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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마] 학문과 예술의 가교 놓았던 역사의 서간들
[테마] 학문과 예술의 가교 놓았던 역사의 서간들
  • 전미영 기자
  • 승인 2001.10.30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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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10-30 10:36:23

때로 백마디 말보다 한 줄 글이 사람을 움직이고 세상을 뒤흔든다. 만천하 공개된 벌거벗은 글보다 달빛 아래 어슴푸레 감춰진 내밀한 편지 한 줄이 더욱 그렇다. 젊은 청춘들이 강물에 풍덩풍덩 뛰어들 때 손에 쥔 것은 베르테르가 슬픔으로 직조한 편지 한 장이었다. 편지에 연정만 담으라는 법은 없어서 모반과 반역, 혁명의 위험천만한 義氣가 넘치기도 한다. 때로 편지는 당대 지식인들의 가없는 논쟁의 매개가 되어 독설과 비난 사이를 오가느라 너덜너덜해지기도 한다. 그들이 우연히 흘린 영혼 한 톨을 통해 우리는 사상과 학문과 예술과 사랑을 엿본다. 그러니 편지가 없었다면 우리 영혼은 얼마나 빈약했을 것인가.

남명·퇴계의 신경전, 엥겔스의 우정

“요즘 공부하는 자들을 보건대, 손으로 물 뿌리고 비질하는 절도도 모르면서 입으로는 천리를 담론하여 헛된 이름이나 훔쳐서 남들을 속이려 하고 있습니다.…아마도 선생 같은 長老께서 꾸짖어 그만두게 하시지 않기 때문일 것입니다.”명종 19년에 남명 조식이 퇴계 이황에게 보낸 편지의 한 구절이다. 평생 한 번도 만나지 못한 이들은 가끔씩 이렇게 서간을 주고받았는데, 서로에 대한 마음의 깊이와 상관없이, 학문과 세상에 대한 견해가 첨예하게 달랐다. 제 주변의 일상도 돌보지 못하면서 입으로는 세상만사 진리를 꿰찬 듯 번드르르 말의 주단을 까는 이들이 옛적에도 있었던 듯, 남명은 퇴계에게 부박한 지식으로 학자입네 하는 무리들을 꾸짖으라 한다. 그들은 바로 퇴계 주위로 송사리떼처럼 모여드는 젊은 학자들을 말하는 것이다.

퇴계는 남명의 무엇이 못마땅한가. 그보다 전 명종 8년에 보낸 편지에서 퇴계는 나라의 부름을 받고도 벼슬에 나가지 않은 남명을 은근히 질타한다.

“황은 개인적으로 생각하기를 백성이 되어 고의로 벼슬하지 않는 것도 의리가 아닌데 君臣의 관계를 어찌 피할 수가 있겠습니까?…집사께서는 산림에 묻혀 살면서 무엇을 확고하게 세워 놓았기에 저 영리의 길을 잊을 수 있단 말입니까?”남명 보기에 퇴계학의 번성은 저자거리의 싸전이 번성하는 이치로 보였을 것이며, 퇴계의 눈에는 남명이야말로 세상에 하나 도움되지 않는 자존심만 붙들고 앉은 꼬장한 선비로 보였을 수도 있다. 하여, 몇 편 안되는 서간이지만 행간에 읽히는 두 사람의 날카로운 신경전과 자존심 대결은 자못 흥미진진한 면이 있다.

친구이자 동지인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편지들은 자체가 공산주의의 역사이다. 사상을 깨칠 때, 이론을 정립할 때, 결혼하여 일가를 이루고 가난으로 자식을 먼저 보낼 때, 스스로 곤궁함을 온몸에 뒤집어쓴 채 육신의 비참함을 견뎌야 할 때마다 마르크스는 엥겔스에게 편지를 보냈고, 두 사람이 주고받은 편지는 서로의 傳記와도 같다.

1858년 4월 2일 편지에서 마르크스는 경제학 저작을 위한 그의 최초 작업 계획을 주요 논점을 조목조목 그려가며 엥겔스에게 설명하고 있다.

“…다음은 제 1부의 간략한 개요이네. 덩어리 전체는 다음과 같이 6권으로 나뉘어질 것이네. 1. 자본에 대하여 2. 토지소유 3. 임금노동 4. 국가 5. 국제무역 6.세계시장…자본. 이것은 본래 제 1부의 가장 중요한 부분이며, 이 부분에 관해서는 대부분 자네의 의견을 구하지 않으면 안될 것이네. 그렇지만 오늘은 더 쓸 수가 없네. 담즙 때문에 속이 쓰려 펜을 놀리기 힘든 데다가 책상에 머리를 수그리고 있자니 어지럽네. 그러니 다음 번에…”그후에도 마르크스는 자본 연구를 진행하면서 엥겔스에게 편지를 써대는데, 복잡한 개념정리, 계산, 낙서와 같은 웅얼거림이 가득하다. 즉, 엥겔스는 마르크스에게 칠판이자 학습장이자 참고서이자 ‘이론의 시험장’ 같은 것이었다. 마르크스가 죽은 뒤 ‘자본’의 마지막을 손질해 출판한 것도 역시 엥겔스였다.

“친애하는 무어인에게”로 시작하는 73년 5월 엥겔스의 편지에서 엥겔스는 ‘침대맡에서 떠오른 자연과학에 대한 변증법’에 대해 한참 이야기하다가 의미심장한 말로 편지를 닫고 있다.

“무언가가 사실이라고 믿는다면, 그 어떤 비루한 영국인이 나에게서 사실을 훔치지 못하도록 그것에 대해 말하지 말게나. 다듬으려면 여전히 많은 시간이 필요하다네.”

감옥의 빗장을 푸는 편지의 힘

현대에도 선비의 서간역사를 이어간 예를 찾아볼 수 있을까. 서늘한 대숲그늘 같은 신영복 성공회대 교수의 편지들은 새삼 곱씹어볼만 하다. 18년간의 감옥생활에서 영혼과 육신이 피폐해지지 않도록 그를 도운 것은, 다름 아닌 가족에게, 세상에게 보낸 편지들이었다.

“…恩怨과 인정, 승패와 무상, 갈등과 곡직이 파란만장한 춘추전국의 인간사를 읽고 있으면 어지러운 세상에 생강 씹으며 제자들을 가르치던 공자의 모습도 보이고, 天道가 과연 있는 것인가 하던 사마천의 장탄식도 들려옵니다. 지난 옛 사실에서 넘칠 듯한 현재적 의미를 읽을 때에는 과연 역사란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의 살아 있는 대화이며 모든 역사는 현대사라는 말이 실감납니다.…저도 가뭄과 더위 속에서도 항상 ‘정신의 서늘함’을 잃지 않도록 노력하겠습니다.”(감옥으로부터의 사색 中)알베르 까뮈와 장 그르니에가 1932년부터 1960년까지 나눈 문학서신은 스승·제자로서의 절대적 신뢰와, 예술가로서 서로에 대한 애정 어린 비판까지를 포함한다. 널리 알려진대로, 보봐르와 사르트르의 편지는 ‘세기의 편지’ 가운데 하나이며 막심 고리끼와 로맹 롤랑 또한 20여 년간 서신 교환을 했다. 철학자 야스퍼스와 하이데거는 1920년부터 63년까지 교환한 편지글을 출판한 책이 있다. 희망이 불안으로, 애정이 알력으로 변화무쌍하게 옮겨 다니는 두 사람의 철학적 성장이 드러나 있다는 이 책과 고리끼-롤랑의 편지들은 불행히도 국내에 번역된 바가 없다. 다만 그 사유의 깊이를 짐작해볼 뿐이다.

인터넷과 모바일이 自筆을 대체한 이 시대에도 사람들은 누군가의 숨결이 담긴 편지 한 장에 설레고 꿈꾼다. 지금 당장 묵은 편지지를 꺼내어 호흡을 가다듬어 보는 것은 어떨지.
전미영 기자 neruda73@kyosu.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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