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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화와 유교적 가부장제가 만나 여성 ‘시민권’ 압박
세계화와 유교적 가부장제가 만나 여성 ‘시민권’ 압박
  • 강연희 기자
  • 승인 2001.10.30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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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10-30 10:52:06
지금까지의 세계화 담론은 ‘남성’들의 것이었다고 말할 수 있을까. 1997년 IMF사태를 겪으면서 ‘가부장’ 남성 실업자의 좌절에 사회적 시선이 기울어졌던 것을 기억한다면 그렇다고도 말할 수 있겠다. 유교적 가부장제가 이와 같은 세계화 담론의 저층에 견고하게 놓여 있다는 학계의 비판이 제기돼 관심을 끌고 있다. 이번 비판의 전령자는 여성학계. 지난 19일 이화여대 인문관에서 열린 ‘글로벌라이제이션과 성의 정치학’ 학술대회가 진원지였다. 주최측은 이화여대 한국여성연구원(원장 김선욱 이화여대 교수, 법학).
급격한 세계화 과정을 경험하고 있는 한국에서 여성들이 겪고 있는 삶의 변화를 분석하고, 이러한 변화의 흐름이 한국사회 여성들의 삶의 질을 향상시키는데 어떠한 가능성을 제공할 것인가에 대한 접근과 논의가 쏟아졌다. ‘한국의 근대성과 가부장제의 변형’, ‘정보매체의 글로버라이제이션과 성별정치학’ 그리고 ‘한국의 글로벌라이제이션과 여성의 시민권’이라는 3개 분과 주제로 세계화의 대차대조표를 그림으로써 실천의 교두보를 마련하려는 흔적이 엿보였다.

신자유주의와 여성 노동자

세계화는 어떤 부정적인 결과를 가져왔는가. 조순경 이화여대 교수(여성학)는 ‘신자유주의와 유교적 자본주의’를 통해 “세계화가 시작된 이후 한국 사회를 이끌고 있는 대표 조류가 바로 신자유주의와 유교적 가부장제이며, 이 두 가지 이념이 노동 시장에서 여성 차별을 강화시키고 있다”고 지적하면서, 1999년 농협중앙회의 사내부부 여성 인력해고 사례를 분석했다. 신자유주의 정책의 핵심은 조직의 슬림화를 목표로 하는 인력구조조정과 노동의 효율성에 있다. 그런데 농협의 사례를 보면 여성 노동자를 해고하는 중요한 요소가 바로 전통적인 가치인 유교적 가부장제이다. 이것은 직장 안과 밖에서 보이지 않는 시선으로 작용하여 여성 노동자들이 자발적으로 사직서를 쓰도록 종용했고, 그 결과 효율성의 극대화를 내건 신자유주의의 목적과는 달리 오히려 효율성의 저하를 낳았다.

조교수는 능력 위주가 아니라 단지 여성이라는 이유로 노동권을 박탈당한 것은 유교적 가부장제라는 문화에서 누구도 자유롭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그렇다면, 세계화는 이런 ‘실패’의 흔적과 기록만 새겼을까. 긍정적 측면을 이끌어내는 조심스러운 작업이 눈길을 끌었다. 정보 기술과 매체 기술이 급속한 속도로 발전하고 있는 세계화의 새로운 문화 현상을 여성주의 시각에서 성찰한 노성숙 이화여대 한국여성연구원 연구원은 발표문 ‘문화의 지구화와 성별정치학’에서 문화·지구화·여성이라는 개념을 중심으로 경제적, 정치적 지구화에 대항하는 대안적 의미의 문화적 지구화를 제시했다. 신자유주의와 함께 문화산업의 지구화 과정은 가부장적인 문화의 성차별적 내용과 성별관계를 드러내고, 표현 방식에 있어서도 새로운 매체들을 이용하여 배후에 존재하는 권력관계를 교묘하게 숨긴다. 노연구원은 지구화의 변화속에서 정보화라는 새로운 구조를 바탕으로 이전의 근대화 과정에서 형성된 가부장적인 질서와 권력을 해체하고 다원화하여 여성주의에 입각한 문화를 실현할 수 있는 기회가 생겨나고 있다고 진단했다.

노성숙 연구원이 무게를 실어 정교화한 것은 문화와 지구화에 대한 개념이었다. 윌리엄스(R.Williams)가 규정하는 삶의 총제적인 방식으로 문화 개념을 수용하고, 지역적인 것과 지구적인 것의 상호 연관성을 역동적인 관계로 정의하는 로버트슨(Robertson)의 지구지역화 개념을 도입하면 ‘탈중심화’, ‘지역적 정치세력 강화’, ‘초국가적 여성주의 연대’의 지향점을 낳게 된다. 일례로 NGO의 성장은 전지구적 시민운동을 아래로부터 직접적으로 실현해가는 주체로 가능하게 만들었고 또한 다른 지역 여성들과 함께 네트워크를 형성하면서 여성주의 문화의 지구지역화를 실현하고 있다. 이렇게 볼 때, 가부장적 권력에 의해 독점된 것으로 보이는 대중문화 부문에서도 역동적인 측면을 읽어낼 수 있다. 오늘날 문화산업에 의해 대량 생산된 뮤직비디오, 인터넷 쇼핑몰 등에서 드러난 여성들의 이미지와 자신을 동일시하며 소비하는 데 머무르지 않고, 자신의 삶을 구체적인 사회적 경험과 연관시켜 ‘다르게 소비할 줄 아는 여성들의 힘들’이 자라나고 있다는 점을 포착했다.
그러나 논평자들은 좀더 과단성있는 주문으로 이들을 다그쳤다. 조혜정 연세대 교수(연세대 사회학과)는 조순경 교수의 글에 대해 “신자유주의와 유교적 가부장제 이념을 논의하는 것은 일종의 패배주의만을 재확인하는 과정이고, 우리가 관심을 기울여야 하는 것은 농협중앙회를 상대로 한 재판에서 어떻게 승리할 것인가를 모색하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노성숙 연구원의 토론자로 나선 이수자 성신여대 교수(대학원 여성학)는 “여성이 단순한 문화소비자가 아니라 여성주의 문화 생산의 주체가 되는 방법론이 명확하지 않다”고 지적했다.

여성주의 연대의 새로운 가능성

이 밖에도 여성 정책과 세계화의 관계를 오늘날 한국의 상황에서 구체적으로 살펴보고 한국여성 환경운동과 도시 지역 운동 등 아래로부터의 실천을 모색한 작업 등이 발표됐다. 한편 김선욱 원장은 “지난 2년간의 연구는 세계화와 여성문제를 거시적이고 총론적인 면에서 접근했다. 다음 단계의 연구는 이번 학회의 결과물들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실천과 연결될 수 있는지를 고민하고, 또한 세계화와 지역화의 상관 관계를 미시적으로 심층 연구하겠다”고 학술대회 서두에서 인사말을 남겼다.

아쉬움 하나. 소문난 여성학자들의 잔치에 제발로 걸어들어온 ‘남성’들의 수가 너무 적었다. 세계 여성과의 연대도 중요하지만, 양성 평등을 지향한다는 의도가 무색할정도로 여성학자들 ‘만’의 잔치였다. 남성들의 관심 부족인가 아니면 여성학자들의 ‘자기들만의 잔치’여서 그런 것일까. 남성들을 공론의 장으로 끌어낼 축을 여성학계로만 돌린다면 그녀들의 갈 길은 길고 멀어 보인다.
강연희 기자allesk@kyosu.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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