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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체이론가’ 새 면모 조명 이어져
‘매체이론가’ 새 면모 조명 이어져
  • 이영범 / 독일통신원·만하임대 박사과정
  • 승인 2007.08.27 10: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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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외동향 _ 독일에서 열광적 반응 얻고 있는‘발터 벤야민’

21세기에 들어서도 발터 벤야민에 대한 관심은 오히려 더욱 뜨거워지고 있다. <글로벌 벤야민>(1999)은 그 단적인 예라 할 수 있다. 1992년에 벤야민의 탄생 100주년을 기념하여 독일의 오스나브뤽에서 개최된 국제학술회의에서 발표된 원고들을 바탕으로 8년간의 편집 기간을 거쳐 3권의 책으로 출판된 이 책은 2천 페이지의 방대한 분량에서 알 수 있듯이 생전에 거의 무명에 가까웠던 한 사상가가 현재는 얼마나 전 세계적인 명성을 얻고 있는가를 여실히 보여준다.

일반대중에게까지 관심 받는 벤야민
또한 부르크하르트 린트너에 의해 편집된 <벤야민 사전>(2006)은 벤야민이 50년 정도의 비교적 짧은 수용기간에도 불구하고 괴테, 쉴러, 브레히트, 니체, 비트겐슈타인 등 현대 문화의 형성에 지대한 영향력을 발휘했던 대가들과 이미 동등한 반열에 올라섰음을 말해준다. 이제 벤야민은 학계를 넘어서서 일반 대중들에게까지 관심의 대상이 되고 있다. 벤야민에 대한 입문서가 2000년대에 들어서 노르베르트 볼츠와 빌렘 반 라이엔(2000), 스벤 크라머(2004), 우베 슈타이너(2004) 등에 의해서 꾸준히 출간되고 있다는 사실이 그 증거라 할 수 있다.
특히 독일의 대표적인 벤야민 연구가 중 한 사람인 우베 슈타이너의 입문서는 그 동안 학계에 축적된 벤야민 연구의 성과를 충실하게 반영하면서도, 그 구성과 서술에 있어서 벤야민 입문서의 표준적 모델을 제시하고 있다. 또한 정밀한 문헌학적 연구를 통하여 벤야민의 “정치적인 것(das Politische)”의 개념을 밝혀냄으로써, 신학적이고 형이상학적인 초기 벤야민과 마르크스주의로의 전향 이후 유물론적인 후기 벤야민을 구분하는 통념을 극복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한 점은 중요한 업적으로 손꼽을 수 있다. 그에 따르면 세속적인 질서는 메시아적인 것을 추구하지 않고 “행복의 이념”을 추구하기 때문에 세속적이라 할 수 있다. 이때 행복을 추구하는 주체는 개인이 아니라 억압된 집단이기 때문에 초기 벤야민의 “행복의 이념”에는 이미 후기의 사유를 규정하고 있는 정치의 계기가 내포되어 있다.
벤야민에 대한 이와 같은 열광적인 반응은 최근 독일의 학계가 문화학과 매체학으로의 방향 전환을 시도한 것과 무관하지 않다. 인간 지각의 역사성을 이론적 전제로 공유하고 있는 문화학과 매체학은 새로운 매체학의 담론 창시자 중 한 명으로 벤야민을 주목하고 있다. 특히 벤야민의 <기술복제 시대의 예술작품>(1936)은 거의 모든 매체 관련 이론서들에 포함될 정도로 경전화 되어 있다. 매체이론가로서 벤야민의 새로운 면모를 조명하는 시도들 역시 꾸준하게 이루어지고 있는데, 하랄드 힐개르트너와 토마스 퀴퍼에 의해 편집된 린트너의 기념 논문집인 <미디어와 미학>(2003), 니콜라스 페테스에 의해 편집된 <문서고-인용-사후의 삶>(2005), 크리스티안 슐테에 의해 편집된 <발터 벤야민의 매체이론>(2005), 데트레프 쇠트커의 <기술복제 시대의 예술작품에 대한 코멘트>(2007) 등은 대표적인 사례들이라 할 수 있다.

독일학계, 문화학·매체학 전환시도 연관
사진이나 영화, 라디오 등의 기술적 매체의 발전으로 인한 지각방식의 변화에 대한 벤야민의 성찰은 그의 전작에 흩어져 있으며, 체계적인 매체이론을 남겨두고 있지 않다는 점에서 그를 매체이론가로 볼 수 있는가 하는 의문이 생긴다. 페테스의 논문집은 바로 이와 같은 의문에서 출발하여, 벤야민의 이론 단편들, 짧은 기록문들, 가설들을 역사적, 전기적, 텍스트 내적 맥락 속에서 추적함으로써 벤야민의 매체이론의 특성을 밝히고자 한다. 벤야민의 매체 개념을 그의 전작을 통해 재구성하려는 이와 같은 시도는 이미 쇠트커의 선구적인 작업인 <발터 벤야민의 매체미학적 저술들>(2002)에 의해서 그 토대가 제시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는 단편적인 형태로 남아 있는 벤야민의 매체 이론적 성찰들을 수집하고 여기에 체계를 부여함으로써 독자적인 매체이론의 가능성을 제시했다. 이 책에 실린 쇠트커의 후기는 알레고리, 아우라, 인용, 이념, 운명 등 벤야민의 중요 모티브들을 추적하고 있는 <벤야민의 개념들 I, II>(2000)에 빠져 있는 그의 매체 개념에 대한 이해를 돕고 있다.
벤야민은 사진, 영화, 라디오 등의 기술적 장치들에 대하여 흔히 통용되고 있는 “매체”(Medium)라는 표현 대신 “기계 장치”(Apparatur)라는 표현을 사용하고 있다는 점에서 오늘날과는 다른 매체에 대한 이해를 보여준다. 그의 초기 언어논문인 <언어 일반과 인간의 언어에 대하여>(1916)에서 “매체” 개념은 어떤 것을 전달하거나 매개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정신적 전달의 직접성”으로 파악된다. 벤야민은 지각이 근본적으로 자연적, 사회적, 역사적 그리고 기계장치적 사실들이 하나의 “역사적 선험성”을 형성하고 있는 매체적 환경 속에서 이루어지고 있다고 보며, 그런 점에서 매체성이 기계장치에 선행하는 것으로 이해한다. 알버트 큄멜과 페트라 뢰플러에 의해 수집된 텍스트 모음인 <매체이론 1888~1933>(2002)은 벤야민 당대의 매체 이해를 살펴볼 수 있는 유익한 정보를 제공하고 있다.
<벤야민의 매체이론>과 <미디어와 미학>은 오늘날의 발전된 매체 환경적 관점에서 벤야민의 매체 이론을 관찰하고 있다. 전자는 매체 분석적 관점에서, 후자는 미학사적 관점에서 벤야민의 저술의 탈경전화와 재맥락화를 시도하고 있다. 두 논문 모음집에서는 주문형 비디오, 상호매체적 수행성, 음향 설치예술, 컴퓨터 문자 등 오늘날의 매체기술적 환경 속으로 벤야민을 논쟁적으로 끌어들이기도 하고, 알렉산더 클루게와 패트릭 로트 같은 현대 작가들과의 비교를 통해 벤야민의 논의가 지닌 현재성과 역사적 한계를 진단한다.
쇠트커의 <기술복제 시대의 예술작품에 대한 코멘트>는 벤야민의 텍스트가 생겨나게 된 역사적 맥락과 수용의 역사, 텍스트에서 언급된 기술들, 인명들, 관련 저술들에 대한 상세한 색인 목록과 핵심개념들에 대한 설명을 제공하며 텍스트에 대한 풍부한 이해를 돕고 있다. 그는 벤야민의 영화 이론을 현대의 새로운 지각 형식들에 대한 패러다임으로 해석한다. 그에 따르면 벤야민은 기술적 매체의 역사적 발전으로 인한 지각 방식의 변화를 예술 개념의 변화를 설명하는 이론적 토대로 삼음으로써 18~19세기에 예술이론으로 축소된 미학 개념을 지각이론과 결합시킴으로써 미학의 역사에서 새로운 전환점을 형성하고 있다.

벤야민 영화이론도 새롭게 주목
그러나 이러한 이해방식은 유물론적 미학 이론으로서 벤야민의 매체이론을 해석할 수 있는 가능성을 제시하면서도 예술작품 논문이 지닌 정치프로그램으로서의 성격을 희석시키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벤야민은 기계적 장치가 지각의 매체성에 침투할수록 아우라가 사라지고 있다는 테제를 제시한 뒤(3장) 사라지고 있는 아우라의 빈자리를 스타숭배나 파시즘의 영도자 숭배와 같은 가짜 아우라가 대신 차지하게 되었고, 따라서 이와 같은 가짜 아우라는 파괴되어야만 한다고 주장한다.(4장) 벤야민은 가짜 아우라에 대한 투쟁이 이미 앗제의 사진과 초현실주의자들에 의해서 시작된 것으로 이해한다. 거짓된 아우라를 파괴하려는 아방가르드적 충동은 거짓된 성스러움을 거부하고 현실에 메시아적 지평을 열어 놓기 위한 시도로서 벤야민의 핵심적 정치프로그램을 구성하고 있다.
따라서 아우라의 파괴는 변증법적으로 구제의 비유로 읽을 수 있으며, 예술작품 논문은 이와 같은 구원의 문제를 혁명의 문제로 대체하고 있다. 영화가 “예술의 전통적 개념들에 대한 혁명적 비판”을 시도한다는 점에 영화의 “혁명적 업적”이 있다는 벤야민의 주장은 이를 뒷받침해준다.

이영범 / 독일통신원·만하임대 박사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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