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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향과쟁점] 미 테러사건에 대한 철학적 논쟁의 풍경
[동향과쟁점] 미 테러사건에 대한 철학적 논쟁의 풍경
  • 권희철 기자
  • 승인 2001.10.3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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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10-30 13:29:13
미 테러사건에 대한 촘스키와 왈쩌의 논쟁은 지적이면서도 사유 기반의 예민한 경계를 드러낸다. 테러와 전쟁을 두고 도전과 응징이라는 악순환에 빠지지 않고 진정한 도덕성을 고민하는 모습이 인상적이다. 때마침 국내에서도 두 사람의 논쟁이 화젯거리에 올랐다. 이를 간략하게 소개하려 한다.

지난 9월 11일에 벌어졌던 미 테러사건을 두고, 미국에서는 대표적인 지식인 두 사람이 서로 해석을 달리했던 모양이다. 촘스키와 왈쩌가 그들이다. 둘 다 유태인계라는 것 외에도 미국 내에서 가장 실천적인 지식인으로 손꼽히는 공통점을 갖고 있다.

이에 대해서 국내에서도 흥미로운 논쟁이 벌어졌다. 비공개사이트로 운영되는 ‘소공동사람들’(http://dumdum.pe.kr)이란 곳에서 국내 철학자들이 논박의 과정을 통해 서로의 의견을 교환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에 대해 비판적인 시선을 보낼 수도 있을 것이다. 자기 입장도 아니면서 해외의 철학적 논쟁을 대리하고 있다고, 또는 과연 그 둘이 전세계의 대표적인 지성이기나 하느냐고 말이다.

하지만 이들의 의견개진과정을 통해 지식인의 진지한 모습을 보려고 한다. 하나의 사태를 두고 비아냥거리는 태도가 아니라, 지독하게 고민하는 성찰의 모습을 보려는 것이다. 그 논의의 수준이 추상적 차원에서 진행되었다 하더라도, 그들의 논의가 비공개로, 그것도 익명으로 이루어졌던 것임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이안(이봉재 서울산업대 인문학과 교수), 나라두루(장은주 서울대 강사, 철학박사)가 그 주인공들이다. 실제로는 ‘새2’라는 익명자와 ‘나라두루’의 계속되는 논쟁이 있었고, 나중에 ‘이안’이 자신의 입장을 밝히게 된다. 나라두루와 새2, 이안의 입장을 간단히 정리해본다.

테러와 도덕적 유물론의 거울 반사

나라두루 : 무정부주의자 촘스키의 비판은 언제나 날카롭다. 정곡을 찌르는 근본적인 비판이다. 그러나 ‘새2’가 보여준 왈쩌 비판은 잘 이해되지 않는다. ‘새2’는 왈쩌를 그저 ‘국가주의’의 대변인 정도로 보고 있기 때문이다. 왈쩌가 부시 식의 전쟁구상이 위험할뿐더러 또 쉽게 정당화될 수도 없다고 지적하는 부분에 대해서는 아예 언급을 하지 않고 있다. 단지 테러리즘에 분노하기에 그 깊은 원인에 대해서는 덮어두고 있다고 비판할 뿐이다.

그런데 촘스키의 근본주의적 태도에 문제는 없는가. 물론 그의 언급들은 언제나 제3세계 지식인들의 공감을 불러일으킨다. 하지만 어쩐지 공허해 보인다. 이런 예를 생각해보자. 미국은 영국의 그 제국주의적인 과거에 의해 건설된 나라인 만큼, 정의를 위해서 미국인들은 모든 미국땅을 인디언들에게 물려주고 영국으로 되돌아가야 하는가. 정의란 그런 것일까. 마찬가지로 유태인들은 이제 팔레스티나 땅을 떠나야하는가. 과연 그것이 정의의 실현일까. 촘스키는 그렇다고 대답할 것이다. 그러나 과연 그런가.

촘스키의 도덕주의는 명백하다. 이런 입장이 철저해 보이기는 하지만, 단순한 입장에 불과할 수도 있다. 왈쩌를 통해 단순히 현실주의를 내세우고자 하는 것은 아니다. 정의의 문제가 생각보다 복잡하다는 것을 지적하고 싶을 뿐이다.

‘테러는 비난받아 마땅하다’는 식의 언급은 상투적이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하더라도 그 가치의 중요성을 무시해서는 안 된다. 그것을 단순히 친미적 반응이라 말할 수 있겠는가. 무고한 사람들의 희생, 미국인들의 당혹감, 슬픔, 분노, 공포 등에 대해 공감하지 않고서는 이 문제를 제대로 인식할 수 없을 것이다. 그 많은 무고한 사람들이 죽었는데도, 기뻐하면서 춤을 추는 아랍인들을 보면서 우울해하지 않는다면, 그 경우 역시 문제를 제대로 인식할 수 없을 것이라 본다.

물론 문제의 발단에는 제국주의자들의 범죄가 있다. 그것이 원인임은 분명하다. 이에 대해서는 많은 비판적 지식인들이 지적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 ‘도덕적 유물론’은 원인을 지적하면서, 그 원인들에 대한 거울 반사적 태도가 제국주의자들을 단죄할 수 있는 도덕적 방식 또는 문명화된 방식은 아니라는 점에는 주목하지 않는 것 같다. 아랍인들의 환호는 제국주의의 거울 반사이지 분명 반제국주의는 아니다. 제국주의자들의 잘못과 같은 방식으로 잘못을 저지르는 것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제국주의자들을 단죄할 수 있는 보다 우월한 도덕적 태도의 표현은 아니다. 원인에 대한 인식은 문제를 어떤 방향으로 개선해야 할지 지침을 제공해 주지만, 그 인식이 그들의 행위를 ‘용인’하는 방향으로 이끌게 해서는 안 된다.

‘야만에 대한 문명적 대응’은 적어도 미국의 상황에서는 촘스키 식의 호소보다는 훨씬 더 설득력이 있으리라 본다. 문명을 헌팅턴 식의 문화주의적 이해에서 떼어내 어떤 도덕의 진보를 의미하는 것이라 이해할 수 있다면, 이번 테러는 결코 문명의 충돌의 표현이 아니다. 그건 문명이라고 참칭된 것에 대한 야만적 대응이었을 뿐이다. 문명은 고정된 어떤 것이 아니라 앞으로도 계속 다듬어지고 완성되어야 할 어떤 것을 가리킨다.

상징적 통분과 몰역사적 통분

이안 : 과연 촘스키의 의견을 일종의 근본주의적 단순함, 도덕적 이상주의 정도로 치부할 수 있을까. 그렇게 간단해 보이지 않는다. 반면 왈쩌의 글은 틀린 데가 없다. 포퍼가 말했듯이 틀리지 않는 비법이 있다. 많이 말하지 않으면 되는 것이다. 왈쩌는 별로 말하는 게 없다. 무력전을 경계하는 수많은 의견들 틈에 덧붙여진 것 이상으로 들리지 않는다.

촘스키는 다르다. 통렬하고도 근본적인 논점을 제시한다. 이를테면 다음과 같은 것이다. ‘이번 사건을 어떤 의미에서 테러라 불러야 하는가’, ‘그게 테러라면 그래서 도덕적으로 나쁜 일이라면 미국은 어떠한가’, ‘이렇게 도덕적·정치적으로 흥분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미국이 이 사건에 대해 도덕적으로 우월할 이유가 있다면 그것은 무엇인가’, ‘차라리 미국이 힘으로서 우월하다고 말해야 하지 않을까.’

촘스키는 그 근거로서 중동의 참혹과 미국의 국가테러리즘의 사례들을 보여준다. 궁극적인 원인을 들이대면서 시간을 1백년 전으로 돌려놓으라는 메시지 정도로 읽는다면 곤란하다. 반대로 이번 사건에서 이에 대해 침묵하는 것은 합당한가. 반테러리즘에 대한 국제적 합의를 얻어내는 것, 이슬람마저도 동의할 만한 합의를 얻어내는 것. 그것이 이 사건의 본질일 수 있을까. 그것이 지금 시점에서 핵심이 되는가. 오히려 그렇게 생각한다면 그것이야말로 단순하지 않은가. 철학적인 사람들이 읽어야 하는 것은 왈쩌보다 촘스키다. 이 차이는 단순한 것이 아니다. 정치적으로도 굉장히 중요한 것이다. 정치적 올바름의 기준을 뒤흔드는 질문이 아닌가.

미국의 시민이 살해당했다는 사건에 대해 공분을 느낀다는 것은 건전해 보인다. 그러나 거기에 멈춰서면 곤란하다. 왜냐면 이번 사건의 또 한가지 축은 미국인들의 ‘몰역사적인 통분’이기 때문이다. CNN이 영화보다 선명하게 현장을 보여주고, 그 폐허와 문명화된 도심이 대비되고, 정직하고 건실한 미국시민들의 용기가 펄럭거리고. 이번 사건에 정말 은유적이고 상징적인 것이 있다면, 미국의 통분이 그것이라고 본다. ‘상징적 전쟁’이라는 주제는 그야말로 미국적인 것이다. 내게는 ‘상징적 통분’이라는 주제가 중요해 보인다.

촘스키는 철학자가 아니다. 본인이 그렇게 말한 적이 없을 뿐더러 나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나라두루’가 잘 지적한대로 철학 수준의 글이라 할 수 없다. 그러나 촘스키는 특별한 의미에서 대단히 철학적이다. 흔한 생각을 완전히 뒤집는다는 사실, 정확히 그런 의미에서의 ‘철학적 사실들’을 펼쳐놓는다.

촘스키는 자신의 고된 작업, 방대한 자료를 통해서 생각의 관성을 파괴시키는 그 작업을 학문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수학이나 자연과학 정도의 엄밀함이 있어야 학문이지, 이런 작업 정도는 상식인이면 누구나 할 수 있는 것이라 말한다.

근본적인 물음의 방식

새2 : 글이 아니라 대화로 한다면 많은 차이들을 쉽게 좁힐 수 있다. 글에서는 종종 아직 말하지 않는 것들이 무엇인가를 배제한 것처럼 보일 때가 있어 서로 오해를 하곤 한다.

그렇지만 나라두루는 촘스키가 아나키스트라고 생각하고 거기서부터 많은 것을 도출하려는 것 같다. 가령 촘스키식으로, 미국은 인디언들에게 땅을 내어주어야 한다는 결론으로 갈 것이라 추정한다던가, 문제해결의 방식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는다던가 하는 경우다.

촘스키의 관심을 요약하자면, ‘어떻게 시민들이 동의하지 않은 일들이 그렇게 많이 일어날 수 있는가’, ‘만일 시민들이 제대로 알았더라면 동의하지 않았을 것들이 어떻게 그렇게 많이 일어날 수 있는가’ 정도이다.

새2는 반성하고 있다. 자극적인 표현들로, 논쟁적인 언어로 오히려 차분한 논의를 방해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얻은 것은 없고 잃은 것은 제법 있는 것 같다. 새가 잠수할 수는 없으니 숲 속에 좀 다녀와야겠다.

“문명의 방식으로 답하자"

마이클 왈쩌(1936~)는 우리에게 테일러와 더불어 대표적인 공동체주의자 중 한 명으로 알려져 있다. 미국 내에서 공동체주의는 자유주의와 대립적인 경향을 보이며 성립해 왔다. 흔히 알려진 자유주의자로는 롤즈가 있다. 그러나 왈쩌가 그런 대립적 틀 속에서 규정될 수 있는지 회의를 품는 학자들이 많다. 왜냐하면 대체로 완고한 보수주의의 정치적 입장을 지닌 공동체주의자와 달리, 왈쩌는 스스로를 사회민주주의자라 규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대표적인 좌파 학술지 ‘디센트(Dissent)’를 통해 학술활동을 시작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당시 논문의 제목은 ‘미국 공산당의 산고’이다. 현재 왈쩌는 디센트의 공동 편집인이기도 하다. 그는 1960년 노스캐롤라이나 대학 학생농성에 합류하면서부터 인권문제에 적극적인 관심을 갖기 시작한다. 이후 베트남전 당시에는 반전운동에 참여하기도 했다.

왈쩌는 정의의 문제에 관해서 ‘영역’들의 정의를 주장한다. 각각의 영역들은 서로 독립적이므로, 각각의 정의가 있게 된다는 것이다. 이런 다양한 정의를 그는 ‘복합 평등주의’ 또는 ‘다원적 평등주의’라고 말한다. 또 왈쩌는 롤즈의 평등주의에 대해 사회적 가치들이 그 고유한 사회적 의미에 따라 구별된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으므로 단순한 평등이라 비판한다. 그는 자신의 입장에 대해 “공동체주의는 자유주의에 대해 반대하는 것이 아니라 자유주의를 시정하는 것”이라 밝힌 바 있다.

미 테러 사건에 대해서 왈쩌는 일종의 ‘거리두기’를 시도한다. 그는 뉴욕타임즈 9월 21일자 기고문에서 한 만화를 예로 들며, 전쟁이니 갑자기 싸우자고 우기는 녀석을 어떻게 다룰 것인지 묻는다. 왈쩌에게 그 만화는 명백하게 문명과 야만의 구도로 다가왔을 것이다. 그는 미국인들에게 야만에 대해 야만의 방식으로 맞서는 것이 아니라, 문명의 방식으로 답해야 한다고 호소한다.

사실 이런 태도는 그의 ‘관용’ 개념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왈쩌는 “관용은 차이를 가능케 하고, 차이는 관용을 필요로 한다”고 말한다. 이런 왈쩌의 태도를 소극적이라 비판할 수도 있을 것이다. 어느 한 쪽에도 기울지 않고 비판적 거리를 유지하려는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를 현실적인 선택이라 옹호할 수도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서로 다른 입장 모두를 고려하려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쉽게도 우리에게 그의 태도는 썩 미덥지 못하다. 문명과 야만이라는 대립적 틀이 그렇다. 야만적이라 말하는 테러 행위의 이면에 무엇이 숨겨져 있는지 살펴보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럴 때 차이의 관용은 사실상 ‘차이의 승인’에 불과한 것일지도 모른다.(뉴욕타임즈 http://nyt.com 9월 21일자에 전문수록)

“테러는 극우파들에게 하나의 선물”

노엄 촘스키(1922~)는 MIT 교수로 있던 1960년대 당시, 베트남전 참전 반대를 계기로 본격적인 현실비판에 뛰어들었다. 1966년 뉴욕타임즈 기고문은 사람들의 뇌리에 촘스키를 비판적 지식인으로 각인시켰다. 그는 ‘지식인의 책임’이라는 이 기고문에서 “지식인은 정부의 거짓말을 세상에 알려야 하며, 정부의 명분과 동기 이면에 감춰진 의도들을 파악하고 비판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변형생성문법’의 창시자 촘스키는 저명한 언어학자이기도 하다. 이 점은 그의 약점이 되기도 한다. 요컨대 언어학자이면서 사회비평가인 그의 이중적 활동을 두고 모순적이라는 지적이 그것이다. 이에 대해 촘스키는 “목수는 목수일만 해야 하는가” 반문하면서 자신의 입장을 변론한다. 그러나 촘스키에 대한 비판이 언어학 또는 사회비평 둘 중 하나를 택일하라는 것은 아니다. 비판자들은 촘스키 언어학과 사회비평의 접점은 무엇인지 묻고 있다. 언어는 인간에게 직접적으로 주어지는 것이지 발명되거나 생겨나는 것이 아니라는 그의 언어학적 전제가 사회적 활동과 불일치하다는 지적이다.

그는 스스로를 플라톤·데카르트의 이성주의에 뿌리를 두고 있으며, 루소·훔볼트·오웰 등의 영향을 받은 ‘자유주의적 사회주의자’로 자평한다. 러셀과 듀이의 행동주의적 면모도 중요한 영향을 끼쳤다고 말한다. 한편 촘스키는 “지식인이란 기본적으로 특권적 자원을 사용할 수 있고 특별한 훈련을 받아 정신을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는 사람”이라 규정한다. 또 그는 지식인에게 필요한 것이 데카르트가 말했던 ‘건전한 양식’일 뿐이라 일축하고 있다. 그러나 ‘특권’과 누구나 타고난다는 ‘양식’은 충돌하고 있지 않은가.

미 테러사건 직후 기고한 ‘폭격에 대하여’는 촘스키 사회비평의 일면을 함축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먼저 그는 이번 사건이 “호전적인 극우파들에게는 하나의 선물”이라 말했다. 이렇듯 그는 예의 주도면밀한 사고로 문제의 본질을 파헤치고 있다. 한편 미국인들에게는 섣부른 분노에 앞서, 타자에 대한 이해 노력이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우리는 선택의 여지를 갖고 있다. 우리는 이해하려고 할 수 있고, 또 그러기를 거부할 수 있다.”

사실 촘스키의 사상을 기존의 격자로 가두어들이는 것은 무의미한 일일지도 모른다. 우리에게 그가 중요하다면, 그것은 그의 업적이나 뛰어난 활동 때문이 아니라 자신을 한계 짓지 않고 늘 변화하려는 그의 태도 때문일 것이다. (http://www.zmag. org/chomskygsf.htm에 전문 수록)
권희철 기자 khc@kyosu.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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