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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山水, 자연에 투영된 나를 발견하는 곳”
“山水, 자연에 투영된 나를 발견하는 곳”
  • 교수신문
  • 승인 2007.07.21 11: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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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3_선비들이 찾던 명소]

知者樂水仁者樂山이라! 지혜로운 자는 물을 좋아하고, 어진 자는 산을 좋아한다고 했다.
이 정도 되면 우리네 선인들에게 산수는 단순하게 보고 즐기는 대상이 아니라 덕성을
함양하고 마음을 다스리는 대상이자 기준, 자연에 투영된 나를 발견하는 곳이었으리라.
이제 옛 선비의 마음으로 돌아가 지친 일상을 뒤로하고 나를 발견해보는 것은 어떨까.

'금병산'으로도 불린 금수산의 모습(이방운 作, <사군강산삼선수석첩>中 ‘내 금병산도’, 조선후기, 국민대박물관 소장)

 

 

보령의 오서산과 영보정
이중환은 <택리지>에서 충청도 보령을 ‘가장 훌륭한 땅’으로 극찬하였다. 가장 훌륭한 땅을 더욱 빛나게 하는 곳이 바로 오서산(烏棲山)이다. 해발 791미터의 오서산은 현재 광천과 보령 경계에 위치한다. 정상에 오르면 서해 바다가 시원스럽게 내려다보이고, 정상 부근에는
갈대밭이 무성하여 지금도 서해의 등대산이라고 불린다. 예로부터 까마귀와 까치가 많이
살아 까마귀 보금자리(烏棲)라 불렸다고 한다. 조선후기 대학자 정약용(丁若鏞)은
오서산과 인연이 있는 인물이다. 그가 국왕의 비서격인 승지에서 강등되어 금정찰방으로
부임한 뒤 이곳을 찾은 진사 신종수(申宗洙)와 함께 오서산에 올랐고, 이를 기념하여
<유오서산기(游烏棲山記)>라는 기록을 남겨놓았다. 이글에서 정약용은 오서산 기슭의 절에서 호랑이와 관련된 기인을 만난 일화를 기록하였다.
오서산 인근에 예전에는 수군절도사영이 있었으며, 그곳에는 영보정(永保亭)이라는 정자가 있었다. 최고의 명승지로 꼽히던 영보정에 대해 조선초 해동강서파(海東江西派)의 대표적
시인인 박은(朴誾)은 “땅의 형세는 푸드덕거리며 곧 날고자 하는 새의 날개와 같고,
누정(樓亭)의 모양은 한들한들 매여 있지 않은 돛대와도 같다”고 하였다.
영보정의 절경과 관련해 광해군의 일화가 전한다. 임진왜란 당시 전라도 지역에서 발생한
송유진의 반란을 진압한 뒤 광해군은 홍성에 있던 분조(分朝:의주에 있던 조정과는 달리
광해군이 이끌던 조정을 말함)를 보령으로 옮기려고 하였다. 이에 백사 이항복이 선조에게
보고하기를 ‘이주할 곳이 못 된다’고 하여 무산된 적이 있었다. 이때 세자가 이항복을
의심하자 이항복이 “영보정의 경치는 충청도의 으뜸이라, 젊은 세자가 그 곳에 머물면
혹시 사치하고 방탕한 마음이 생기지 않을까 염려하기 때문입니다”라고 말하였을 정도로
이곳은 절경이었다. 정약용도 그가 천주교와 관련되어 인근의 해미에서 유배생활을 하면서도 이곳을 방문하지 못한 것을 개탄하다가 금정찰방으로 내려와서 이곳을 보고는
“천하의 사물이 기이하지 않으면 드러날 수 없다는 것을 영보정을 보고 그 사실을 알 수
있었다”고 하여 그 기이함에 탄복한 바 있다.

제천의 한벽루와 금수산
예로부터 단양, 청풍, 제천 등지는 풍광이 뛰어난 곳으로 알려져 있다. 지금도 관광지로
각광받는 청풍호반에는 조선시대 대표적인 누각 건물 가운데 하나인 한벽루(寒碧樓)가
위치해있다. 한벽루는 1317년(충숙왕 4년) 청풍현 출신 승려 청공(淸恭)이 왕사(王師)가 되자 이를 기념하여 청풍현이 군(郡)으로 승격되면서 객관의 동쪽에 세운 건물이었다.
1397년(태조 6년) 군수 정수홍(鄭守弘)이 중수하였으며, 이때 하륜이 기문을 작성하였다.
조선시대에는 청풍면 읍치에 있다가 1983년 충주댐이 세워지면서 현재의 위치로 옮겼다.
예전 한벽루 앞에는 청풍강이 유유히 흐르며 그림 같은 풍광이 펼쳐졌다. 유재 이현석(1647~ 1703)은 <한벽루기>에서 청초호와 앵무주, 봉황대, 금병산이 가락지처럼 둘러싸고 있는
절경을 묘사하였다. 한벽루에서 서북쪽으로는 금수산이 펼쳐져 있었다. 마치 비단 병풍을
둘러친 것과 같은 형상이다. 그래서 이곳 비봉산은 금병산(錦屛山)으로 불리기도 하였다.
금수산이라 불리는 이 산은 원래 백암산으로 불리던 곳으로, 퇴계 이황이 단양군수로
재직할 당시 이곳의 경치가 마치 비단을 펼쳐놓은 것 같다고 하여 붙여진 명칭이다.
비단 병풍을 쳐놓았으니 그 경치를 굳이 말로 표현해야만 하겠는가. 금병산은 많은 선비들이 그 풍광의 뛰어남을 노래하였는데, 조선후기 문인 가운데 김창협은 겨울 금수산을 보고는
“변화하는 자태는 갖가지 형태이지만 끝내는 제각기 다시 나타난다”고 묘사하였다.

진해의 용추계곡
용추계곡이라 불리는 계곡은 문경, 가평, 함양, 진해 등지에 있는데 모두 뛰어난 명승이다.
특히 진해 용추계곡의 수락암(水落巖)은 예로부터 이 지역 명승으로 알려졌던 곳이었다.
예전에는 웅천현에 속하였으나 웅천현이 진해에 속하게 되면서 진해의 명소가 되었다.
굴암산과 율현산 골짜기의 물이 합류하여 수직으로 떨어지는 수십 척의 수락암 폭포는
가히 일대 장관을 이룬다. 예전 수락암 폭포의 물길은 세 가닥으로 나누어 떨어졌다고 하는데, 떨어지는 물길로 다음해의 장마와 가뭄을 점쳤다고 한다. 전라도가 가물 것 같으면
서쪽 갈래가 마르고, 경상도가 가물 것 같으면 동쪽 갈래가 마르며, 충청도가 가물 것
같으면 가운데 갈래가 흐르지 않는다고 한다.

전주의 만경대
만경대 하면 아마도 북한의 평양에 있는 지명을 떠올릴 것이다. 그러나 만경대는
평양 이외에 금강산이나 개성, 전주 등지에도 소재하고 있다. 이곳에서 소개하고자 하는
전주의 만경대는 고달산이라고 불렸던 고덕산 북쪽 기슭에 있는 곳으로, 석봉이 기이하게
빼어나고 형승이 중층으로 겹쳐진 구름과 같다고 한다. 만경대를 둘러싸고 사면에 숲이
울창하고 석벽은 그림과 같으며, 만경대의 정상에는 수십 명이 앉을 수도 있었다.
15세기말 점필재 김종직의 ‘등완산만경대(登完山萬景臺)’라는 시에 따르면, 만경대에
앉으면 저 멀리로 진포(鎭浦)와 변산반도가 바라보였다. 만경대는 후백제 시기 견훤의 성이 있었던 곳으로 알려져 있는데 이런 이유에서인지 고려 말 정몽주가 이곳에 올라 무상했던
역사를 회고하며 돌 벽에 새긴 시가 전한다. 전하는 바에 따르면 정몽주가 이곳을 찾았던
시기는 1380년(고려 우왕 9)으로, 이성계가 황산(荒山)대첩에서 왜구를 크게 격파한 뒤
인근의 오목대에서 자축연을 벌일 당시 종사관으로 파견되었던 정몽주가 만경대로 말을 달려 이곳 석벽에 글을 새겼다고 한다. 아마도 기울어져는 가는 고려를 걱정하지 않았을까?

이근호 / 국민대 한국학연구소 연구교수


 필자는 국민대에서 ‘영조대 탕평파의 국정운영론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저서로 <조선후기의 수도방위체제>, <이야기 조선왕조사>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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