭나야
  • 교수신문
  • 승인 2007.10.01 1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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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단과 모색] 큐레이터는 누군가

최근 인터넷에 ‘큐레이터’라는 검색어를 치면 관련검색어로 ‘신정아’가 단연 1위로 꼽히고 있다. 실제로 신정아씨 사태로 인해 큐레이터라는 직종에 대한 대중적 관심 내지는 호기심이 증폭되고 고조된 듯하다. 대한민국 사람이면 누구라도 이 낯선 이름의 직업을 공부하게 되는 일종의 ‘지식 효과’처럼 작동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큐레이터라는 직업이 이런 식으로 거국적으로(?) 알려지게 된 점은 정말 유감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2005년에 문화예술 부문에서 유망직종으로 선정된 바 있는 큐레이터가 한 개인의 파행적 행보로 인해 한국적 정치상황과 맞물려 불신과 허위의식의 실체로 비쳐졌으니 말이다(현 대통령 자문 사람입국일자리위원회의 전신인 사람입국신경쟁력특별위원회(2005)에서는 학예사(큐레이터)를 문화예술 부문에서 유망 직종으로 제시한 바 있다. 그 사회적 배경에는 전반적으로 다양성과 창의성이 존중되는 사회 변화 속에서 미래형 일자리는 이른바 ‘지식기반산업’ 분야라는 전제가 있었다). 사실 큐레이터는 아직 직업으로서 사회적 체계가 잡혀있지 못한 상태이다. 또 알려진 것처럼 화려한 모습일 수도 없는 현실에서 그나마 문화예술계에서 고군분투하는 큐레이터들의 노고가 여전히 보상받고 있지 못하는 현실을 생각하면 더욱 그렇다.

모습만 화려한 ‘고학력 저소득’ 직종
아직 우리사회에서 큐레이터란 고학력 저소득 직종이다. ‘고학력’이라 함은 그만큼의 전문성을 뜻하는 것이고, ‘저소득’이라 함은 인력시장의 빈한함 혹은 초라함을 뜻한다. 본래 큐레이터는 박물관·미술관이라는 문화공간에서 요구되는 전시기획과 소장품 연구 등의 업무를 담당하는 전문인력을 말한다. 전시기획과 소장품 연구라는 업무 자체는 실제로 고도의 전문성을 요구하고, 특히 전시기획에서는 창의적 사고와 미술사 및 고고학, 인류학, 그리고 최근에는 문화이론연구 등의 인문학적 기반을 필요로 한다.

하지만 그만한 전문인력을 소화해 낼 인력시장의 공급이 결코 풍부하지 못한 것이 문제다. 기본적으로 박물관·미술관이 비영리 기관인데다가, 그나마도 국공립의 숫자는 턱없이 부족하다. 실제로 미술관의 경우 전체 숫자의 70% 이상이 사립에 해당한다. 어쩌면 사립미술관에서 불안한 고용상태로 일하는 큐레이터들이 ‘고학력 저소득’의 실체일지도 모르겠다. 또한 현대미술 분야에서 독립큐레이터(Independant Curator)라는 이름으로 소속을 두지 않고 활동하는 얼마 되지 않는 그룹이 있는데 이들의 여건 역시 지극히 열악하다.

어떤 의미에서 큐레이터의 사회적 지위란 국가의 전체 수준과 비례한다고 볼 수도 있다. 가령 선진국의 지표로서 큐레이터의 사회적 지위를 둘 수 있다는 주장을 하고 싶다. 선진국의 경우 큐레이터에 대한 교육과 자격증 제도가 비교적 엄격한데, 그것은 그만한 전문인력을 소화해낼 인력시장을 갖추었기 때문이다. 프랑스의 경우 국공립박물관·미술관의 숫자가 절대적으로 많고, 그만큼 큐레이터의 노동과 전문성에 대한 사회적 인식과 존중이 확산돼 있다. 바로 이러한 배경을 주목해보자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한국의 학예사 자격증 제도는 사실 어불성설인 상황이다. 자격증을 갖추더라도 박물관·미술관에 취업이 되는 것이 아니라 일종의 면허증 같은 기능에 그치고 있기 때문이다. 취업의 기회를 제공할 국공립박물관·미술관의 숫자가 적은 상황에서 자격증제도는 건재하나 인력 수급의 현실은 꽉 막혀있는 현실이다. 게다가 3급 학예사 자격증을 취득하려면 석사학위를 받고도 2년 이상을 공인된 박물관·미술관에서 경력을 거쳐야 한다는 점을 고려해볼 때, 취업 기회가 극히 제한돼 있어서 ‘고학력 취득’은 명백한 조건이 되고 있다.

학예사 자격증 제도의 모순이 부른 ‘학위인플레’
독립큐레이터의 위상 역시 사회적 인식 수준과 비례한다. 독립큐레이터란 전시기획을 전문으로 하는 프리랜서의 개념이어서, 학예사 자격증제도와는 별개의 활동 영역이 설정된다. 독립큐레이터의 영역은 현대미술과 디자인, 공예, 엑스포 전시 및 각종 전시 컨벤션 등 다양하며, 제도 공간 외에서의 활동을 주도해 간다. 실제로 외국의 경우 저명한 큐레이터의 활약은 한편으로 현대미술의 새로운 담론과 동향을 만들어가고, 다른 한편으로 자국의 현대미술을 국제적 경쟁력 구도 속에 올려놓는 엄청난 힘을 발휘하고 있다. 이제는 독립큐레이터의 신화가 된 하랄트 제만(Harald Szeemann)의 평가가 그것이다. 실제로 그가 기획한 전시회 자체가 새로운 미술동향을 만들고, 미술사적 가치를 갖는 활동으로 기록되고 있다(이러한 독립큐레이터들은 세계적인 비엔날레와 다양한 전시기획에 참여함으로써 현대미술의 국제 경쟁력을 만들어가고 있다).

박물관·미술관 소속이건 아니건, 본질적으로 큐레이터는 매개자(mediator)의 위치에 있다. 창작의 결과물을 대중에게 연결해 주는 매개 역할을 한다는 것이다. 흔히 21세기를 ‘문화의 시대’라 하는데 그 뜻을 보면 ‘문화 창작과 향유가 풍부하게 이뤄지는 시대’라는 말도 된다. 21세기는 문화 욕구가 증대하면서 예술적 결과물의 사회화(socialization) 과정을 주도하게 되고 이를 충족시킬 직업이 탄생한다. 큐레이터는 바로 이런 성격에 부합하며 이외에도 평론가, 에듀케이터, 문화기획자 등 다양한 영역에서의 문화매개자들이 이에 해당된다고 볼 수 있다. 그런 점에서 큐레이터는 실제로 노동 개념의 변화와 맥을 같이 한다. 문화 영역에서의 활동과 노동 개념이 이전과는 다른 직업의 전문성을 갖게 만드는 것이다. 이러한 성향은 최근 직업에서 새로운 기준으로 제시되는 5F(Free, Flexible, Flat, Fun & Fast)에 적용되기도 한다. 자유롭고 유연하며 창의성을 발휘하면서 기동성을 요하는 활동이라는 점에서 큐레이터가 갖는 직업적 매력이 있다는 것이다.

큐레이터에게 요구되는 자질
흔히 큐레이터를 ‘움직이는 미술관’이라 표현한다. 그것은 업무 자체가 전시 기획에서 실행에 이르는 모든 단계의 활동을 포괄하는 것이어서 그렇다. 기획 과정에서 탁월한 주제 선택과 이에 상응하는 작가 및 작품을 선정하고, 이를 전시 연출로 이어가면서 전시회를 완성해 대중에게 보여주기까지의 전 과정에서 요구되는 활동을 계획하고 실행하기 때문이다. 그 과정에서 큐레이터에게 요구되는 자질은 전시디자이너 및 소장품 관리자, 컬렉터, 교육 담당자, 홍보 및 마케팅 담당자, 행정 인력 등에 이르는 다양한 전문인과의 협업체계를 조직하고 운영할 수 있는 리더십이라 하겠다.

이렇게 해서 만들어진 전시회가 사회적 영향력을 발휘하면서 전시회의 문화생산(cultural production)적 측면을 가능하게 한다. 전시회란 단순히 보여주는 기술이 아니라, 일종의 담론 생산의 과정이고, 또 생각의 ‘정지(pause)’ 작업이기도 하다. 전시를 통해 우리는 우리 자신을 돌아보고, 나와 세계와의 관계를 성찰하며, 그 의미를 각자의 삶에 각인함으로써 풍부한 수용자 문화를 만들어가는 데 그 실천적 맥락이 있는 것이다. 이를테면 우구과학박물관의 전시를 보고 우리가 지구와 환경에 대해, 혹은 우리의 존재에 대해 우주적 구도를 갖게 되고 이에 따른 사유체계를 만들어간다면, 그 자체가 중대한 의미 생산인 것이다.

어떤 의미에서 보면 큐레이터는 전시회를 통해 사람과 사람 사이의 창조적 관계를 만들어가고 풍부한 문화 담론을 제시하며, 그 자체로 한 사회의 문명사적 지평을 펼쳐가는 주체라 고 할 수 있다. 큐레이터라는 직업을 통해 우리는 점차로 증대해가는 ‘전시회’의 의미가 무엇이고, 전시 기획의 실천적 행동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되돌아보는 계기가 됐으면 한다. 지식체계로서의 전시회, 커뮤니케이션 매체로서의 전시회, 그리고 이를 구체화하고 행동으로 만들어가는 큐레이터, 이런 생산적 관계가 실제로 우리의 문화를 진정 의미 있게 만들어 가리라고 믿는다.

박신의 / 경희대 경영대학원·문화예술경영학과


 

필자는 파리 소르본느 대학에서 박사과정을 수료했으며, 현재 경희대 문화예술경영연구소 소장과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위원을 맡고 있다. 대통령 자문 정책기획위원과 문화중심도시 조성위원을 역임했고, ‘미디어시티 서울 2000殿’, ‘주안미디어문화축제 미디어아트殿’ 등 다수의 전시를 기획한 큐레이터로 활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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