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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태롭고 지루한 풍경…상상력의 빈곤
위태롭고 지루한 풍경…상상력의 빈곤
  • 이종호 / 한국예술종합학교·건축과
  • 승인 2007.07.09 10: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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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 _ 도시연구 현황과 쟁점] ④ ‘건축’으로 본 도시

고대 도시 이래 수천 년을 걸어 온 길임에도 오늘 건축가들이 새삼 이 도시를 걷는다. 도시를 걸으며 이 도시를 이해하려 애쓴다. 도시의 역사, 도시의 이론들을 몰라서가 아니다. 오늘 우리 눈앞에 전개되고 있는 현대의 도시를 그 어떤 역사도, 이론도 충분히 설명해 내지 못하기 때문이다. 더구나 아시아의 도시들, 지난 세기 후반 등장했었고 지금도 맹렬히 팽창하고 있는 “아시아의 거대도시-Asian Hyperpolis”들에서는 더욱 그러하다. 오늘 전 세계의 도시화 현상과는 또 다르다. 아시아의 거대도시들에서는 우리가 알고 있는 도시의 현상들이 모두 함께 있다. 전근대의 자취를 읽을 수 있으며 그 위에 근대의 기획들이 집적되어 있는가 하면 다시 후근대의 여러 징후들로 분열되어 나간다. 이 모든 일들이 시공간을 함께하며 탁류의 도도함처럼 흘러 나간다. 이 나라의 이 도시들, 어느 도시 못지않다. 그래서 오늘 이 도시의 건축가들은 그들 작업의 공간이고 그들 상상력의 원천이며 사실은 그들 자신의 존재기반인 이 도시를 걸으며 생각에 잠긴다. 학습한다.

도시이론, 실제도시 앞선 적 없어
도시에 관한 두 갈래의 인식이 오늘의 상황을 가른다. 하나는 근대의 기원에서 나온 것이고 다른 하나는 후근대의 성찰에서 읽혀지는 것이다.
사유의 전통 속에 ‘낡은 마을’을 허물고 ‘새 도시’를 건축해야만 했던 데카르트의 다음과 같은 말이 전자의 인식을 대표한다. “고대의 도시들이 크고 작은 집들과 그것들이 이루는 꼬불꼬불하고 부정형한 거리를 어떻게 이루고 있는가를 살펴본다면 이것들은 한 사람의 건축가가 자기의 꿈을 좇아 만들어 낸 정연한 도시에 비해 훨씬 덜 정돈되어 있다.”(<방법서설> 제II부) 후자의 인식은 자신의 앞선 사유를 부정하며 일상 언어의 가치를 재삼 받아들인 비트겐슈타인의 다음과 같은 말 속에 드러난다. “우리의 언어는 하나의 오래된 도시와 그것을 둘러싸고 있는 새로운 도시로 비유될 수 있다. 좁은 길과 공터, 오래된 집과 새로운 집, 그리고 여러 시대를 통해서 증축되어진 집들로 이루어진 미로의 도시(오래된 일상 언어). 그리고 그 주위를 둘러싸고 있는 규칙적인 직선도로, 똑 같은 모습의 집들로 채워진 수많은 새로운 교외 시가지(새로운 형식 언어).” (<탐구>) 그러나 속단하지 말자. 생각에 잠긴 건축가는 쉬이 두 번째 이야기에 기울어 있을 것이라고. 그리 간단하지 않다. 이 도시의 건축가들은 오래된 도시 같은 달동네를 그저 풍경으로 노래하지 않는다. 무교동의 골목과 종로의 피맛길을 그저 향수로 이야기하지 않는다. 보다 복잡한 함수와 보다 치열한 현실이 있음을 이미 안다.
하나의 비유에 지나지 않았던 데카르트의 언급은 3백년 후 아테네에서(꼬르뷔제 주도의 CIAM 회의) 그 권위가 확정된다. 아직 계획이던 권위는 브라질의 밀림 위에 그리고 펀잡 주의 들판(샨디가르)위에서 이내 현실이, ‘삶이 함께하지 않는 불온한 현실’이 되고 만다. 불온한 현실은 쉽게 소멸되지 않는다. 끊임없이 소환된다. 사회주의 도시에서 인민의 주택으로, 거주를 자본의 재생산으로만 간주하는 도시에서 자본과 정치권력 모두에게 ‘훌륭한’ 도구로. 마침내 웃지 못 할 극점이 평양에 준비된다.
80년 대 북쪽의 정권은 서울에서 벌어지는 올림픽에 맞서기 위해 제 13차 세계 청년 학생축전을 유치한다. 교외에는 광복거리, 통일거리가, 기존 도심부에는 창광거리가 만들어진다. 넓은 도로와 고층 아파트가 이루는 그 실루엣이라니! 꼬르뷔제의 꿈인 ‘빛나는 도시’가 바로 그곳에 있다. 폭격으로 인한 백지위의 계획이 그곳에 있다면 이곳 남쪽에는 계획에 의한 폭격이 벌어진다. 끊임없이 지우고 세우며 또 다시 지워 쓴다. 비트겐슈타인의 도시 소묘는 이곳에서 전도된다. 오래된 일상 언어가 새로운 형식언어에 (그래도 질서 있게)둘러싸인 것이 아니라 오래된 일상 속으로 새로운 껍데기의 형식들이 불쑥 불쑥 침투한다. 착종된다. 긴 시간 동안의 수많은 ‘계획’들은 대체 이 상황 속 어디에 있는가? 혼성의 풍경은 또 어떤 ‘계획’들의 산물인가? 이러한 도시 속에서 건축의 규범이 어떠하다며 ‘예쁜 집’ 한 채를 더해 나가는 것은 대체 무슨 의미인가? 의미가 있기라도 하는가? 흰 벽에 비추이는 나뭇가지의 그림자에서 흔들리는 현상을 붙잡으려던, 빛으로 드러나는 침묵의 공간에서 존재의 심연을 노래하려던 건축가는 그 집 문 밖을 나서는 순간 그가 갈망하던 존재, 현상을 과연 어디에서 구할 것인가? 깊은 절망이 그 자리를 대신한다. 그러나 절망은 지속되지 않는다. 그리 될 수도 없다. 모든 것은 관념 너머의 실재이기 때문이다. 그 누구의 탓을 말하기 전 우리의 사회적 과정이 드러내는 한 단면이기 때문이다. 있는 그대로의 그것을 먼저 받아들이지 않고서는 그 어떤 해석도, 해석에 이어지는 성찰과 대응도, 작업도 단 한 걸음을 내딛지 못하고 만다. 

삶의 실재성에 대한 인식과 탐구 필요
한 무리의 건축가들(sa라는 이름의)이 이 나라의 도시들을 유랑하고 있다. 제주의 한 마을에서 무주, 강경, 양구로. 부산에서 새만금, 목포, 통영, 순천으로. 그리고 이제 서울로. 벌써 십년이다. 오직 몸으로 그 도시들에 부딪힌다. 그 도시들 속에 어떻게 온갖 종류의 시간들이 질곡으로 겹쳐 있으며 현실은 어떻게 수많은 정책, 수많은 계획들을 비틀며 비웃고 있는지를 확인한다. 어디를 가도 발견의 즐거움이 있다. 전체 구조 속에, 작은 골목 속에 그리고 지적선 속에 보이지 않게 숨어있는 의미들이 있다. 현실화의 과정이 다가오기를 기다리고 있다. 그러나 위태롭다. 굵은 도로 계획선과 재개발, 뉴타운 등등, 제도의 이름이 그것들을 위태롭게 한다. 안타까운 것은 그 의미들의 소멸 때문이 아니다. 의미들은 자신들이 올곧이 드러나 현실화되기 보다는 오늘 더 의미 있는 다른 계열로 재구성되며 현실화되기를 기다리고 있다. 안타까운 것은 그 기회를 잡지 못하는 소멸이기 때문이다. 더 이상 그러하지 않을 방도가 필요하다. 혼돈이라 불리는 이 도시들의 또 다른 의미와 잠재력을 애써 붙잡아야 한다. 잠재력이란 그 혼돈의 역동성일 수도, 여러 층위의 보이지 않는 네트워크일 수도 있다.
한 무리의 건축가들이 지금 유랑하고 있는 것이 그 때문이다. 여전히 학습이지만 때로 실천으로 향한다. 하지만 형식과 제도로만 근대를 만들어 온 이 사회는 도시를 실천하는 그 길목에 어느새 온갖 소통의 방벽부터 만들어 놓았다. 내부로만 작동하는 폐쇄의 회로를 구축해 놓았다. ‘신은 자연을 만들었으며 인간은 도시를 만들었다’는 멈포드의 말은 인간이라는 단어를 특별한 도시전문가, 군림하는 도시행정가 그리고 그들과 이익을 주고받는 탐욕스런 도시개발자로 대체한다면 글자 그대로 정확한 오늘의 현실이 된다. 그 시스템의 작동으로 이루어 낸 것들이 과연 무엇인가? 폐쇄회로의 제도들이 아직도 온당한가? 대체할 그 무엇은 또 무엇인가? 상상력이다. 이들 도시의 지루한 풍경위에, 미세한 혈관 위에 가해지고 더해질 상상력이다. 지역과 지구의 경계를 넘어, 제도와 형식의 껍질을 뚫어 다원화된 삶의 내용들을 너끈히 포용할 수 있는 도시 건축적 상상력이다. 누구로부터의 상상력이든 무슨 관계인가. 열어 젖혀 논의될 수 있기만 한다면. 제도 사이를 비집을 때 실천의 작은 틈들이 있다. 광주에서, 순천과 무주에서 기회를 얻는다. ‘기본구상’의 이름을 가진, 제도구 전 단계의 자유로운 기회들이다. 봉평, 양구로 이어지고 이제 제주에서 다시 시도되려 한다. 실천인 동시에 여전히 학습이다. 궁극의 학습은 다시 건축을 향하게 된다.

도시이론, 도시 ‘실재’에 마주치는 것부터
그러나 이때의 건축은 더 이상 도시를 구성하던 개별 요소로서의 건축이 아니다. 이미 건축은 그 안에 도시를 품었고 도시는 건축과 상호 함의의 관계를 가지고 있다. 건축가들이 바라보는 현대도시의 현상과 변화는 건축의 새로운 규범인 동시에 개념 그 자체다. 건축과 도시를 나누는 것은 더 이상 의미가 없다. 과거에 비할 바 없이 다양한 집단과 다양한 개인들 사이의 충돌, 급속한 팽창 그리고 변형들이라는 현대 도시의 징후들은 건축의 내부에서도 더 이상 낯선 일이 아니다. 
현상이 이론을 앞서고 있는 아시아의 도시들. 인류의 도시화 과정에서 가장 빠르게, 가장 넓고 크게 도시화의 과정을 겪고 있는 이들 도시를 해석할 수 있는 그 어떤 이론을 우리는 아직 가지고 있지 않다. 겨우 붙여지는 말이라야 고밀, 초집적 정도다. 우린 이미 그 스펙타클 속에서 무감각하다. 논의는 계속될 것이나 그것이 어디로 향할 수 있을지 아직은 잘 모른다. 하지만 이것만은 분명하다. 그 어떤 선험도 필요치 않다. 도시의 실재에 마주설 뿐이다. 그리고 실재란 삶을 관찰하는 모든 분야들을 다 동원한다 해도 충분치 않다. 하물며 도시, 건축이라는 좁은 테두리 속만의 상상력이란 더더욱 아니다.

이종호 / 한국예술종합학교·건축과


 

 필자는 한양대를 졸업하고 ‘공간’에서 일했다. 최근 아산 현충사의 이순신 기념관 작업을 하고 있으며 현재 도시건축연구소 소장을 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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