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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의 씀씀이 다른' 고야-램브란트
'돈의 씀씀이 다른' 고야-램브란트
  • 교수신문
  • 승인 2007.07.22 2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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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미술 인물 ‘극과 극’

프란시스코 데 고야(1746~1828)는 평생 돈의 중요성을 항시 잊지 않았다. 그가 정치적 격변기에 살아남았던 가장 큰 이유는 돈이었다.
고야는 고향에서 교회 화가로 이름을 날리기 시작해 안정된 생활을 보장받지만 그의 야망은 시골 교회 화가로서 만족할 수 없었다. 고야는 성공하기 위해 어린 시절의 친구 호세파와 결혼을 한다. 궁정에 진출하기 위해서는 화가인 그녀의 오빠의 후원이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처남 바이에우의 추천으로 고야는 스페인 왕실에서 필요한 태피스트리의 밑그림을 그리는 주문을 받는다. 이 일은 궁정화가가 되어야 맡을 수 있는 영광스러운 일이었다.
남에게 신세 지는 것을 싫어한 고야는 도움 받은 만큼 꼭 갚는 성격이었다. 그는 자신의 야망도 있었지만 재정문제를 염려해 궁정화가(당시 궁정화가는 월급이 있었다) 되기를 학수고대했다. 궁정화가는 기본적인 생활비는 물론 왕족이나 귀족들에게 초상화 주문을 쉽게 받을 수 있어 부를 축적하기에 아주 쉬운 직업이었다.
왕실 사람들을 기쁘게 하기 위해 애쓰고 있었던 고야는 왕족의 실물 가깝게 그린 초상화로 명성을 얻는다. 초상화가가 된 그의 인생은 바뀌었다. 1789년 오랫동안 기다려왔던 궁정화가로 임명되었다. 그러면서도 고야는 항시 새로운 후원자를 찾아다녔다.
“…어디다 투자하면 좋을지 가르쳐주게나. 은행이든 왕실이든, 채권이든 기업체이든, 아무데고 이윤이 제일 많이 나오는 데로…”(1789년 5얼 23일 편지)
현실에 발목이 잡혀 그림을 포기할 수밖에 없는 화가들을 많이 보아온 고야는 예술의 자유는 경제적 자립에 달여 있다고 확신했다. 돈이야말로 그 자신이 원하는 방식으로 인생을 살 수 있게 해준다고 믿었던 고야는 천재성과 실리적인 감각이 뛰어났다고 할 수 있다. 그는 끊임없이 투자 전문가를 만나 자신의 재정을 문제를 상담했고 그것을 바탕으로 부를 축적했다.
고야가 43살이 되던 해에 프랑스 혁명이 발발했다. 혁명의 물결은 유럽 전역을 걸쳐 스페인까지 번져 나갔다.  궁정화가였던 고야는 정치바람에 변방으로 7년 간 추방되었다.
고야는 인생을 바로잡기 위해 온갖 노력을 기울였다. 좌절감에 빠지지 않고 후원자를 찾아 그림을 그렸다. 그가 온갖 정치적 격변들 속에서도 작업을 계속할 수 있었던 것은 축적된 재산 덕분이다. 축적된 재산을 바탕으로 정치 로비에 능했던 고야는 많은 대가를 치르면서 얻은 지위와 신망을 잃고 싶지 않아 자기 주변의 상황을 정확히 인지하고 신중하게 행동했다.
고야는 40대 중반 이후 앓기 시작한 병 때문에 청각을 잃는다. 그는 병을 앓으면서도 끊임없이 그림을 그린 이유 중에 하나가 자신의 재정 상태를 개선하기 위해서이기도 했다. 고야가 죽던 해 마지막까지 돈을 아들 이름 구좌로 넘기는 일을 투자 전문가하고 의논할 정도로 경제관념이 뛰어난 사람이었다.

낭비와 사치로 말년에 고생한 렘브란트

빛의 화가 렘브란트 반 레인(1606~1669)는 20대에 일찍이 부와 명성을 얻었으나 지나친 낭비벽 때문에 말년에 고생했다. 이처럼 렘브란트처럼 극과 극의 인생을 살았던 화가는 없다. 그의 인생은 전반기와 후반기로 나누어지는데 그것은 재산 상태에 따라 명확하게 나누어진다.
렘브란트의 재능을 알아 본 화상의 주선으로 당시 유명한 40세의 튈프 교수가 수행하는 해부학 강의를 그려 달라는 주문을 받는다. 렘브란트가 그린 ‘튈프 교수의 해부학 강의’는 집단 초상화의 초기 작품이지만 이 작품은 그에게 명성을 가져다준다. 렘브란트는 20대 초반에 네덜란드에서 가장 유명한 화가가 된다.
렘브란트의 초상화가 인기가 많았던 것은 주문자들이 원하는 것을 정확가게 표현하는 데 있었다. 그의 초상화에 매료된 귀족들은 그에게 아첨에 가까운 찬사를 보냈을 정도다.
 방앗간 집 아들이었던 렘브란트의 사회적 지위는 고위 관리와 거부 집안의 여자 사스키아와 결혼함으로서 신분 상승이 급속하게 변했다.  하지만 사스키아는 도시의 중간계급으로 확고한 사회적 지위를 누리고 있었기 때문에 무척 사치스러운 여자였다.
네덜란드에서 가장 인기 있는 주문이 끊이질 않았고 상당한 돈을 벌었다. 하지만 렘브란트는 자신의 수입보다는 집, 옷, 예술품 수집 등 자신의 명성에 맞는 것을 원했다. 자신만만한 렘브란트는 사스키아의 지참금과 주문받은 그림을 믿고 무리해서 큰집을 구입했다.
렘브란트는 수입보다 항상 지출이 먼저였고 그것도 할부로 구입했다. 그러다보니 처갓집에서는 그들 부부의 낭비벽을 걱정했고 사스키아가 가지고온 지참금을 다 썼다고 렘브란트를 비난했다. 처갓집의 비난에  렘브란트는 자신의 인기 있는 화가로서 부자라면서 그들의 비난을 일축했다.
렘브란트가 가장 욕심을 부려 사들였던 것은 판화였다. 이탈리아에서 그림을 공부하지 않았던 렘브란트는 판화를 통해 이탈리아 예술을 연구했다. 단색의 판화는 그의 작품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빛의 극적인 효과를 더 이상 사용하지 않고 자신만의 느낌으로 모델들을 표현하기 시작한다. 초상화에 익숙한 그의 고객들은 렘브란트를 외면하기 시작하면서 초상화 주문이 끊어졌다.
주문이 끊어졌어도 그의 사치스러운 생활을 멈추지 못했다. 우아하고 안락한 생활을 계속하기 위해 그는 화상, 의류상, 골동품상, 행상인들에게 끊임없이 물건을 사들였다. 사치를 버리지 못한 그의 낭비벽은 상류사회에 추문으로 이어진다. 결국 낭비 때문에 렘브란트는 파산했고 채권자들은 빚을 받기 위해 그를 법정에까지 세운다.
당시 무역이 자원이 풍부하지 않아 무역이 발달한 네덜란드는 상인의 나라였다. 금융시장과 은행과 상거래가 활발한 암스테르담 사회에서 낭비하는 그의 행동은 용납될 수 없는 것이었다. 상류사회는 렘브란트의 행동을 비난했다.
렘브란트의 마지막 보루는 사스키아의 유산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유언에 렘브란트가 재혼을 하면 유산상속에 자격이 없다고 명시했다.
아들의 유모였던 가난하고 평범한 집안의 착하고 19살의 어린 헨드리카는 와 40이 넘은 나이에 렘브란트는 사랑에 빠진다. 사스키아와 외모가 닮은 헨드리카를 사랑을 하지만 그녀와 정식으로 결혼하지 못한다. 렘브란트에게 사스키아의 유산에서 들어오는 수입이 꼭 필요했기 때문이다. 불확실한 두 사람의 관계는 추문으로 이어져 교회의 소환 명령을 받는다.  1660년 렘브란트는 채권자들의 성화에 못 이겨 살던 집에서 쫓겨난다. 그를 책임지는 사람은 아들과 헨드리카였다.

박희숙/서양화가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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