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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네이션=스테이트’ 이념의 꿈과 현실
‘자본=네이션=스테이트’ 이념의 꿈과 현실
  • 하승우 / 한양대 제3섹터연구소
  • 승인 2007.07.22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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깊이읽기 2 _<세계공화국으로> 가라타니 고진 지음 | 조영일 옮김 | b | 237쪽 | 2007

예전이나 지금이나 ‘세계공화국’이라는 이상은 헛된 공상처럼 여겨진다. 그렇지만 가라타니는 1795년에 칸트가 ‘영원한 평화를 위하여’로 밝혔던 이념을 이어받아 <세계공화국으로>에서 세계공화국이라는 규제적 이념(regulative idea)을 고수한다. 척박한 현실일수록 꿈(가라타니식으로 말하면 초월론적 가상)은 필요하기 때문이다. 자본=네이션=스테이트라는 현재의 교환원리에서 벗어난 세계공화국의 이념은 네그리나 하트가 주장하는 ‘제국’과 다른 결을 가진 거대담론이다.

교환원리로 다뤘던 ‘국가’, 역사적 분석
가라타니는 네그리와 하트의 논의가 제국과 다중이라는 이원성을 벗어나지 못했다고 보면서 자본=네이션=스테이트라는 중첩된 틀을 제시한다. 자본과 네이션, 스테이트는 제국으로 단일화되지 않고 각각이 고유한 교환양식을 가지면서 서로를 보완하는 보로메오의 매듭이다. 자본주의가 상품교환과 화폐를 통한 교환형식을 가진다면, 스테이트는 약탈-재분배라는 교환형식을, 네이션은 자본제가 파괴한 호혜적 관계에 기반한 교환형식을 가진다. 그리고 자본과 네이션, 스테이트는 하나의 초월론적 가상으로서 현실을 규제하는 이념의 역할을 한다. 이런 분석을 통해 가라타니는 이들을 지양할 변화의 힘을 어소시에이션(association)에서 찾는다.
사실 가라타니는 그 기본틀을 <트랜스크리틱>(한길사, 2005)에서 이미 제시했었다. 가라타니는 칸트의 <순수이성비판>을 재해석(실제로는 데카르트를 재해석하며 시작되는)하며 “윤리성과 정치경제학 영역의 사이, 칸트적 비판과 마르크스적 비판 사이의 코드 변환(Transcoding)”을 주장한 바 있다. 그리고 강한 시차(Parallax)로서의 이율배반을 강조하며 마르크스와 프루동의 사이에서, 맑시즘과 아나키즘의 사이에서 어소시에이션의 의미를 해석했다. 또한 현실의 실천적인 운동으로서 트랜스크리티컬 대항운동, ‘소비자로서의 노동자’운동의 방향성을 제시했다. <세계공화국으로>는 그 연장선상에서 자본=네이션=스테이트라는 매듭을 분석하고 있다.
<세계공화국으로>의 새로운 점이라면 <트랜스크리틱>에서 하나의 교환원리로만 다뤄졌던 국가를 역사적으로 분석한다는 점이다. 특히 국가와 상품교환이 “공동체와 공동체 사이에서” 시작하고 발생한다는 점을 부각시킨다. 따라서 자본=네이션=스테이트를 변화시키려는 실천전략은 내부의 노력만으로는 충분하지 않고 외부에서 지양하는 힘, 즉 “국가를 ‘위로부터’ 꼼짝 못하게 하는 시스템”이 필요하다. 가라타니의 세계공화국은 “국제연합을 강화·재편성”해서 아래로부터의 운동과 위로부터의 운동을 연계시키는 ‘글로벌 커뮤니티(어소시에이션)’를 요구한다.
가라타니의 구상은 규제적 이념이기 때문에 가상의 일종이고 초월론적인 구상이다. 따라서 현실적인 어려움만으로 그의 구상을 비판하기는 어렵다. 다만 60년대부터 일본에서 꾸준히 진행되고 있는 현실운동(생활클럽 생협이나 생활자 네트워크, 워커즈 콜렉티브)에 대한 분석이 없다는 점은 의문을 낳는다(<근대문학의 종언>에서 자신이 추진했던 NAM운동에 관한 간략한 언급이 전부이다). 특히 가라타니가 강조하듯이 지역화폐(LETS)가 진정 ‘윤리-경제적인 어소시에이션’으로서의 가능성을 가지려면 현재 진행되고 있는 운동에 대한 분석은 반드시 필요하다.
그리고 자본주의 내에서 자본주의를 지양하는 ‘소비자로서의 노동자’ 투쟁이라는 전략은 가라타니 자신도 인정하듯이 자본=네이션=스테이트의 고리가 완성되지 않은 장소에서, 즉 서구 강대국을 제외한 국가에서 실현되기 어렵다(<근대문학의 종언>, 235쪽). 가령 근대적인 교환원리가 정착되지 않은 한국에서 유통과정에서의 비폭력·합법투쟁이라는 가라타니의 전략은 비현실적일 수밖에 없다. 그리고 공공재였던 물이나 종자, 지식 등이 상품화되는 세계에서 소비자운동이 가라타니의 평가만큼 자율적일 수 있을지도 의문이다.
또한 세계공화국을 가져올 위로부터의 시스템은 어떻게 마련될 것인가. 미국이나 유럽이 주도하는 국제연합이 과연 칸트적 이념을 실현하는 매개가 될 수 있을 것인가. 가라타니는 이런 문제들에 관해 명쾌한 해답을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

가라타니 이론의 결함은 ‘지방정부’ 간과
가라타니의 이론틀에서 가장 심각한 결함은 자본=네이션=스테이트의 틀로 잡히지 않는 ‘지방정부(local government)’를 간과했다는 점이다. 지방정부는 국가의 속성을 가지고 있지만 그 내부권력관계의 재구성에 따라 자본과 국가의 힘에 맞서는 변화의 진지가 될 수도 있기 때문에 매우 중요하다(베른슈타인이나 폴라니는 이 가능성에 주목했었다). 사실상 어소시에이션이 실질적인 변화의 힘을 구성하려면 지방정부라는 강력한 동맹군이 필요한데, 가라타니는 이 점을 간과하고 있다.
또한 이론적인 면에서 가라타니의 입장이 맑스와 프루동의 사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가라타니는 마르크스 일병을 구하기 위해 19세기 사회주의 운동의 주도권을 아나키스트들이 가졌다는 주장도 서슴지 않고 마르크스가 프루동의 적자라는 도발적인 발언도 한다.
그러나 그런 도발적인 발언 외에 ‘역설(paradox)의 사상가’ 프루동이나 아나키즘에 관한 가라타니의 이해는 그리 공정하지 않다. 가라타니는 프루동(과 아나키스트들)이 어소시에이션과 연방(federation)의 원리에 주목했다는 점에서 그 성과를 인정하지만 자본주의와 화폐에 대한 분석이 부족했고 권력에 대한 분석도 치밀하지 못했다고 비판한다.
그러나 이런 평가의 공정함에 대해서는 논쟁의 여지가 있다. 기본적으로 가라타니는 프루동 사상의 또 다른 축인 계열법칙(serial law)이나 상호주의(mutualism), 정의(justice)의 이념, 투표기권(abstention) 등을 다루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고 가라타니는 프루동의 부족한 부분을 채우며 아나코-코뮨주의(anarcho-communism)를 체계화시켰던 크로포트킨을 다루지 않는다(사실 미개사회에서 근대국가로의 발전을 설명하는 가라타니의 서술은 크로포트킨의 <상호부조론>과 겹쳐짐에도). 그런 점에서 가라타니의 트랜스크리틱은 더 횡단해야 할 땅을 남겨놓고 있는 셈이다.
여전히 이념의 시대가 유효하다고 주장하는 가라타니의 목소리는 또 다른 세상을 꿈꾸게 한다. 허나 그 꿈을 더 확장시키고 현실로 가져오는 방안은 아직까지 과제로 남겨져 있다.

하승우 / 한양대 제3섹터연구소


 

필자는 경희대에서 ‘풀뿌리 공론장에 대한 이론적 고찰’로 정치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저서로 <희망의 사회윤리 똘레랑스>, <세계를 뒤흔든 상호부조론> 등이 있으며 풀뿌리자치연구소 이음, 지행 네트워크에서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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