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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통에 허우적대던 조선 사상사 ‘명쾌하게’ 정리
정통에 허우적대던 조선 사상사 ‘명쾌하게’ 정리
  • 교수신문
  • 승인 2007.08.27 10: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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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깊이읽기_<조선 중·후기 지성사 연구> 신병주 지음 | 새문사 | 2007

조선의 사상 또는 주자성리학을 언급할 경우, 일반적으로 ‘의리’ ‘명분’ ‘위정’ ‘척사’와 같이 완강하고 비타협적인 원칙론을 떠올린다. 또한 ‘리’ ‘기’ ‘사단’ ‘칠정’과 같은 형이상학적이고 추상적인 관념론으로 머릿속을 헝클어뜨리는 뜬구름 잡는 학문으로 폄하하기도 한다. 더욱이 대중들은 조선의 성리학자들, 굳이 말하자면 양반(兩班)으로 불렸던 사대부들의 옹졸함으로 인한 당파적 갈등이 국가를 근대의 여명기에 제국주의의 희생물로 전락시킨 원인이라고 생각한다. 과연 그런 것일까? 물론 일반대중의 이해가 맞는다고 동조하거나 조선의 주자성리학이 시대착오적이었다고 단정할 수는 없지만, 그 반대의 논리 역시 단정지울 수 없다. 여기에 관련된 논쟁은 마치 ‘닭과 달걀’의 관계처럼 결론짓지 못하고 오랫동안 반복되고 있다.
〈조선 중·후기 지성사 연구〉는 그 자체가 ‘난마’와도 같이 얽혀있는 조선의 사상사와 이에 관련된 논쟁들을 차분히 이해시키는 ‘상쾌한 단서’이다. 저자는 오랜 기간 일관된 문제의식에 기초해서 조선의 사상사를 총괄적으로 정리하고, 조선 성리학의 또 다른 일면, 즉 박학과 실용의 태도와 이에 기초한 포용력과 개방성을 부각시켰다. 그렇기 때문에 ‘사상사’라는 무거움보다 ‘지성사’라는 생동감을 취한 것으로 보인다.
저자는 남명 조식으로부터 논의를 출발한다(1장 조선중기 남명학파의 활동과 그 역사적 의미). 그것은 조선의 성리학적 통치기제가 200년 가까이 작동한 이후 동맥경화의 증상이 나타나는 시점과 맞물린다.
즉 훈구와 사림의 정치적 길항과 견고했던 통치기제의 합리성이 약화되었던 시기이다. 흔히 기호지역을 중심으로 한 율곡학파와 영남지역을 중심으로 한 퇴계학파를 대표적인 사림으로 이해하는데, 그 결과 동-서의 대립구도와 결부시켜 당파간 갈등의 근원으로 오해한다. 이 점에서 필자는 영남지역의 남명학파와 근기지역의 화담학파간 학문적·처세적 동질성에 주목한다.
저자는 남명의 처사적 삶과 상무적이고 박학적인 학풍에 초점을 맞추어 경의를 신념화하고 학문의 실천을 중시한 진보적인 사림으로 규정한다. 더욱이 임진왜란 시기 영남의병의 대부분이 남명의 문인들이었다는 역사적 사실은 남명학파의 실천적 학문관을 반증한다는 것이다. 이로부터 저자는 조선 성리학이 후대에 갈수록 주자학 일변도의 관념과 이론으로의 침잠이라는 일방성만을 가진 것이 아니라는 점을 부각시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산림(山林)으로서 현실비판의 순기능을 수행한 남명학파의 존재는 현실정치에서 사상적, 정치적 독주 내지 정치적 감각의 한계를 보임으로써 주류로 부상하는데 실패했다는 것이다.
또 하나의 균형추로서 개성과 근기지역을 중심으로 하는 화담 서경덕의 학풍은 기존 성리학의 틀로부터 좀 더 자유로운 ‘자득지학’(自得之學)으로 규정된다(2장 화담학과 근기사림의 사상). 저자는 화담의 학풍이 불교와 노장사상의 철학적 기반을 원용한 북송대 성리학과 유사하다는 전제 하에 상수학과 도가사상을 수용한 개방적이고 절충적인 것으로 평가한다. 즉 화담학파는 ‘자득’이라는 방법론적 특징과 함께 학문적 개방성으로 말미암아 다양한 사회적·사상적 스펙트럼을 절충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그것은 개성과 근기지역, 해안지역을 중심으로 하는 실학자들로 화담의 문인들이 구성된 이유를 설명하는 것이기도 하다. 이로부터 화담과 남명의 교류라는 맥락에서 필자는 조선중기 이후 주자학 일변도의 사상적 주도권이 발휘되었기보다 실용적이고 개방적인 또 하나의 흐름이 존재했음을 설명한다. 그 단서는 성운과 이지함을 사례로 하는 처사들과 실학자들, 그리고 김신국, 남이공, 김세렴을 중심으로 하는 북인관료들에서 드러난다.
저자는 성운의 학풍과 처세가 북인의 사상적 원류로서 남명과 화담의 그것과 공통점을 지닌다고 지적한다(3장 대곡 성운의 학풍과 처세). 이러한 분석은 17~18세기 조선후기 실학의 근원으로 허목, 윤휴, 유형원의 사상적 계보를 거론하는 일반적인 이해를 위한 전제이기도 하다. 즉 16세기 사화기라는 현실정치에서 성운의 도가적인 처사의 삶과 더불어 경학을 강조하고 기상과 절행을 높이 평가하는 태도는 허목과 윤휴로 계승되며, 17세기 근기남인의 학풍형성에 영향을 주었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처사형 사림의 전형은 이지함에서도 찾아진다. 저자는 대중적인 인지도에 비해 학술적으로 연구되지 않은 이지함의 사상사적 위치와 특징에 주목한다(4장 토정 이지함의 학풍과 사회경제사상). 이지함 역시 사화로 인한 은둔적인 삶을 선택한 처사형 학자이며, 이로 인해 의리를 중시하는 정통 성리학과 거리를 두는 태도를 취함으로써 말업인 어업, 상업 등을 중시하는 실용성을 보인다는 것이다.
특히 저자는 사우관계와 통혼에 의한 혈연관계로 맺어진 처사형 사림의 이단적이기까지 한 개방성이야말로 16세기 이후 정학으로 공고화 되었던 정통 주자성리학의 흐름과 구별되는 사상조류라고 강조한다. 그 흔적이 바로 실무형 관료로서 현실정치에 참여했던 북인의 존재라는 것이다. 저자는 광해군 시기에 남명학파를 기반으로 하는 북인정권 창출 이후 더 이상 정국주도권을 행사하지 못했던 상황에서 여전히 북인계열의 관료들-김신국, 남이공, 김세렴-이 존재했으며, 인조 이후 국가정책의 일관성을 유지하는 기능을 수행했다고 평가한다(5장 17세기 전반 북인관료의 사상). 저자는 북인관료의 정의를 혈연과 학문적 계통상 북인계열의 기반을 가졌다는 사실에서 찾고, 이로부터 북인관료들의 성향도 성리학의 명분보다 실천을 강조하는 특징을 지녔다고 분석한다. 그 결과는 유형원-이익으로 전개되는 근기남인의 실학이다.
저자는 17세기 중기이후 주자성리학의 정통성에 대한 이단적인 사상의 도전이 존재했지만, ‘사문난적’ 또는 ‘실학자’라는 표현이 정통 성리학의 반대개념이 아니라 이들 역시 ‘성리학자’이며, 변화하는 세상에 대해서 ‘새로운 시대’를 준비했던 것임을 밝힌다(7장 17세기 중후반 근기남인 학자의 학풍). 더욱이 16~17세기 정치적 재편과정에서 축출된 남인 계열과 북인계열의 후예들이 근기남인을 형성했다는 전제로부터 이들의 학풍이 주류의 주자성리학뿐 아니라 다양하고 광범위한 학문적 포용력을 보여준다는 사실에 주목한다.
특히 필자는 혈연과 학문적 사승을 통해서 남명과 성운, 그리고 북인계열의 영향을 받은 허목과 윤휴의 활달한 개방성이 유형원으로 접합되며, 그 과정에서 퇴계의 영향력까지 포섭한다는 사실로부터 유형원을 율곡에서 시원하는 경세치용의 실학자이기보다 16세기 다양한 조선의 사상적 스펙트럼을 흡수한 성리학자로 평가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이러한 개방적이고 포용적인 사상적 스펙트럼은 18세기 이익과 이규경에게 보이는 백과전서적인 박학의 기풍으로 귀결된다는 것이다. 필자는 이익이 기본적으로 성리학자이며 동시에 당쟁이라는 시대적 산물의 희생자라는 사실로부터 시대적 과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성리학을 보완하는 사상체계의 적극적 수용자로 이익을 평가한다(8장 18세기 이익의 학풍과 성호사설). 따라서 이익은 17세기 유형원과 이수광의 박학적 기풍을 계승하고, 18세기 후반 백과전서적 학풍형성을 매개한다는 것이다. 18세기 조선의 지식인 사회에서 나타나는 광범위한 백과사전의 편찬경향은 당시 조선 지식인들이 체제내부의 문제해결과 근대로의 진입과정에서 지배적인 주자성리학의 논리에 함몰된 것이 아니라 전통과 근대를 연결할 내부적 역량을 축적한 반증이라는 것이다(9장 19세기 중엽 이규경의 학풍과 사상).
저자의 역작은 학문적·정치적 비주류로 밀려나 후대의 관심과 주목을 받지 못한 성리학자들 또는 사림들을 통해서 처사형 사림이 시대적 과제에 대한 고민을 더 치열하게 전개했음을 사실 그대로 보여준다.
그것은 조선 중·후기에 이르러서도 조선의 통치기제가 더 이상의 합리성을 유지하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지나온 시기만큼 생존할 수 있었던 이유를 설명해준다. 즉 무력화된 통치기제를 끌어안고 관념화로 흘렀던 지배적인 주자성리학의 경직성에 대응해서 과감한 포용력과 개방성을 통해 체제의 건강성과 균형을 바로잡았던 이단자들의 보이지 않는 노력 말이다. 그렇기 때문에 저자의 역작은 ‘정통’이라는 질곡에 빠져 논쟁의 ‘난마’에 얽혀있는 조선의 사상사에 ‘쾌도난마’라는 표현을 뒷받침하는 ‘상쾌한 단서’를 제공한다.

윤대식 / 충남대·동양정치사상


필자는 한국외대에서 ‘맹자의 정치사상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민세 안재홍 심층 연구> 등의 저서가 있다.

[더 읽어볼 만한 책]

한우근〈성호 이익 연구〉(서울대학교출판부, 1980)
성호 이익의 실학사상을 정치사상의 맥락에서 종합·정리한 것으로, 성호의 삶과 학풍의 출발로부터 정치적 이상상을 구체적인 제도적 대안을 통해 소개하고 있다.
정옥자〈조선후기 지성사〉(일지사, 1991)
17-19세기 문·사·철의 전통에 기초했던 조선 사대부들의 현실인식과 태도를 통해 조선 후기 지식인들의 시대적 문제의식과 이에 대한 대응을 지성사라는 맥락에서 살펴보고 있다.
김충렬〈남명 조식의 학문과 선비정신〉(예문서원, 2006)
남명 조식에 대한 연구의 출발로부터 남명학이 실천궁행을 중시하고 원시유학의 본질 탐구에 충실했던 전방위적이고 개방적인 학문체계임을 밝힘으로써 현대의 윤리적 대안으로 채택될 수 있는 유연함을 제시하고 있다.
충남대학교 유학연구소편〈명재 윤증의 학문연원과 가학〉(예문서원, 2006)
고려 말의 정몽주·길재의 의리학파, 조선 초기의 도학파, 우계학파의 연원으로부터 개방적이면서 양명학을 수용하고 유학본유의 심학을 강조했던 명재 윤증의 학문적 뿌리와 가학의 특징을 추적하고 있다.
신병주〈남명학파와 화담학파 연구〉(일지사, 2000)
16세기 처사형 사림의 대표적인 인물로 남명 조식과 화담 서경덕의 정치적·사상적 동질성을 통해 조선중기 사상사의 보편적 흐름과 내재적 발전과정을 탐색하고 있다.
정호훈〈조선후기 정치사상 연구〉(혜안, 2004)
16-17세기 북인의 정치적 연원과 학문적 전통을 출발점으로 해서 북인계 근기 남인의 실학적 학풍을 유형원과 윤휴를 중심으로 전개하고 그들의 정치사상을 분석하고 있다.

이외 윤남한〈조선시대의 양명학 연구〉(집문당, 1986), 강경원〈이익: 인간소외 극복의 실학자〉(성균관대학교출판부, 2001) 등도 참고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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