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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철제 12지상·채색인물토용 발굴 ‘화려한 부활’
신라 철제 12지상·채색인물토용 발굴 ‘화려한 부활’
  • 조유전 / 토지박물관장
  • 승인 2007.07.16 11: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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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유전의 발굴 뒷이야기]‘개 무덤’으로 불렸던 ‘경주 토용총’

용강동 고분 출토 토용.

경주는 신라 1천년 고도로 알려져 그 자체가 거대한 유적이라고 해도 과히 틀린 말이 아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경주에 대해 무엇을 알고 있는지 즉 신라에 대해 무엇을 얼마나 알고 있는지 반문하면 결과적으로 아는 것이 없다는 결론에 이른다. 이것은 기록의 부족에서 오는 당연한 현상이다. 그렇기 때문에 남겨놓은 유적을 통해 실체를 조금식이나마 밝혀 나가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그런데 오늘날 과연 우리는 그러한 노력을 위해 말하자면 유적보호에 어떤 노력을 했는지 부끄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개발의 이름아래 흔적 없이 사라지는 것은 유적뿐이다. 그래서 경주는 특단의 보존대책이 마련되어야 함에도 우리는 아무것도 못하고 표피적인 일에만 매달려오고 있는 것이다.

경주용강동은 현재 새로운 건물들이 들어서 도시화 되었다. 이곳에 경주용강동고분이 자리하고 있다. 무덤 가까이에는 새로운 경주시 청사도 건립되어 일대가 이제는 경주의 새로운 중심위치로 변했다. 그런데 이 무덤은 현재 도로변에 마련된 작은 공원 내에 있고 정부에서 사적(史蹟)으로 지정하여 보호하고 있다. 이 무덤이 유명하게 된 것은 무덤 내에서 신라시대 만들어 진 철제 12지상(鐵製 十二支像)의 일부와 채색토제인형(彩色土製人形) 즉 토용(土俑)이 출토되었기 때문이다.

1980년대 후반까지만 해도 이 용강동일대는 논, 밭으로 경작되고 있었고 경작지 가운데 작은 마을을 이루고 있는 전형적인 시골 풍경이었다. 그런데 마을 한곳에 작은 동산하나가 있었는데 마을사람들에게 개무덤, 말무덤, 고려장으로 전해오고 있었을 뿐 누구도 관심을 두지 않았다. 심지어 마을의 논, 밭에 필요한 객토대상이 되어 흙을 파가면서 그곳에 쓰레기까지 버리는 등 전혀 관심 밖이었지만 다행이랄까 정상부에 30여년 된 소나무 한그루가 있어 여름철이면 가끔 더위를 피하는 나무그늘을 제공하고 있었다.

이 무덤을 발굴조사 하게 된 계기는 신라문화를 사랑하는 모임인 신라문화동인회가 1977년부터 신라시대 어느 임금의 무덤이 분명하다고 줄기차게 주장해 오면서 당시 경주사적관리사무소에 발굴조사를 건의했다. 그래서 1980년에 조사할 계획을 수립했다. 그런데 1979년 12. 6사태로 박정희대통령이 서거하고 이어 12. 12사태를 거쳐 전두환 정권이 들어서자 공무원 구조조정에 의해 경주사적관리사무소가 80년에 폐쇄되어 조사계획이 무산되었다.

1986년 5월 당시 문화공보부 이원홍장관이 경주를 초도순시하는 과정에 국립문화재연구소 경주고적발굴조사단에서 실시중인 신라 황룡사터 발굴현장을 방문했다. 이 때 수행한 국립경주박물관 정양모 관장이 이 무덤을 발굴할 필요성이 있다고 건의했다.

그 자리에서 발굴을 검토하라는 지시가 떨어졌다. 이렇게 되어 경주용강동고분이 발굴됨으로써 그 실체가 드러나게 된 것이다.

용강동 고분 발굴전 모습

발굴 전 외형상으로 보았을 때 몇 차례 도굴된 흔적이 보였고 폐고분(廢古墳)에 지나지 않아 발굴조사의 시급성은 없었지만 장관의 지시를 무시할 수 없어 내키지 않는 조사를 해야만 했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 86년 6월 16일 정오 발굴조사를 위한 간단한 위령제(慰靈祭)를 지내게 되었다. 위령제를 지내는 것은 조사를 위해 죽은 자의 유택(幽宅)인 무덤을 허는 일에 대한 신고와 용서를 바라는 의미에서이다. 그런데 갑자기 하늘이 캄캄해지면서 비를 뿌리기 시작하더니 많은 비를 내렸다. 행사도중 이렇게 많은 비를 맞아 본 일이 그때까지는 없었기 때문에 하늘이 노했나 보다 하고 조사원들은 놀란 가슴을 쓸어내려야 했다. 

이미 도굴된 폐고분이라 간단히 끝날 것으로 판단한 발굴조사는 예상을 보기 좋게 벗어난 결과를 가져왔다.
발굴조사가 시작된 지 1개월 정도 지날 쯤 7월 어느 날 한여름의 무더위와 싸우면서 무덤내부에서 조사하고 있던 조사원이 흙 범벅이 된 길이 7~8cm쯤 되어 보이는 유물하나를 들고 나오면서 “단장님 아무래도 안압지에서 출토된 남근(男根)과 같은 유물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고 했다. 무덤 속에서 남근이 출토될 일이 없겠지만 만약 출토 되었다면 이것은 세계토픽 감이 아닐 수 없다. 그래서 찜찜한 마음이었지만 유물에 범벅이 되어 묻어있는 흙을 조심히 털어내도록 했다. 그런데 놀랍게도 유물은 목이 없어진 여성인물토용이었다. 통통한 몸매에 주름치마를 입은 모습뿐 아니라 거기다가 채색까지 되어있었다. 마치 신라여성이 수줍은 자태를 보이면서 우리의 눈앞에 환생하는 착각으로 조사원들은 모두들 깜짝 놀랐다. 전혀 생각 못한 유물이었고 우리나라 발굴역사상 당시까지만 해도 이러한 인물토용이 출토된 예가 없었기에 더욱 흥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없어진 목을 찾아야 한다. 그래야만 완전한 인물토용을 발굴하게 되는 것이다. 부러진 목을 누가 가져갈 일도 없으니 반드시 주변에 있을 것으로 확신하고 찾도록 했다.

없어진 목을 찾기 위해 다시 무덤 안으로 들어가 쌓인 흙을 제거하던 조사원이 갑자기 단장을 찾았다. 빨리 들어와 달라는 주문이었다. 무슨 사고라도 발생한 것인지 영문도 모르고  마음을 조이면서 내부로 들어갔다. 그런데 발을 들여놓는 순간 상상하지 못했던 광경이 무덤내부에서 펼쳐지고 있었다. 무덤의 주인공이 누웠던 시상(屍床)앞에 사람모습의 인물토용이 도열하듯 줄지어 서 있었다. 비록 작은 인물토용들이었지만 마치 무덤내부에 들어오는 악귀라고 쫓아 내려는 듯 버티고 서있었다. 이렇게 되어 개 무덤이라고 불렸던 폐고분이 화려하게 부활하였다. 아마도 신라 왕족의 어느 한 분의 무덤이 분명하겠지만 그러나 주인공은 지금까지도 오리무중이다. 이것이 유적발굴의 한계이다.

조유전 / 토지박물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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