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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석기 연구 진일보 계기…지금은 ‘국민 축제의 場’
구석기 연구 진일보 계기…지금은 ‘국민 축제의 場’
  • 조유전 / 토지박물관장
  • 승인 2007.06.25 14:5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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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유전의 발굴 뒷이야기]미군 병사가 발견한 ‘전곡 구석기유적’

경기도 연천군 한탄강변에 있는 전곡구석기유적은 우리나라 구석기유적의 메카가 되었다.해마다 5월 5일 어린이날이 되면 구석기축제가열린다.
축제 때 이곳을 다녀가는 사람이 60~70만명에 이르고 있다. 이러한 축제가 있게 된 것은 한마디로 전곡구석기 유적이 우리나라 구석기유적을 대표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구석기유적이 발견된 경위는 재미있지만한편으로 생각하면 발견당시까지만 해도 우리나라 구석기연구 수준이 창피할  정도였다.

보웬, 애인과 한탄강 놀러 갔다 발견
1977년 년 봄 동두천에 있는 미 2사단 기상예보대에 근무하던 그레그 보웬(당시 27세) 상병은 사귀고 있는 한국인 애인과 같이 한탄강유원지를 찾았다. 강변 유원지에서  언덕을 거닐던 애인의 눈에 이상하게 생긴 돌이 보여 수석인가 하고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이를 웬에게 보여주었다.
이 돌을 본 보웬은 한눈에 구석기 유물임을 알았다. 그는 대학에서 고고학을 전공하고 입대를 했기 때문에 선사시대에 대한 예비지식을 갖고 있었다. 그래서 애인이 보여주는 돌이 바로구석기시대 주먹도끼임을 즉시 알아볼 수 있었다.
보웬은 서울대 고고학과 김원룡 교수에게 유물과 간단한 발견경위를 알려주었고 마침 제자 가운데 프랑스에서 구석기박사학위를 받아 영남대에서 재직중이던 정영화 교수를 불러 현장을 답사하고 구석기유적이 분명함을 알게 되었다.

정영화 영남대 교수 등 구석기 유물 확인
이렇게 되어 즉시 발굴조사가 이루어져 오늘에 이르면서 이제는 30여 만 년 전의 우리나라 구석기전기시대 유적임이 밝혀져 세계적으로 공인된 유적이 되었다.
정식 학술발굴조사는 서울대 박물관을 중심으로 몇 개의 대학박물관과 아울러 국립 박물관이 참여해 이루어졌다. 1979년 봄 발굴이 시작되어 4월 그 일부의 성과가 언론에 보도되자 당시 박정희 대통령이 관심을 가지고 비서실장을 현장으로 보내 격려까지 했다.
그런데 대통령 비서실장 일행의 현장 방문은 주민들의 눈을 휘둥그레지게 만들기 충분했다.
발굴조사가 무엇인지도 모르는 일대의 마을사람들은 구덩이만 파 놓고 가끔 돌멩이 건지는 일이 뭔가 좀 이상한 사람들의 행동으로 알고만 있었는데 검은 승용차 행렬과 방송차량들이 비포장도로를 따라 뿌연 먼지를 일으키며대거 몰려와 발굴현장으로 오는 것을 보고 어리둥절했던 것이다.
그때만 해도 연천군이 생기고 이렇게 높은 사람의 행렬은 처음이었다. 이렇게 대통령 비서실장이 현장을 방문하고 대통령의 격려금까지 전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전곡사람들이 발굴단을 보는 눈이 확 달라졌고 전곡 읍내 어디를 가서나 대접을 받았다.
그런데 이 때 박정희 대통령이 발굴단에게 보낸 격려금은 문화재관리국(현 문화재청)을 통해 연천군을 경유, 발굴단으로 전해졌다. 소위 대통령의 하사금이었는데 발굴단에서는 이 돈을 받아 발굴을 위한 컨테이너 형 현장사무실을 만들어 유용하게 사용했다.

대통령 하사금으로 현장사무실 세워
그리고 발굴조사가 일단락되자 사무실로 사용하던 가건물을 당시 발굴현장 책임자인 배기동(현 한양대학교 교수 겸 박물관장. 한국박물관협회장)이 사제를 보태 임시 유적관으로 개조했다. 유적관은 현장을 방문하는 내·외국인에
게 서비스를 해 오다 2002년 지금의 모습으로 전곡리구석기관이 다시 건립되면서 없어졌다.
컨테이너형 가건물이고 낡았지만 그래도 유물이 아닐 수 없는데 없앤 것은 아쉬움이 아닐 수 없다. 박정희 대통령은 그 해 10·26사건으로 서거했지만 발굴에 종사한 사람들은 통치
권자가 유적조사에 관심을 가져 비서실장까지 보내 격려와 동시에 격려금까지 보낸 일을 지금도 잊지 못하고 있다.
그런데 이 전곡 구석기유적은 한 사람의 우리나라 구석기학자를 배출하게 된 계기를 마련한 유적이 되었다. 앞서 말한 한양대학교  배기동 교수가 바로 그다.
그는 대학을 졸업하고 삼성문화재단에서 운영하는 호암미술관 큐레이터로 근무하다 적성에 맞지 않아 그만두고 서울대 박물관 조교를 시작하면서 전곡유적과인연을 맺게 되었다. 즉 그는 발굴현장 책임자로 실질적인 발굴조사를 진행하면서 전공을 삼국시대 마구연구에서 구석기연구로 바꾸게 되었다.

연대관 달라 구석기 권위자들 불러
전곡구석기 발굴당시만 해도 한국구석기발굴과 연구의 수준은 걸음마도 떼지 못하는 수준이었다. 그래서 각 대학 구석기전문 학자를 동원해 조사가 진행되었지만 그 연대관이 저마다여서 구석기 권위학자를 초청, 자문과 토론을 하기로 했다.
이 때 초청된 학자가 데스몬드 클라크 박사였다. 그는 미국의 버클리대에서 고고학을 강의하는 세계적인 구석기 학자로 알려져 있었다.
1982년 8월 문화재관리국의 초청으로 한국을 방문한 그는 전곡리구석기 발굴현장을 둘러보고 의견을 개진했다.
즉 전곡유적에서 출토된 유물의 연대는 20만년~10만년에 해당될 수 있는, 말하자면 전기
구석기 후기에 해당될 수 있다는 견해를 피력했다.
이렇게 되어 그간의 시비를 종식시키는 계기가 되었지만 한편으로는 외국학자가 던진 한마디에 우리학계의 얕은 자세를 비판하기도 하는등 우리나라 구석기 논쟁에 불을 붙이는 계기를 마련했다.
이 클라크 박사의 방문이 인연이 되어 배기동은 버클리에 유학하게 되고 그 밑에서 고고학박사 학위를 받고 귀국해서 한양대학교 교수가 되었던 것이다. 이와 같이 배기동은 전곡구석기유적이 배출한 학자였고 어떻게 보면 인생을 바꾼 유적이 되었다.
배기동 교수는 지금도 전곡구석기유적에 평생을 걸다시피 하고 있다. 5월 5일 어린이 날 전곡구석기축제를 처음 마련할 때 유명한 행위예술가인 무세중씨를 초대해 구석기 퍼포먼스를 한 일도 그의 주선으로 이루어졌고 올해로 15회 째를 맞은 축제에 방문한 사람은 70만 명에 이르게 되었으니 이제 국제적인 축제로 발돋움 하고 있는 것이다.
무엇보다도 세계적인 전곡구석기유적발물관을 마련하기 위한 국제설계공모를 통해 마련된 박물관이 하루빨리 건립되기를 고대하고 있다.

조유전 / 토지박물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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