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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비평]체계를 ‘애도’하다
[문화비평]체계를 ‘애도’하다
  • 김영민/ 철학자
  • 승인 2007.09.03 16: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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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상후 스트레스 장애 환자들을 치유하고 회복시키는 프로그램에는 보통 ‘애도’의 절차가 포함된다. 이 방면의 고전 『외상과 회복』(1997)을 남긴 허먼도 그녀의 오랜 임상경험을 바탕으로 “애도는 외상 피해자들의 상실에 경의를 표시하는 유일한 방식”이라고 단언할 정도다. 의사라는 직업적 한계를 감안하더라도, 복수의 환상이나 보상의 환상을 털어내고 애도를 통해 피해자의 내면성을 회복하라는 허먼의 진단과 조언은 진보적 페미니스트로서는 다소 의외의 보수적 이데올로기성을 내비친다.
그러나 외상의 체험 속에 상실한 것들을 깊이, 완전히 느끼려는 애도가 상처 입은 자아를 재구성하고 사회적으로 의미 있는 네트워크를 재구축하는 데 필요한 동기와 동력을 준다는 지적에는 폭넓은 생산적 함의가 번득인다.
물론 애도의 치유력은 종교적인 지평에 닿아 있다. 임권택의 ‘축제’(1996)가 흥미롭게 형상화했고, 또 장제(葬祭) 일반이 그렇긴 하지만, 망자의 추도는 주로 살아남은 자들의 치유와 화해를 위한 것이다. 가령 카네티(Elias Canetti)는 역작 『군중과 권력』(1978)에서 종교의 알짜는 예나 지금이나 애도-의식이며, “‘애도의 종교’는 인류의 정신적 살림살이를 위해서 언제까지나 필수불가결한 것”이라고 진단한다.
그러나 야스쿠니신사 문제에서 보듯이, 애도의 종교는 체계 이데올로기를 완결 짓는 신화적 아우라의 공장이기도 하다 (마찬가지로, 허먼의 치유적 여성주의는 정치적 연대를 강하게 주장하면서도 결국 체계의 ‘외부’를 사유하지 못한다) 오에 시노부가 잘 분석해 놓았지만 야스쿠니신사의 국가사회적 기능은 단순한 진혼에서 위령으로, 위령에서 현창으로 옮아가는데, 이 현창의 이데올로기적 아우라는 새우등처럼 그 바닥이 뻔해 보인다. 체계 이데올로기의 현창에 동원되는 사이비 지식인들과 예술가들을 우리는 줄줄이 욀 수도 있다.
그러나 히틀러 암살 모의에 가담했다가 처형당한 비종교화의 신학자 본 훼퍼(1906~1945)는 그 자신 목사이면서도 나치의 국가폭력의 희생자들을 단순히 애도하는 성직자의 역할을 거부하고 그 가해자의 심장을 향해 비수를 들이댔다.
애도에 대한 새로운 문제의식은 상처나 그 애도를 체계 그 자체와 맞대면시키는 일에서부터 생성된다. 의사나 성직자와 같은 치유자들은 대개 체계의 일꾼인지라 체계 그 자체를 문제시하는 게 쉽지 않다.
‘체계’일 수밖에 없는 현대사회 속의 상처는 응당 ‘체계적’이지만, 정작 그 상처를 보살피는 이들은 이미 체계 속으로 너무 깊이 안착해 있어, 그 상처의 체계적 뿌리를 헤아리지 못한다. 이들의 선량한 호의조차 그 상처의 기원을 특정한 사건이나 사고, 우연이나 인간관계로 소급시키곤 한다. 그들은 자아와
체계가 뒤섞인 지점, 그러니까 좌우의 이념적 논쟁을 넘어선 현대적 일상성의 지평을 보지 못하는 것이다.
우선 애도를 자기 상처와 상실에 대한 일종의 의식적(儀式的) 공대로 재서술할 수 있다. 심지어, 특화된 시간과 장소 속에서 카타르시스와 갱신, 나르시스와 화해를 도모하는 그 모든 의식적 행위 일체를 애도라고 부를 수도 있을 것이다. 예를 들어, 기업-체계 속의 정해진 노동량을 채우고 귀가한 k가 촛불이 은은한 화장실의 욕조 속에 몸을 담근 채 가만히 눈을 감고 그 체계의 밖으로 정서적 ‘산책’을 나선다면 그것은 사적 종교의 형식을 갖춘 자기-애도가 아니고 무엇일까? 혹은, 기형도의 그 유명한 말처럼, “사랑을 잃고 (시를) 쓴다”면, 그것은? 혹은 백자의 흰빛 속에서 연녹색 찻잎이 풀어지는 템포로 당신의 마음조차 풀어지는 시공간을 얻는다면?
요가나 명상, 재즈댄스나 야마카시, 식도락이나 연극사랑, 차(茶)사치나 연애, 파워워킹이나 템플스테이 등은 모두 자본주의적 체계와 빚는 마찰과 소모, 피로와 허무를 애도하는 사사화된 종교의 형식들일 수 있다. 혹은 도덕과 형이상학 이후에 현대인들을 사로잡는 ‘실존의 미학적 규약’(푸코)일 수도 있다. 그러나 논의의 벼리는 이 형식들이 체계의 다양성이 아니라 ‘외부성’을  발굴해가는 노릇에 있다. 애도에 대한 새로운 인문학적 상상은 체계의 알리바이로 변한 갖은 애도의 형식에 대한 발본적 비판에서부터 출발할 것이기 때문이다.

김영민/ 철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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