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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깊이읽기] 『세계없는 세계화』(피터 고완 지음·홍수원 옮김, 시유시 刊)
[깊이읽기] 『세계없는 세계화』(피터 고완 지음·홍수원 옮김, 시유시 刊)
  • 이찬근 인천대
  • 승인 2001.10.30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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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10-30 13:12:46

미국은 21세기에도 전세계의 패권국으로 남겠다는 강력한 의지를 갖고 있다. 이는 그리 놀라운 얘기는 아니지만, 그 계획에 쓰인 독특한 방법은 널리 알려져 있지 않다. 20세기 전반기의 서유럽 제국은 무력과 식민화를 통해 이를 달성했지만, 오늘날 미국은 세계지배를 위한 도구로 외견상 주권국가의 틀을 인정하되 이를 무소불위의 시장에 종속시키는 방식을 활용하고 있다. 원제 ‘글로벌 도박(Global Gamble)’의 저자인 노드 런던대의 피터 고완(Peter Gowan) 교수는 미국이 총성 없이도 글로벌 패권 프로젝트를 밀고 갈 수 있는 배경으로 달러와 월스트리트의 힘을 지목하고 있다.

1971년 미국의 닉슨대통령은 달러의 금태환정지 조치를 발표했고, 미국 안팎의 많은 사람들은 미국 자본주의가 기울기 시작한 것으로 판단했다. 그러나 금의 속박으로부터 벗어난 달러화는 미국에게 국제통화 문제에 대해 독단적인 권한을 행사할 수 있는 새로운 조건을 형성했다. 미국은 자국의 이익논리에 따라 달러의 금리와 환율을 마음대로 조작할 수 있는 권리를 확보했고, 반강제적으로 변동환율체제에 편입된 각국은 미국의 정책변화에 일일이 적응하는 것 외에는 도리가 없게 되었다.

이어서 73년말 석유위기가 발발했고, 무역수지 적자에 빠진 각국은 IMF라는 공적 시스템을 통해 달러가 환류되기를 바랬다. 그러나 미국은 이를 거부했고, 걸프지역 산유국에 영향력을 행사함으로써 미국의 민간은행이 중심이 되어 오일달러를 환류시킨다는 짜여진 계획을 그대로 밀고 나갔다. 이 과정에서 국가간 자본이동을 통제해야 한다는 케인즈적 국제금융질서는 자본의 무차별 이동을 허용하는 신자유주의적 국제금융질서로 치환되었고, 공적 금융이 후퇴하면서 남긴 빈 공간을 월스트리트가 차지하게 되었다.

얼핏 보기에 새로운 체제의 등장은 각국 정부에게 운신의 폭을 넓혀 줄 것으로 기대되었다. 경상수지가 적자상태가 되더라도 민간 국제금융시장으로부터 자금을 차입하면 그런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다고 생각되었다. 또한 각국은 과거처럼 고정된 환율을 그대로 유지하기 위해 다른 경제 목표를 희생할 필요가 없이, 자국통화의 환율을 한층 신축적으로 운용할 수 있는 재량권을 갖게 된 것으로 생각되었다. 그러나 이는 한낱 환상에 불과했고, 자유가 아닌 덫이었다. 시장으로부터 끊임없이 국가신인을 얻어내야 한다는 ‘신뢰의 게임’은 각국으로부터 정책 자율권을 박탈했고, 각국의 생산부문은 금융자본에 예속되어 갔다.

이처럼 닉슨 행정부가 기안한 새로운 세계지배의 프로젝트는 레이건 행정부를 거치면서 서방 세계를 하위 파트너로 포섭했고, 클린턴 행정부에 이르러 거의 완성단계에 진입했다. 특히 소련이 몰락한 이후 워싱턴은 괴테의 파우스트와도 같은 유혹을 받게 되었고, 글로벌 패권전략은 불가역의 세계화라는 이념으로 포장되었다. 그리고 새로운 유령이 태양처럼 공허하고 잔혹한 눈길로 쏘아보자, 유럽의 사회적 시장경제도, 동아시아의 개발모델도 모두 무릎을 꿇고 말았다.

이러한 맥락에서 저자는 세계화를 가리켜 정치적 기획과는 전혀 무관한 것, 혹은 순수한 의미의 기술적·경제적 힘에 의해 추동되고 있는 것으로 인식해서는 안 된다고 경고한다. 외환금융위기라는 드라마의 주연 배우를 시장요인으로만 생각해온 종래의 우리 인식이 큰 오류임을 꼬집고 있는 것이다.

저자는 오늘날 세계질서의 핵심인 달러-월스트리트 체제(DWSR: Dollar-Wall Street Regime)를 탐구하기 위해서는 까다로운 수학이나 통계학에 의존하는 주류 경제학의 정교함에서 벗어나 정치학적 분석의 틀과 시각을 접목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현실타개의 가능성에 대해서는 낙관적이지 못하다. 90년대 이후에 나타난 국제적 좌파운동의 난맥상과 뒤이은 국제노동운동의 쇠퇴, 그리고 냉전의 동맹국들에게 습관이 되어 버린 미국의 리더십에 대한 순종이 큰 장벽이라는 것이다. 이제 남겨진 대안은 공멸의 파국으로 치닫거나 혹은 세계의 금융자본가와 불로소득층의 체제유지 비용을 서둘러 지불하는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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