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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비 기동력 등 열세 지구전·인해전술로 작전 세워
장비 기동력 등 열세 지구전·인해전술로 작전 세워
  • 교수신문
  • 승인 2007.07.16 11: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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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중의 中國 散策]중공군의 전술

<압록강의 기억>은 중공군 참전 당시의 국경 도시 단동 시민들의 회상을 도입부에 많이 넣고 있었다. 하늘을 나는 미군 비행기를 ‘까마귀 떼’로 불렀다고 어떤 시민이 말하고 있었다. 아마도 압록강 다리를 공습할 때의 광경을 말하는 것 같다. 1주일간을 100여 대의 전투기가 다리를 집중 포격했으니 하늘이 새까맣게 보였을 것이다. 밤에만 진격했는데, 어찌해서 낮에 진군하는 모습의 사진을 찍을 수 있었느냐고 진행자가 스스로 묻고 있었다. 쉬사오빙이라는 당시의 사진사는 역사적인 참전의 기록사진을 남기기 위해서 일부 부대에 부탁해서 낮에 진군하는 사진을 찍었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사진에는 시민들의 열렬한 환송 장면이 계속 나오고 있었는데, 초기에는 <지원군 군가>가 미처 나오기 전이어서 주로 <해방군 행진곡>이나 외국의 기병대 행진곡과 소련 군악을 연주했었다는 이야기도 나온다. 중공군의 진격이 낮이 아닌, 주로 밤을 이용했다는 것은 정설이다. 낮에는 제공권을 쥔 미군기의 폭격을 감당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밤에만 그것도 인해전술로 세계 전사 어디에도 없었던 인해전술로 2차 세계대전 이후 가장 강했던 미국 군대와 중공군이 맞섰다.
유엔군의 공습과 포위에 정면으로 대결하기에는 중공군의 병력은 턱없이 약했다. 중공인민지원군의 부사령관 겸 후방근무사령관이었던 洪學智가 쓴 <항미원조전쟁을 회억하며>를 보면 그 당시 중국 군대는 미국군의 정황에 대해 아는 바가 거의 없었다는 것이다. 제2차 세계대전 때의 노르망디 상륙작전에 대해서만 조금 일고 있었을 뿐이라고 홍학지는 말하고 있다. 그러나 국공내전을 어렵사리 치르고 갓 건국한 자기들과 비교해 볼 때, 미국 군대는 현대화된 장비를 갖추고 있을 뿐 아니라, 기본적으로 기동력이 강하고 육군의 지상 화력과 해·공군력도 절대적으로 우세하다는 판단을 하고 있었던 것 같다.
홍학지의 글을 잠깐 인용해 본다.
“이런 분석에 근거하여 우리는 작전 원칙을 다음과 같이 확정했다. 전략상으로는 持久戰의 사상을 수립하고, 전술상으로는 우세한 병력을 집중적으로 뚫고 들어가기, 우회, 분할, 포위, 근거리 전투, 야간 전투, 속결전 등 전통 작전방법으로 적들의 장점을 피한다…적들이 우리의 철길과 대 통로를 봉쇄하고 파괴하면 우리는 철길과 대 통로를 피해서 행동한다. 우리 보병의 두 다리 행동은 적들의 기계화 행동에 비할 수 없으나 반면에 단점이 장점으로 변한다. 우리는 또 대담하게 우회공격으로 적후를 뚫고 들어가서 우리의 강점을 충분히 발휘하며 수류탄의 작용을 발휘한다.”
여기서 주목할 대목은 전략으로서의 지구전과 전술로서의 전통적 작전 방법이다. 모택동의 <持久戰論>은 유명하다. 항일전쟁 시기 그는 이 지구전론으로 중공군을 채찍질 했다. 몇 구절을 소개한다.         
“亡國論者들은 적을 귀신처럼 여기고 자기를 초개와 같이 여기며, 速勝論者들은 적을 초개처럼 여기고 자기를 귀신처럼 여긴다. 모두 그릇된 것이다. 우리 견해는 이와 반대다. 즉 항일전쟁은 지구전이며 종국적 승리는 중국의 것이다.”
“중일전쟁이 지구전이고 또 종국적 승리가 중국의 것이라고 한다면 이런 지구전이 세 단계에 걸쳐 구체적으로 표현되리라는 것을 합리적으로 예상할 수 있을 것이다. 제1단계는 적의 전략적 공격, 우리의 전략적 방어의 시기이며, 제2단계는 적의 전략적 수비, 우리의 반대공격 준비의 시기이며, 제3단계는 우리의 전략적 반대공격, 적의 전략적 퇴각의 시기이다.”
인해전술과 지구전으로 막강 미국 군대와 맞섰던 중공군, 그들의 전술 개념은 중국 국민당군과 맞서서 싸웠을 때의 그리고 종국적으로 그들이 승리했던 그 전통적 작전방법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고 할 것이다. 孫子兵法의 골간을 살펴보자.
“모든 전쟁은 기만에 근거한다. 따라서 공격할 수 있을 때 공격할 수 없는 것처럼 보여야 하고, 군사를 사용할 때 활동하지 않는 것처럼 보여야 하며, 적과 근접했을 때에는 멀리 있는 것처럼, 멀리 있을 때에는 가까이 있는 것처럼 믿게 해야 한다. 적을 유인하는 미끼를 내놓아라. 혼란을 가장하고서 적을 공격하라.”
베일 알렉산더 같은 사람도 “역사상 가장 위대한 장군들을 통해 배우는 놀랄만한 사실 중의 하나는 압도적인 힘을 보유하고 있는 경우를 제외하면 그들의 성공적인 작전 전부가 실제적으로나 심리적으로나 적의 측면과 후방에서 이루어졌다는 사실”이라고 말한다. 맥아더 장군의 인천상륙작전도 적의 의표를 찌른 후방공격의 대표적 성공사례라 할 것이다.
힘이 약한 중공군이 할 수 있는 작전이란 주로 야음을 타서 움직이고 유엔군의 퇴로와 보급로를 차단하기 위하여 유엔군 진지 후방으로 부대를 이동시키는 陣地戰이 아닌 遊擊戰의 성격을 띌 수밖에 없었다. 이 전쟁에서 모택동의 장남 毛岸英이 죽었다.
그의 무덤도 다른 장병들과 함께 현재 북한 땅에 있다. 모영은 사령관 팽덕회의 소련어 통역으로 근무하고 있었다.
“생사의 갈림길은 누구도 알 수가 없다. 팽덕회는 고집을 피우며 안 가겠다는, 새로 지은 방공굴로 억지로 소개를 감으로써 극적으로 폭격을 면하였으나, 멀쩡하게 소개를 같이 갔다가 무슨 일이 있어서인지 잠깐 옛 사무실로 볼일 보러 갔던 모안영은 순간적으로 폭격을 맞고 목숨을 잃었다”<李中 평전 “모택동과 중국을 이야기하다”에서>.
그 때의 정황을 앞의 홍학지는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다.
“적의 비행기가 부단히 떠도는 것을 보고 나는 의심이 들었다. 적기가 자주 오다보니 경험이 생기게 되었던 것이다. 무릇 적기가 첫날에 어느 곳의 상공을 떠돌면 이튿날 꼭 그곳을 폭격하곤 했다. 당시 우리가 입수한 정보에 의하면 미군은 줄곧 지원군 시령부의 지휘관을 찾고 있었던 것이다.”
유엔군에도 당시 벤플리트 8군 사령관의 아들이 공군 조종사로 출격했다가 산화했다. 1950년에서 시작되어 53년에 휴전된 한반도의 전쟁은 이렇게 적군 장수의 아들들을 희생시키면서까지 상대방을 공격해야 했던 ‘무한전쟁’이었다. 그러나 그 ‘무한전쟁’은 어느 한편이 이기는 쪽으로 가닥을 잡지 못하고 ‘유한 전쟁’으로 종결되고 말았다. 
클라우제비츠의 <전쟁론>은 전쟁의 규모와 목적, 정치목적에 따라 유한전쟁과 무한전쟁으로 구별된다고 했다. 커다란 정치목적을 가진 전쟁, 적의 영토를 점령하거나 무조건 항복을 받아야 하는 성격의 전쟁은 무한전쟁일 수밖에 없다고 했다. 제2차 세계대전은 그랬었다. 북한의 처지로 볼 때 그들은 남한 영토의 점령이라는 정치적 목적 때문에 무한전쟁을 시작했다. 방어에만 급급하던 유엔군이 인천상륙작전의 성공으로 북한 진공에 본격적으로 나섰을 때, 맥아더 사령관의 전략 역시 공산군의 완전 섬멸을 목적으로 했다고 했을 때, 그것은 무한전쟁의 범주에 들어갈 수 있다고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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